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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감동 May 20. 2017

Work Less, Get More!

우리는 더 적게 일하며,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어쩌다 치앙마이에 왔다.

숙소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숙소에 들어와 창문을 열다가, 

심장마비 걸릴뻔 했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탁트인 하늘과 치앙마이 시내가 모두 보인다.


이런 가슴 속의 뚫어뻥 같은 숙소가 

고작 하루 13,000원이라니…


하기야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택시비는 80바트 (2,600원),

숙소 앞에서 먹은 닭밥이 50바트 (1,600원) 였으니,

둘이 쓰는 숙소 하루 13,000원도 그럴듯하다.


이 곳에선,

하루 생활비가 한 사람당 1~2만원이면 될 것 같다. 


좋은 방을 구해 의기양양한 때밀(31)


'때밀'이 에어비엔비를 열심히 찾아 구한 숙소이다.

그와 나. 우린 6년전에 만났다.

그는 '에그모토'에 스쿠터 빌리러 왔던 손님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또 인연이 닿았고,

지금은 '따로 또 같이'의 가치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동업자'가 되었다.

자칫 서로를 이해하는데 애매함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친구나 동료라는 호칭보다는,

동업자라는 말이 이미 친구가 된 우리에게는 제법 마음에 쏙 박혀왔다.


우리는 어쩌다 '따로 또 같이' 여기까지 굴러왔다.


동업계약서를 쓰는 때밀(31)과 홍감동(32)




유심칩(1개월에 약 18,000원)산건 어떻게 알고,


한국의 한 친구가 “어디냐?는 카톡을 보냈다.

“치앙마이”라고 대답하니, 

깜짝 놀랐는지 “왜?”라고 다시 묻는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어?  나 지금 치앙마이야???'


그렇다.

여기 올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간다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왜인지는 나도 잘모르겠지만,


어쩌다보니 치앙마이다.


방콕에서 기차를 타고 13시간을 왔더니,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지?'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는 이 곳에 있으면 안되는 사람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나 생각했다.


치앙마이 오기 전,

6년간 운영한 회사의 스쿠터를 모두 처분했다.

스쿠터 렌트회사가 스쿠터를 모두 팔았으니,

사실상의 폐업이다.

불과 1년 전 신용보증으로 2,000만원을 대출받아,

노후 스쿠터들을 모두 최신형으로 바꾸었었다.

이렇게 정리하니 1,000만원 손에 들어왔다.

그마저 대출이자, 카드 값, 세금, 월세, 밀린 렌트비 등으로 나가고 나니까

결국 수중에는 60만원정도가 남았다.


은행 대출은 2,000만원 중에 1,500만원이 남았고,

다음 달이면 어김없이

은행이자, 통신비, 렌트비등 150만원은 나올탠데...


그 때에 나는 또 무엇을 팔아야 하나?


에그모토의 스쿠터를 모두 팔던 날




비행기 티켓을 샀다.


때밀과 만나, 

다음 프로젝트로 제주도에 갈까 하던 중이었다.

우연히 방콕행 비행기가 10만원인 것을 보고,

샀다.


수중에 남은 60만원 중에 10만원 가량을,

비행기 티켓을 사는데 쓴 것이다.

이제 50만원이 남았다.
환전을 했다.


문득 머릿속에,

다음달 통장에서 빠져나갈 150만원이 스쳐갔다.

런데 어차피 지금으로서도 막을 수 없다.

남은 돈,

그냥 의미있게 라도 쓰자.


'아! 50만원이면 그래도 한 달은 머물 수 있겠다"

라며 때밀과 이야기하며 좋아했다.


일주일 뒤 나는 왔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방콕으로,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그 길을 오는데 딱히 어떤 생각이 필요치 않았다.

졸렸고, 내내 잠을 잤다.


다음 달에 어떻게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미 우리는 이 곳에 와있고,

어떻게든 되겠지...

'다음달 대출이자는?'이라는 질문은 접어둬야겠다.


'이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먼저이다.


치앙마이 선데이마켓의 한량 둘




'대책이 없다면, 걱정도 없어라'


대책이 없는데, 걱정을 해서 무엇할까.

바보같지만,

참 지독히도 그렇게 살아왔다.

무언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하나, 나는 오로지 경험만을 신봉했다. 

물리시공간의 산물로 그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경험에서 비롯된 관념뿐이라 생각했다.

경험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많은 돈을 벌기보다, 많은 경험을 쌓고자했다.


Work Less, Get more!

'적게 일하고, 많이 놀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쩌면 아이러니한 것은,

'적게 일하고, 많이 노는' 삶을 만들기 위해,

정작 나는 치열하게 발버둥을 쳤다는 것이다.


도대체  '논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물론 술을 마시거나, 

밤새 수다를 하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하기도 (아주 많이) 좋아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공허했다.

나에게 더 재미있는 놀이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오감이 내게 살아있음을 보여달라며 아우성쳤다.


이거슨 바로 오감이 아우성치는 표정.jpg




그래서 여행을 했다.


작은 스쿠터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배낭에는 코펠과 비닐봉지를 주렁주렁 메달고,

그렇게 논두렁을 가로질러 전국을 돌았다.

잘 곳과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삶 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살이었다.

사실 첫사랑 누나가 내려난 집을 찾아가기 위해 시작했던 여행 끝에 나는

낯선 듯 코 끝에 와닿는 타지의 공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자다일어나보니, 여기가 성산일출봉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참아야하는 일이 참 싫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참아본적이 별로 없다.

내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죽어도 하기 싫었다. 하지 않았다.

그 것이 수능이든, 학점이든, 취직이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보다 열정이었다.


스무살에는 스쿠터를 사기 위해, 여행을 하기 위해,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

처음에는 공사장 일도 참 재밌었는데,

나중에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하나 싶었다.

나는 그냥 여행이 떠나고 싶었는데 말이다.

나는 언제나 '지금' 떠나고 싶었다.

여행을 하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을 나는 참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는 배가 덜 고파서 그래 라고 말을 하겠지만,

글쎄 나는 돈을 버는 것보다, 내 시간이 중요했고

자유가 중요했다.


우리는 서로 계산법이 다를 뿐이다.


나도 배는 고프다.




돈 버는 과정없이, 바로 여행을 떠날 수는 없을까?


찾았다.

공짜로 세계일주 할 수 있는 방법을.

여행으로 돈 벌 수 있는 일들을 골라 하는 것이었다.

작가가 되었다.

캐나다 일주하며 사진을 찍고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자동차 동향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독일 전역을 일주하며 자동차 회사들 인터뷰를했다.

참 신이가 났다.


하지만 곧 직업으로서의 여행도,

많은 것을 참아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것은 절대 'Work less, Get More'가 아니었다.

그저 (노는 것 같은) 일을 많이 하는 것 뿐이었다.

노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일을 계속하느냐,

여행을 순수하게 노는 일로 남겨두느냐.

고민을 했다. (반나절 가량?)


아무래도 참는건 싫다. 공짜 세계일주 포기.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북미대륙의 똑같은 길을 네 번 횡단했다.




장사를 했다.


빨리 돈을 벌고 싶기도 했거니와,

장사가 재미있어 보였다.

길거리에서 오카리나를 불며 팔았다.

돗자리, 방석, 담요, 맥주, 믹스커피, 치킨, 땅콩, 다육식물, 캔들, 쥬스를 팔았다.


분명 쉽지는 않았지만, 정말 재미는 있었다.

길거리 노점 장사 역시 생존이었다.

못 팔면 죽는 세계.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장사 그 것은 또 다른 말로 여행이었다.


피리부는 사나이




장사는 사업으로 발전했다.


최초의 서울 전지역에서 이용 가능한 

'스쿠터 쉐어링 서비스'를 만들었다.

누군가 그토록 좋아했던 공유경제로서,

쏘카나 그린카보다 1년정도가 빨랐다.

학자금대출 500만원으로 시작한 이 일은, 

단 6개월 만에 2,000만원가까이로 불어났다.

여기까지 참 신이가 났었다.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서울시로부터 사업자금 1,200만원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의미없는 교육을 받아야했고,

사업자금은 필요한데 쓰이지 못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이 일이,

점차 무언가 참아야 하는 일이 되었다.

하기 싫은 일들이었지만,

처음으로 조금은 참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참다보니,

2011년부터 지금까지 6년이나 흘렀다.

참는 것은 관성적이다.

바로 그만두지 못하면 참 많이 흘러가버린다.


한 번 참기 시작하면, 
우린 곧 쉽게 무뎌져버린다.


스쿠터 쉐어링이란, 여기가서 스쿠터를 빌려주고, 저기가서 반납받는 일이다.




어쩌면 내가 6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딱 내가 참을 수 있는 수준까지 확장했기 때문이다.

기회가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당연히 고용창출도 없었고, 투자나 발전도 없었다.

흥미는 잃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편해진 마음에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했다.


이미

흥미를 잃어버린 일을 계속 한다는 것은

점점 참아야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 일은 나의 캐시카우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참으며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0년만에 대학을 수료했고 (졸업은 아직 못했다),

옥상에 블루베리 나무를 심었다.


웃통을 벗고 한강을 달리다,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삶을 살았다.


나는 야인이 될꺼야.




겨울에는 강원도에서 팝업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사실 겨울스포츠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 때, 또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가능한 일로 해보기 위해,

겨울에만 운영하는 게하를 만들었다.

캐나다 밴프에서 보았던,

따뜻한 롯지의 느낌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쿠터 렌트가 어차피 겨울이 비수기이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 시즌별로 두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와 더불어 

스키/보드 장비, 옷 렌탈 매장 운영과 강습을 했다.

처음으로 4명의 크루들을 뽑아,

함께 일을 하고, 생활을 하고, 스키와 보드를 탔다.

일주일에 서너번씩은 손님들과 파티를 했다.

팝업게스트하우스 운영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운영은 3년정도를 채우고 관두었다.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야했고,

그럼에도 그 일은 지속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키와 보드는 원 없이 탔고, 미련은 충분히 없었다.


비행청소년.jpg




아아. 누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했던가?


누가

'적게 일하며, 많이 놀 수 있는' 방법은,

임대 수익이 최고라고 얘기했던가?


'불로소득'이라니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그래. 한 번 바벨탑을 쌓아보자 생각했다.

언젠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되겠다고.


첫번째 바벨탑 프로젝트는 카페 만들기였다.

당시 이태원의 에그모토 매장은 매일 비어있었다.

원래 스쿠터가 들어와야할 자리인데, 

모두 반납 즉시 바로바로 렌트되었기 때문이다 

(자랑질은 핵직구로 하라 배웠다.)


그래서 비어있는 장소를, 

함께 쓰는 장소로 만들자고 마음 먹었다.

이름도 '카페 공장공장' 이라고 붙였다.

'空場共場 : Empty space to Public space'

외국어를 쓰면 있어 보일까 해서, 

이왕이면 하나보단 둘이 좋을 것같아서,

한자와 영어로 이름을 지었나보다.

이 이름은 지금 이 그룹 공장공장의 전신이 된다.


그 당시 남는게 시간이었던 우리는,

대부분의 인테리어를 직접했다.

카페를 완전히 여는데 8개월이 걸렸다.

때밀이가 함께 불탄 벽지를 긁었고,

용접잘하는 바리스타 형진이가 선반을 만들었다.

나는 무릎으로 못을 박고

(무릎에 못을 박은게 정확하겠다) 통깁스를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공사비 아끼다, 병원비가 더 나온다'

는 말의 실천이었다.

어쨌든 '카페 공장공장'은 완성이 되었다.


이름처럼, 비어있던 이 곳에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용접잘하는 바리스타 형진이의 셀프 인테리어




자신감이라 쓰고, 욕심이라 읽는다.


두번째 바빌론 프로젝트는 '우리 사무실' 갖기.

빚을 내서 해방촌 달동네에 땅을 샀다.

우리나라에 평생 임대는 없다.

언젠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비울 남의 집 보다,

빚이라도 내어 내 집을 갖는 것이,

작더라도 내 손으로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훗날 더 빛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은행금리와 임대료를 생각할 때에도 

빚을 낼 수 만 있다면 매매가 유리했다.

그리고

땅을 사는데에 생각만큼 현금비율이 높지 않다.

금리 2.5%. 빛을 보기 위해 빚을 냈다.

때는 바야흐로 전국민 빚쟁이 시대였다.


'내 땅' 위에 컨테이너 박스라도 놓아서,

일단은 사무실로 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공업체와 미팅을 했다.

충당가능한 자금내에서, 컨테이너 시공이 가능했다.


집을 짓기 시작했다.

실력있는 건축디자이너 크루와 디자인했고,

건축학개론의 그 건축설계사무소에 허가를 맡겼다. 

그리고 시공업체에서는 건축을 시작했다.

(뭐 이미 땅 주위에 가림막을 쳐버린 상황이었지만)


설계와 철거부터 예상보다 큰 자금이 들어갔다.


익스퍼루트 파빌리온




드라마 보면 항상 시공단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시공업체에서는 애초 예상했던 견적보다

공사 비용이 더 많이 들겠다고 했다.

도면상의 자재가,

처음에 예상한 것 보다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비용 차이가 많이 (세 배 이상) 났다.


흔한 방법이라고 했다.

구두 견적 시에는 시공비용을 낮춰 불러놓고,

시공할 때 돈을 더 받아내는 방식이다.

그래도 세 배는 좀 심했다는 생각이다. 


보통 드라마를 보면,

이미 공사를 시작한 시점에서

이렇게 중단이 되면 회사는 부도위기를 맞고,

대표는 어떻게든 짜잔하고 돈을 끌어와

공사를 마무리하던데...

나는 어떻게도 끌어올래야 끌어올 돈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공사를 중단했다.


시공업체는 가림막 설치와 철수 비용을 받아갔다.

공사는 시작도 안했는데,

내 통장도 해방촌 땅도 텅텅 비어있었다.

돈이야 또 벌어서 지으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시간이 점차 흘렀고, 대출 이자는 계속 나왔다.

1년이 지나 건축허가는 말소가 되었다.


무턱대고 시작한 

불로소득의 꿈도 그렇게 잠정적으로 말소가 되었다.


해방촌 그 땅에는 빚이 많아서 잡초가 참 잘 자란다.





다시는 안 받으려 했던, 정부 지원자금을 받았다.


한국관광공사의 창조관광기업에 선발되었다.
현금과 사업화지원
 4,000만원 가량 받게 되었다.


물론 이 돈이 양날의 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서울시 자금과 마찬가지로,

돈을 받고 대신 내 자유를 내어준다는 얘기이다.

하고 싶지 않은 절차상의 과정과 교육,

정작 필요한데 사용하지 못하면서,
쓸데없이 처리해야할 서류작업 등...


그리고 내 사업을 허락 받아야 한다는 사실


하지만 점차 크루들이 생기고,

그 들의 미래를 책임져야겠다 마음 먹었을 때.

는 그토록 하기 싫은 일들도

어쩌면 해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이 전 다른 사업과는 다르게,

이 '익스퍼루트'는 사업적 궤도에 올려놓고 싶었다. 


누구보다 한국을 멋지게 여행하는 크루를 만들고,

그 들과 함께 익스퍼루트를 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외국 청년들을 보고 싶었다.



크루들이 만든 여행을 사람들에게 발표하던 날




함께 여행을 만들 크루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리고 그 크루들이 만든 여행에,

사람들이 또 하나둘 참여했다.

좋은 크루들과 좋은 사람들이 모여,

참 소중한 추억들이 하나둘 쌓아갔다.

모두 함께 열심히 일을 했다.

그 것이 내게는 그렇게 좋아 보였나보다.

나는 한 주 도 빠지지 않고, 여행을 만들었다.


운전기사를 자처해,
한번 떠나면 56일동안 전국일주를 하기도 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세상 가장 큰 행복으로 가득했다.

점차 자본금이 줄어드는 것이 보이기는 했으나,

돈은 큰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이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평생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익스퍼루트는 한국의 아름다운 곳을 찾아,
사람들과 여행하는 크루를 만드는 일이다.

익스퍼루트(Experoute)는

경험(Experience)과 공간(Route)의 조합어이다.

관념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바로 익스퍼루트인 것이다.

200가지 놀이 (Experience)와 

26가지 노선(Route)을 만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업 초창기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곳을 찾아'에 집중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는'이 

우리의 키포인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장소에 관계없이 이 여행에서 참 많이 

느끼고, 얘기하고, 울고, 치유 받았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사람들의 감정을 감히 건드릴까.

나는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제공하는 것이 매우 대단하지는 않았다.

함께 음악을 듣고, 모닥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고, 노을과 별을 보는 정도.


그런데 그러한 일련의 경험들을 메타포로 하여,

누군가는 스스로를 치유했고, 

누군가는 놀라운 생각들을 했다.

자신에게 내재되어있던

선험적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기도 했으며,

며칠 간 이어지는 심도 깊은 대화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감정 깊은 곳 까지 감응하고 감화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서로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같이 고민하고, 위로를 주고 위로를 받는 모습은.

여행 이후에도, 몹시 강한 애착으로 서로를 아꼈다.

점점 나의 걱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여행과 낭만의 메타포를 통해,

서로 정서가 공유되는 일은 가히 경외롭기도 했다.


나는 이런 놀라운 실험을 이어가고 싶었다.


에일리언이 인간세계를 분석하는 글.hwp




하지만 점차 밑빠진 독의 바닥이 드러났다.


얕은 자본금은 바닥이 났고,

그 것을 막기위해 애쓰는 크루들의 모습을 보는, 

나의 눈에 불안도 드러났으리라.

그들이 치뤄낸 프로젝트들의 훌륭한 결과에도,

밑빠진 독의 물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참 많이 흔들렸다.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쌓이는,

소중한 인연과 추억을 더이상 캐어하지 못했고

한 주, 한 주 미안함만 쌓여갔다.

지키고 싶은 것이 많아졌는데, 

그 것을 지킬 수 없는 나는 한참을 초라했다.


항상 어디론가부터 독촉 전화를 받았다.

자본이 만든 규칙은 나에게 그늘을 드리웠고,

점차 내 고집을 침식해갔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덕분에

끊임없이 무언가 일을 놓지 못했고,

어떻게 그만둬야하는지도 몰랐다.

내일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끔찍한 시간 들을 보냈던 날들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위를 위태하게 오가는 내 모습에,

한 때 나에게 자유롭다며 부러워 하단 사람들이

'이제는 그만 쉬는 것이 어때?'라며 다독였다.


어느날 문득 거울을 보는데,

'세상아 덤벼라' 호기롭던 내 모습은 간데 없고,


거울 속에는 벌건 눈 아저씨 하나 나를 보고 있더라.


나는 내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단언컨데,


그 가장 절망스러운 시간 들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할 수 있다.

몇 해 전 나는 그럴 것을 알면서 

스스로 받아들지 않았던가? 이 양날의 칼을.

나의 선택이었다.


2014년에 나 홀로 시작한 이 사업에,

2015년 8명의 체험단 크루들이 함께 시작했고,

2016년 12월 31일 마지막 여행까지

36명의 크루226일의 여행을 만들었고, 

그 여행에 806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우리나라 구석구석 68,138Km를 달렸다.


그리고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한 

(주)익스퍼루트의 통장은 


마침내 완전무결한 0원이 됐다.


한 명 한 명 떠올릴 때, 눈물이 나곤 했다.




쉬기로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및빠진 독에 더이상 물을 붓지 않기로 했다.

많은 것을 정리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일단은 그냥 대책없이 쉬며

여러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그 중 하나가, 최근 때밀과 제주도에서


'한량유치원'이란 널부러지는 공간을 만든 일이다.


참 사람은 고맙다.




그저 궁금했다.


앞으로 나와 같은 시도를 하는 이들이,

그러나 나와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지.


노는 것이 한심해지지 않는 사회,

하고 싶은 것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노동과 휴식이 적절히 안배되는 사회.

개인이 사회 생산성 향상의 부품이 되지 않는 사회.

각자 자신에게 맞는 휴식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갈 수 있을지.


그런 사회를 작게나마 만들어 보는 실험을 했다.


단 49일간의 팝업 게스트하우스에

연원 671명이 다녀갔고, 

제주도를 15바퀴 돌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수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할 이야기는 참 많기 때문이다.


평균연령 29세구요.우리는 귀요미 한량유치원생들




이 지독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로 하나의 질문을 던질 것이다.

Work Less, Get More!

우리는 어떻게 더 적게 일하며,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품어왔던 그 질문을

그리고 지독하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고민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보려 한다.


다음 달이면 또 어김없이

은행에선 150만원가량을 나에게 독촉할 것이다.

지난달에는 스쿠터를 모두 팔아서 막았으니,

다음달에는 또 어떻게 막아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다르게 질문하겠다.


그래도 당장 60만이 있는데,

나는 이제 무엇을 할까?"




나는 지금 치앙마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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