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함께 고생한 아이가 그저 대견하고 고마웠어요. 따뜻한 양수 속 모든 게 완벽했던 그곳과 달리 세상의 소음과 불빛이 얼마나 낯설고 무서울까 안쓰러웠죠. 그리고 다짐했어요. 제가 선택한 양육방법은 안아 키우기였습니다. 딸내미 힘들까 봐 손 탄다고 안아주지 말라던 엄마의 조언은 지금 아니면 언제 안아주겠냐는 저의 주장과 부딪혔어요. 모유만을 고집했고 다른 사람의 손 빌리기를 주저했죠. 마치 새끼 낳은 어미 개 마냥 모든 것에 날카로웠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모두 호르몬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근원 모를 고집을 피우고 또 피웠죠.
유모차에서 잠든 기적 같은 날
24시간 아기가 원할 때면 몸을 벌떡 일으켰어요. 주변 엄마들이 안눕법과 퍼버법을 통해 육아의 신세계를 맛보는 동안 저는 아이를 안아 재웠죠. 아기가 저를 원했다기 보다 제가 아이에 의지했던 것 같아요.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몸조리를 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부터 독박 육아의 정수를 맞보게 됩니다. 주변에 살뜰히 챙겨주는 지인들 덕분에 이런저런 순간들을 지나올 수 있었지만, 아이의 잠은 온전히 엄마인 저의 책임이었습니다. 아이는 공갈젖꼭지도 애착 인형도 즐겨하지 않았어요. 저는 아이의 공갈젖꼭지이면서 애착 인형이 되어갔습니다.
지수는 돌 즈음에도 낮에 30분씩 쪽잠을 잤어요. 아이의 낮잠 시간은 엄마의 휴식시간이자 또 다른 업무 시간이잖아요. 자는 아이가 깰까 봐 동동거리며 살림을 했고 그 시간은 어김없이 짧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터득한 방법은 같이 눕기였어요. 낮잠에서 깰 시간 즈음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아기 옆에 같이 누웠어요. 그럼 아기는 눈을 떴다 엄마를 보고 살며시 웃고는 살결을 만지며 다시 잠이 들었죠. 운이 좋은 날은 둘이 같이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개운하게 깨기도 했어요. 어느 날부턴가 아기는 잠에서 깰 때 더 이상 울지 않았어요. 방긋방긋 잘 웃었고 울음이 짧아졌지요. 점점 잘 먹고 잘 자는 순한 아기가 되었어요. 물론 제 팔과 다리는 아팠고 살은 쭈욱 쭉 빠졌지만요.
낮잠 전쟁 후 울다 잠든 날들.
초보 엄마들이 그렇듯 저는 육아를 글로 배웠어요. 글로 배운 육아에는 낮잠은 만으로 몇 세까지 꼭 자야 한다고 쓰여있죠. 그렇지만 낮잠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낮잠 시간은 우리에게 전쟁이었어요. 유모차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낮잠을 자는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웠어요. 하루는 낮잠 자기 싫다며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을 울어 댔어요. 너무 기가 차서 영상으로도 남겨놨죠. 그날 이후 저는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이건 아이도 원하지 않을뿐더러 엄마에게도 고통의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두 돌 이후에는 실컷 놀고 혼자 스르르 잠드는 날만 빼고는 낮잠을 재우는 노력을 일부러 하지 않았어요. 대신 바깥놀이를 정말 많이 했어요.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 들고나가 하루 종일 놀았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에 있는 날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밤잠 시간이 빨라지더라고요. 어른인 저도 피곤한데 아이는 오죽했겠어요. 그래도 낮잠은 자지 않고 버텼지요. 그 근성은 칭찬해요.
오후 5시가 되면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해요 그리고 조용히 누워 책을 2권 읽어요.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거나, 커튼을 치면 아이는 으레 자는 시간인 줄 알았죠. 한번 잠들면 누가 떠들건 말건 12시간을 푹 잤어요. 이렇게 우리는 호된 몇 번의 경험과 실패를 통해 우리만의 방식을 찾았죠.잠자리에 누워 책을 읽고는 이야기를 나눠요.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지루했던 일, 행복했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해요. 아이가 학교생활을 시작하고는 아이의 하루를 듣는 아주 기쁜 시간이죠. 엄마가 매일 읽어주던 동화책을 이제는 지수가 엄마를 위해 읽어줘요. 너무 피곤한 날 엄마가 책 읽기에 꾀라도 부리는 날에는 아이는 귀신같이 알고 칭얼거려요. 하늘이 두 쪽 나도 잠자기 전 책 2권을 읽어야 하죠. 아이와 보내는 사랑스러운 시간이긴 하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그냥 자고 싶어요. 어떤 날은 지수가 먼저 ‘엄마 오늘은 이야기를 좀 더 하다 잘까?’라고 스스로 제안하기도 해요. 엄마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아이를 보며 많이 컸구나 느껴요.
아침 기상 시간이 6시로 다소 이르긴 하지만, 오후 6시 이른 육퇴를 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낮에 열심히 육아하고 일찍 퇴근하는 스케줄도 나름 괜찮았어요. 덕분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난 후, 온전한 나의 시간은 조금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를 방에 눕히고 거실에 나와 한동안은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단 한순간도 쉬는 시간 없이 몰아치는 업무를 처리하고 난 후의 기분이랄까요. 하루 종일 종알대던 아이가 자러 갔는데, 고요함이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TV를 켜놓고 있었죠. 적막을 감추기 위해서요. 그저 소리가 필요했던 거죠. 날 위해 정성스레 뭘 챙겨 먹는 것도 사치였어요. 더 이상의 일거리를 만들기 싫었어요. 대충 먹을걸 입에 욱여넣고 정신을 차려요. 온전한 내 시간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그런 시간이죠.
깔끔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점점 청소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하루 종일 어질러진 집을 청소했죠. 집안을 내 맘에 들게 치우고 나면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어요. 욕실을 물기 하나 없이 마른 수건으로 싹 닦아 놓으면 기분이 좋아졌죠. 점점 더 청소에 집착했어요. 청소를 모두 마치고 나면 정말 오늘의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느낌이었죠. 반대로 집이 지저분해져 있으면 괜한 짜증이 났어요. 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아기를 위해 하루 종일 떠들었어요.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어요. 아이가 말을 시작하고 나서는 끊임없는 질문에 답을 하다 진이 빠졌죠. 에너지가 넘치고 말이 많은 남자아이와 하루를 보내고 나면 더욱 말이하고 싶지 않았어요.
육아에 살림까지 마무리하고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유튜브를 틀고 시간을 흘려보냈어요.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또 혼자라는 느낌이 싫었던 것 같기도 하고. TV를 실컷 보고 내 시간을 즐겼다 자위하지만 오히려 더 쓸쓸한 감정이 몰아쳤어요. 오늘 나는 뭘 했을까. 오늘 하루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덮어두려고 몸부림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때맞춰 신랑이 퇴근해 들어와요. 그럼 또다시 내 영토를 침범당한 기분이랄까? 신랑은 아이와의 하루를 궁금해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입을 열기 싫었어요. 그저 혼자 있고 싶었죠. 하루 종일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우리 가족을 위해 힘든 하루를 참고 보냈을 텐데. 그 사람의 하루까지 담아낼 그릇이 없었어요. 그 당시의 나는 스스로 우울을 감당하지 못했어요. 나를 덮친 우울의 파도가 같이 사는 사람도 삼켜버리는 시기였죠. 참 못되게 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이죠. 하지만 그때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나 필요했어요. 지금에 와서 그때의 나를 생각하니 이래저래 참 측은하네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시기가 지나자 뭐라도 하고 싶은 시기가 찾아왔어요. 한국 책도, 영어 책도 읽어보고, 음악도 듣고,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해가 긴 여름날에는 동네 한 바퀴 산책도 해보고, 명상도 하며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려고 했어요. 내 안의 감정을 다독여보려고 했죠. 어떤 날은 잠자는 아이 옆에 누워 아이 사진을 보다 밤을 새운 적도 있어요.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지나온 어제의 아이가 그립고 또 그리운 그런 날에요. 그 후로도 한동안 나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방황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내 속의 감정을 찬찬히 정리해 쏟아내고 나면 속이 후련해졌어요.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그리고 육아의 시간을 꺼내 찬찬히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함께했던 이야기, 우리가 함께 갔던 곳. 슬퍼서 덮어놨던 나의 이야기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너무 예쁘고 소중했어요. 하나하나 작지만 행복하고 감사한 순간들이었죠. 돌이켜보면 인생의 시간표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왜. 공부를 해도 해도 잘 이해되지 않을 때 있잖아요. 밤을 새워 공부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해하고 책장을 한 장 넘긴 기분이에요. 코피가 줄줄 나고 피곤은 하지만 뭔가 해낸 거 같고 뿌듯하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