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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Jun 18. 2019

'여름' - 「여름휴가 계획, 이대로 괜찮습니까?」

여름을 행복하게 보낼 생각으로 회사원은 전전긍긍했다

  여름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어디에서 보답받을 수 있을까? 회사를 싫어하는 회사원이라도 결국엔 회사에 기대기 마련이다. 여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 그리고 여름을 견디지 못하는 모든 연약한 회사원들을 위해 - 회사는 여름휴가를 쓰게 해준다. 여름휴가. 원래 있는 휴가를 연달아 쓰게 해주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회사는 으스대며 뽐낸다. 바빠 죽겠지만 잘 쉬다 오세요. 회사 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일은 잠시 잊으시고요.

  

  덥기는커녕 냉방병으로 고생하는 우리들이지만 여전히 관습적으로 휴가는 여름에 다녀온다. 역시나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학생들의 방학과 맞추기 위해서인지, '한철' 장사 잘하고 남은 계절 동안 내내 쉬려는 휴가지 백숙집 사장들의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서인지 대한의 회사원들은 여름에 일제히 휴가계를 낸다. 여름이라고 해서 특별히 여행 가기 좋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싼 것은 더욱 아니다. 수요가 한 번에 폭증하는데 가격이 쌀 수가 있나. 설과 추석 때 고속도로에 펼쳐지는 대장관에서 확인하듯 우리는 아무래도 집단 이동의 DNA라도 가진 모양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7월부터 마음이 조급했던 것을 고백한다. 심지어 계획 짜기엔 다 그른 것이 아닌가 반쯤 포기하기까지 했단다.




  여름휴가 계획, 이대로 괜찮습니까?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라고 쓰고 싶었지만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알고 땅속에서 아직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매미 유충도 알고 있듯이 이미 여름이다. 그것도 완연한. 글을 쓰면서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눈부신 여름 햇살이 범람하듯 카페 창을 넘어 들어오고 있다. 저 빛이 바늘처럼 찌를 듯 더워지는 것은 좀 더 나중 일이겠지만, 아무튼 이미 여름이다. 성큼 다가온 것은 여름이 아니라 여름휴가고.

  

  여름휴가 계획, 이대로 괜찮습니까?

  

  정말 괜한 오지랖이세요, 하시는 분이 많겠지만 사실 이 질문은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계획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입을 따악 벌린 채 무책임한 말에 경악하는 그녀 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데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글은 말하자면 자기 고백, 거창하게는 고해성사입니다.

  


  예전에 언변이 유창하기로 이름난 연예인이 학교에 강연을 온 적이 있었다. 오늘은 어떤 강의를 째고 술을 마시러 갈까, 하는 고민으로 눈이 초롱초롱한 대학생들을 두고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러분. 지금을 소중히 여기세요. 그리고 즐기세요. 앞으로는 세월이 정말 빠르게 지나갈 텐데. 정말 X 나게 빠를 거거든요 (일동 웃음). 30대에는 지금보다 세 배 빠르고 40대에는 네 배. 이런 식으로 점점 가속될 겁니다. 웃기는. 너희도 금방 나처럼 노인네 된다니까? (웃음)"

  

  하하하. 뭐라는 거야, 대머리가 (죄송). 당시엔 이렇게 웃어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맞는 말이었다. 틀린 게 있다면 3배가 아니라 30배 정도 된다는 것. 점점 가속하는 것이 아니라 워프(WARP)라도 하는 거 같다는 것. 연예인이 강연인지 공연인지를 하러 온대, 수군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강당으로 향했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점심시간에 쫓겨가며 글을 쓰는 회사원이 되어 버렸다. 군대도 가기 전의 풋풋한 애송이에서 하루를 밤새우면 이틀을 죽는 병약한 사회인으로. 워프가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결국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한 이유는 변변한 환절기도 없이 계절이 너무 빠르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봄이 짧아지고 있는 것은 전 지구적인 트렌드이긴 해도 올해 봄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여름이 금방 왔다기보단 겨울이 좀 오래 머물렀고 봄 날씨를 만끽할라치면 미세먼지가 눈치 없이 함께 왔다. 겨우 코트도 필요 없고 미세먼지 마스크 없이도 나갈만하겠어, 싶었을 땐 여름이 어느새 뻔뻔한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있었다.

  

  7월이 되면 이제 지친 표정의 직장인들이 하나 둘 여름휴가를 떠날 것이다. 일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집중력으로 짠 계획에 따라 외국으로 훌쩍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껏 나른한 마음가짐으로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부지런해질지 게으르게 보낼지 입장 정리도 못한 터라 괜한 조바심이 나고 있다. 그녀는 아마 철저한 계획을 짜 놓고 짐짓 그런 것 없는 양 나의 반응을 떠볼 텐데 나는 일찍 감치 엑셀로 일과표까지 짜 놓은 양 태연을 가장할 셈이다. 들어볼래? 1번부터 7번까지 있는데.

  


  능글능글한 얼굴로 옆자리에 딱 버티고 선 여름은 이제 본격적인 더위를 뿜어낼 기세다. 공연을 앞두고 목청을 가다듬는 소프라노처럼 후끈후끈한 뙤약볕을 뿜어내기 위해 일단 초여름 볕부터 은근하게 내리쬐고 있다. 따사로운 공기가 뜨거운 열기로 바뀔 때 우린 어디에 있을까? 자애로운 표정으로 "이게 6번이야? 7번은 또 뭐가 있으려나?" 하는 질문을 넌지시 던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는 어디를 걷고 있을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라 같이 보낼 사람이겠다. 어디서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낼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는다. 여름휴가 계획, 괜찮습니까?

  

  네. 계획은 아직 전혀 없습니다만, 뭐가 됐든 같이 보낼 좋은 사람이 있어서 이번 여름도 괜찮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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