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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Sep 24. 2020

명품. ‘위대한 프랑스’를 위해 탄생한
제국주의 기획품


 젊은 사람들조차 명품 가방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만큼, 한국에서는 이제 흔한 풍경이 되어있는 명품. 그러나 막상 명품들이 탄생한 곳이라는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에 그러한 브랜드들이 있다는 것을 망각할 만큼, 누구도 명품을 입고 있지도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명품을 가끔 볼 때는 상류층 사람들을 마주할 때였다. 부르주아 출신인 시부모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항상 명품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 머릿속의 프랑스 이미지’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응당 프랑스인은 그럴 것이라는 인식.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의 프랑스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는 명품을 탄생시켰을 뿐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명품(luxe)이란 말은 말 그대로 ‘럭셔리’를 지칭한다. 완벽한 아름다움과 최고의 품질을 담은 '빛나는' 물건. 이름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고급스럽고 정제된 느낌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 그것들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고도의 인위품’으로 부르주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럼에도 너도나도 명품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 또한 ‘남들과 차별되는 우월한 개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분을 선명히 나타내 주는 징표로서의 옷과 장신구. 귀족들의 ‘자기 차별화 욕구’가 만들어낸 산물.

프랑스 대표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의 히트상품 '뉴룩'중 A라인(좌) 프랑스 명품 브랜드 '랑방'의 세련된 광고 이미지(우)
세계 최고의 명품 매출을 올리는 프랑스 브랜드 '루이뷔통'(좌) 시계와 보석으로 유명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 '까르티에'(우)
나폴레옹 부인 조제핀이 단골이던 1780년 설립된 파리 보석상 '쇼메(chaumet)'의 '조제핀 반지'와 티아라. 조제핀 왕관을 본 땄다. 현재도 같은 모습으로 생산하고 판매된다


 프랑스 명품 산업은 연간 20만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프랑스 전체 수출액의 15%를 차지하는 프랑스 주요 산업이다. 연간 300조원에 달하는 세계 명품 시장의 27.4%가 프랑스 브랜드들이며 이들 대부분이 연간 1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린다. 명품을 만드는 건 프랑스지만 제품을 소비하는 건 대부분 해외 소비자들인 거다. 중요한 건, 명품 소비자들은 값비싼 물건과 함께 ‘고급스런 프랑스 이미지’를 함께 소비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명품이라는 인식’이 내면화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명품의 탄생과 정확히 같은 의도를 지닌다. 

 

 프랑스 패션으로 대표되는 명품은 1858년 설립된 파리 의상조합 집단 ‘오뜨 꾸튀르(haut couture)가 뿌리이다. 프랑스 최고 재단사들이 고급 직물을 사용한 주문 생산과 소량 생산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최고의 예술’로 통하던 그들의 옷은 세계 패션의 유행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개인 의상 제작자들이 세계적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폴레옹 3세가 이끌던 당시는 ‘권위주의 제국’을 표방하며 나폴레옹 1세와 루이 14세의 강력한 왕권을 계승하였던 시기다. 
 
 절대 왕정의 ‘사치 정책’을 이어받아 적극적인 ‘사치재 산업’이 추진되었고, 외제니 황후의 디자이너 워스와 황실 상인들을 결탁한 ‘오뜨 꾸튀르’를 탄생시켰다. 당시 황실 상인들이 ‘겔랑, 까르티에, 에르메스, 루이뷔통’ 이었다. 1837년 ‘에르메스(Hermès)’는 마차의 용구와 안장을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에게 공급하던 마구상으로 출발하였고, 귀족들 짐을 싸주는 패커였던 ‘루이뷔통(Louis Vuitton)’은 황후의 후원으로 1854년 고급 물류업으로 출발했다. ‘까르티에(Cartier)’ 역시 왕실 후원으로 1847년 보석 상점을 열게 된다. 


프랑스 최초의 '그랑 꾸튀에르'(최고 재단사)이자 황실 디자이너였던 '찰스 프레데릭 워스'의 파리 작업실(좌)과 그가 만든 옷을 입은 나폴레옹 3세 부인 '외제니' 황후(우)
1906년 또 다른 그랑 꾸튀에르였던 '잔느 파킨'의 파리 의상실은 맞춤복을 주문하려는 귀부인들로 넘쳐났다(좌) '오뜨 꾸튀에르'에 의해 1902년 만들어진 옷(우)
마구상으로 출발했던 '에르베스' 상표에 마차가 그려져 있다(우) 귀족들 짐을 싸주는 고급 물류업으로 출발했던 '루이뷔통'의 초창기 모습(좌)

 

 나폴레옹 3세는 귀족들에게 ‘축제 참가 의무화’를 명하여 사치품 산업 육성에 힘을 실어주었고 '파리 만국 박람회'라는 정치적 국가 이벤트를 만들어 자국 패션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데 성공 한다. 1855년 겔랑과 오피게즈전 기획을 시작으로 1878년 에르메스, 1889년 루이뷔통 등이 연이어 대상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둔다. 명품 브랜드에 '국가가 위상을 부여해준 것'이다. 이러한 국가주도적 ‘사치재 산업’ 정책으로 프랑스는 ‘패션과 명품의 나라’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며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을 줄줄이 탄생시킨다. 


 ‘벨에포크(아름다운 시대)’ 시대라 불리는 20세기 초 ‘폴 푸아레’를 시작으로, 1920년대 여성 해방과 자유라는 욕망을 담음으로 패션 혁명을 가져온 ‘샤넬’의 등장, 1940년대 여성미의 향수를 살린 뉴룩(new look)의 ‘크리스천 디오르’ 열풍, 1960년대의 ‘이브 생 로랑’까지. 프랑스 패션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견고한 이름이 되고 이것은 프랑스라는 국가 브랜드 가치와 직결되었다. 프랑스의 오랜 숙원인 ‘위대한 프랑스’를 향한 정책의 결실이었다
 
 프랑스 왕실은 일찍이 절대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사치재 경제’를 창조하고 장려해왔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복종을 끌어내고 차별화된 고급스러움으로 외국의 부러움을 받는 대상으로서의 프랑스. 루이 14세는 유럽 전역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귀족들 수요에 맞는 사치품 공급’을 명하였다. 그의 뒤에는 보호무역정책을 펼쳤던 재상 ‘콜베르’가 있었다. 패션산업에 매진한 콜베르는 중앙 통제 시스템으로 상품의 생산부터 철저히 품질을 관리하며 유럽 상류층을 타겟으로 한 최고급품 시장을 개척했다. 이것이 귀족들의 소비생활을 전략적으로 조종하여 부를 창출해 낸, 프랑스식 중상주의 정책 ‘콜베르티즘’이다.


1920년대 짧아진 치맛단과 평평한 가슴, 직선적 실루엣으로 '가르손 룩' 혁명을 가져온 샤넬. '여성 해방' 욕망을 자극했지만 '진주'에 집착하는 천상 상류층을 위한 패션이다
1947년 '뉴룩'을 선보이며 전쟁의 고단함을 여성미의 향수로 살려 성공한 '크리스찬 디올' 작품들. 여성들의 '우아함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여 '귀족'이 된 듯 느끼게 한다
1년에 단 두 번 파리에서만 열리는 최상류층 맞춤복 컬렉션 '오뜨 꾸튀르'쇼에 출품된 작품들. 선명한 여신 이미지로 '환상의 정점'을 체험하게 한다

 

 프랑스의 이러한 전략은 그전부터 있어왔다. 루이 11세의 리옹 견직물업 진흥 칙령을 시작으로, 프랑수와 1세의 견직물 산업 활성화 정책,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이 가져온 리옹 견직물의 발전, 이어진 콜베르 정책으로 리옹은 18세기 유럽 견직물의 중심지가 된다. 이것은 루이 13세의 재상이던 리슐리외의 책략을 실현한 역사였다. "왕가의 사치는 외국인에게 존경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하다" 왕국의 존엄을 각인시키고자 했던 전략으로서의 ‘사치’였다. 

 

 1954년 프랑스 명품 업체 연합은 ‘콜베르 위원회’라는 압력단체를 만들어 명품 브랜드 보호와 활성화를 시작한다. 콜베르티즘 부활을 천명한 이들의 설립 목적은 ‘프랑스의 문화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패션 국가 타이틀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명품 산업의 발전은 오랜 시간 공들여 육성된 ‘국가 차원의 성공적 마케팅 결과물’ 임을 말이다. 중요한 건 그것이 상류층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지 프랑스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명품은 ‘사치품’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다. ‘진짜 명품’은 자기 과시를 최고라 포장하여 선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1937년 '샤넬' 광고. 2008년 '디오르' 광고. 2019년 '오뜨 꾸튀르 쇼' 작품. 모두 노골적인 환상을 자극한다. '여왕의 지위'라는'신분 상승' 욕망이다
'황실의 사치'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했던 '프랑스 전통'에 따랐던 마리 앙뚜아네트(좌)와 현대판 로열패밀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우), 명품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이것이다

 

 명품이 명품인 이유로 ‘예술성’과 ‘장인 정신’을 말한다. 그러나 명품이 획득한 가치는 국가적 역량이 뒷받침된 결과이지 예술가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적 측면이 아닌 상업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맞다. 일부 계급을 위한 상품이 한 나라의 대표 문화로 인식되는 것은 마케팅의 성공이지, 프랑스의 재능이 월등히 뛰어나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명품이 ‘프랑스의 고급 이미지’를 강화해 온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 서민들과 상관없는 ‘미식’이 프랑스 문화로 둔갑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루이뷔통은 프랑스 황실 후원 아래 만들어진 성공한 가방 회사일뿐이다. 샤넬은 시류를 잘 읽어낸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성공한 의류 회사일뿐이다. 그들은 철저히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체다.

 루이뷔통과 샤넬은 프랑스가 아니다. 그것들은 프랑스가 지어낸 '환상의 세계'다. 
명품을 사는 건 '환상'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환상 속의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환상 속의 내가 존재하지 않듯이.







* 메인그림 : 나폴레옹의 아내 황후 '조제핀'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현실


참고 자료 : 프랑스 패션은 '국가 주도적 정책의 산물'임을 뒷받침하는 자료 <프랑스 패션 파워 형성의 배경이 된 사회·문화적 요인>, 조경숙 성균관대 의상학과 교수 논문 http://asq.kr/1NaYC6ngi12j<프랑스 문화와 명품 산업> 한양대 박동준 교수 논문 http://asq.kr/5fnUzuNmtiJO<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 데이나토마스 저 http://asq.kr/StTWzCGpKgWS명품은 '국가 차원의 보호 육성 산업' http://asq.kr/uiTx2AU7K3h1명품은 '절대권력 유지를 위해 탄생한 상품' http://asq.kr/G4q3SpiV695x'귀족들의 생활습관에서 유래'한 프랑스 패션 역사 http://asq.kr/iRdpmO7BSrd7프랑스 패션 흐름 요약, 한국패션산업협회 https://url.kr/WUqjBb, 찰스 프레데릭 워스 작업실, '파킨 하우스' 그림, 외제니 황후 드레스 출처 http://asq.kr/Zp3AgDS1xMoHhttp://asq.kr/JCBtp8bQev21,  http://asq.kr/4mPFBvbiv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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