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ysty 묘등 Mar 31. 2021

내가 나로 느껴지는 순간을 위하여

[도덕경 제1장]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도의 본체론적 측면

[도덕경, 오강남 풀이, 현암사]
"어찌하여 흑암의 공허만이 아니라 만물이, 그리고 내가 이렇게 존재한단 말인가? 조용히 생각해 보면 실로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상가가 공통적으로 "도대체 어찌하여 허공만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계속했고, '존재의 신비'니 '존재의 충격'이니 하는 말로 그 신비스러움을 표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라고 했다.
- 22P -


딸이 초등학교 입학 전으로 기억합니다. 산책하던 중에 질문을 합니다.

“엄마는 이런 생각해 봤어?, 손가락을 보면서 이 손가락이 진짜 내 손가락이 맞을까? 내 몸이 진짜 내가 맞을까? 이런 생각 말이야. 이런 생각이 이상한 거야?”


딸의 질문을 받는 순간 문득 어렴풋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거울 속의 나의 모습을 보다가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이 진짜 나일까?”라는 의구심이 들면서 ‘나’라는 존재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기억이 드문드문 시작되었던 시점으로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전인 듯합니다. 에릭슨의 심리 사회적 발달 단계 중 자아 성장의 결정적 시기인 ‘학령기’ 시작 전으로 그 어린 나이에도 ‘나’라는 존재에 의구심을 품을 만큼 나도 딸과 같이 잘 성장하고 있었나 봅니다.


낯섦으로 처음 다가왔던 ‘존재함’이 불혹을 넘긴 지금에서는 '존재 자체로서의 소중함'에 대한 결핍의 목마름으로 다가옵니다. 


도덕경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의 신비로움은 부인할 수 없는 본질일 듯하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이름 지어지고 규정되어지는 현상이 마치 나의 존재인 듯 이름과 규정에 얽매여 스스로 존재함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자문해봅니다


40대인 나는 지금 불혹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 순간 가장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워킹맘 10년 차로 쉼 없이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고 자부하지만 지난 10년간 나 스스로에게는 미안함만 가득합니다. 여성, 44세, 아내, 엄마, 직장인 등 사회적으로 부여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역할의 조각조각들이 어느 순간에는 마치 나의 본질이자 전부인 양 착각 속에 빠져 삶이 짐처럼 무겁고 힘에 부쳐 허우적거리다가 일상 자체가 침잠해 버리곤 합니다. 주변 돌봄과 챙김이 스스로의 소홀함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음을 상처 받고 힘을 잃어버린 몸과 마음이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스스로의 존재가 빛나야 주변을 따스하게 비출 수 있을 텐데, 나의 빛을 뺏어 주변에 주는 꼴이었으니 메말라버린 나의 쓸모를 지금에서야 논한 듯 존재에 대한 갈증만 더할 뿐이라는 사실을 도덕경 초입에서 발견합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내가 바로 '도道'이므로 이름 붙여 규정하려 들지 말고 나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자’며, ‘본연의 나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매 순간 놓치지 말자’고 공허한 외침이 될지언정 수십 번 되뇌어보려 합니다.

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 내가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차근차근 나의 존재에 질문하고 답을 구하다 보면 존재의 빛이 스멀스멀 살아나 언젠가는 반짝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겠지요. 나만 알아볼 수 있어도 가슴 벅차게 좋을 그 날에 한 발자국 다가가 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