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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26. 2020

히틀러가 존경한 나폴레옹,
프랑스 혁명의 상속자


 1940년 6월 28일. 나치 독일이 파리를 함락한 지 사흘 만에 히틀러가 파리에 입성했다. 그가 향한 곳은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였다. 나폴레옹의 관 앞에서 모자를 벗고 한참 동안 무덤을 내려다보던 히틀러가 외쳤다. "하이, 나폴레옹!" 히틀러는 그 순간이 자기 일생 중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히틀러는 2차 대전 기간 앵발리드 바닥이 독일군 군홧발에 손상되지 않도록 나무판자를 전체 대리석 위에 덮도록 지시했으며, 나폴레옹 무덤 주위에 모래주머니를 두어 무덤을 보호하도록 했고, 나폴레옹 2세의 관을 나폴레옹 곁으로 이장시켜 주기까지 하였다. 
 
 히틀러의 이러한 행동은 나폴레옹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게 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들 증언 자료를 근거로 <나폴레옹의 범죄>를 쓴 클로드 리브(Claude Ribbe)는 "나폴레옹은 군사 천재 라기보다, 학살 독재자인 히틀러 영감의 원천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며 "나폴레옹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모델이다"라고 말했다. 
역사가 폴 슈뢰더(Paul W. Schroeder) 역시 "나폴레옹이 고안한 체제는 비양심적이고 난폭한 표현으로 가득한 범죄적 기획이었다"고 말했다. 
 

 아이티 사수를 위하여 나폴레옹은 독립을 위해 싸운 주민들을 산채로 팔다리를 바퀴에 부서지게 하였고, 칼날이 있는 새장에 가둬 잠들면 찔려 죽게 했으며,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식인개들에게 물어뜯어 죽게 했다. 또한 배에 독가스를 넣어 10만 명 학살이라는 인종 몰살 범죄를 저질렀다. 카리브해의 또 다른 식민지 괄룹에서 노예 반란이 있어 났을 때도 같은 학살을 저질렀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침략한 이집트에서는 카이로 시민 2500명을 학살하였고, 오스만 포로들과 민간인들에게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어 죽게 하는 만행을 벌이기도 하였다. 


1940년 나치 독일에 함란됙 파리 모습(좌) 3일 후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의 에펠탑 인증샷(우)
나폴레옹 무덤 앞에서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추는 히틀러(좌) 그는 무덤을 2번 방문하였다. 히틀러가 깊이 존경한 나폴레옹 장군(우)


 스페인을 침략한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친형을 왕으로 앉힌 후 5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에는 1805년 아예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1814년까지 스스로 왕으로 즉위하며 온갖 약탈을 일삼았다. 시리아 정복 때는 목숨은 살려주겠다며 4천 명 포로들의 항복을 받아낸  손발을 묶은 채로 가혹 행위를 하고 총검으로 학살했다. 자신의 군대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1812년 68만 대군으로 러시아 원정을 떠난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10만 명만 남게 되는데, 질병으로 죽기도 했지만 병사들이 서로를 껴안은 채로 얼어 죽어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약탈과 집단 강간이 극악하여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은 ‘악마’로 평가되며 러시아 정교회는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1799년 자파에서는 중병으로 부상당한 2300명의 프랑스군을 적지에 그냥 버리고 떠나기도 했다.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병사들은 옥수수밭과 쓰레기 더미에 던져진 채로 죽어갔다. 당시 많은 프랑스군이 페스트에 전염되기도 했는데 보호소에 수용돼있던 자국 군인들을 ‘독살 명령’을 내려 학살하기도 했다. 그의 결단은 효율성과 비용절감’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생명을 도구로 바라볼 때에만 가능한 생각이다. 가스 학살은 그에게 ‘효율적인 제압’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에서 온갖 유물과 예술품 5천여점을 약탈했으며, 선명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802년 인종간 결혼 금지, 흑인 혼혈과 관계 맺은 모든 백인 여성을 프랑스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고 광범위한 노예제를 재도입했으며 유대인을 박해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이 ‘위대한 정복자’로 평가되는 이유는, 그가 프랑스 혁명 정신을 전 유럽에 전파하여 유럽의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교회의 권위를 시민에게 가져왔다는 데 있다. 사회적 변혁이라는 결과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혁명 정신을 전한 과정에서의 폭력이 간과되어 있다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나폴레옹이 전한 방식은 무력이라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참혹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나폴레옹 군대의 학살을 그린 <1808년 5월 3일>
자파에서 페스트에 걸린 프랑스 군대를 독극물로 몰살시킨 후, 앙투완 그로에게 그리게 한 '페스트 격리소 방문하는 나폴레옹' 선전화(좌) 1808년 나폴레옹 프랑스 제국 영토(우)


 더구나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을 휩쓸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에는 ‘약탈에 의지한 보급’ 체계가 있었다. 군대의 식량보급이 ‘현지 약탈’로 조달되었기에 기동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방식은 침략지의 민간인들을 프랑스군의 각종 폭력과 파괴에 노출되게 하고 현지 여성들이 손쉽게 성범죄의 희생양이 되게 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군대의 가장 큰 비밀 무기는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수’에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8만, 러시아가 20만의 병력이었을 때 프랑스는 150만 군대를 보유했었다. "당신은 나를 막을 수 없다. 나는 한 달에 3만 명의 군사를 사용한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외교관에게 한 말이다. 
 
 나폴레옹 전쟁 후 프랑스는 150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청년 인구 상실폭이 가장 큰 유럽 국가였다. 적군이 다 죽어도 프랑스군은 언제나 대체 병력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이 두 요소가 모두 힘을 잃었을 때였다. 가난한 지역이라 약탈에 의한 식량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병력 손실로 상대편을 압도할 숫자의 병력이 없었다. 
 
 주목할 건, 약탈과 징집을 포함한 나폴레옹의 방식들이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1793년 8월 혁명 정부는 18세에서 25세 사이의 미혼 남성을 강제 징집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를 위협하는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을 위해서였다. 프랑스는 이로써 1794년 100만 명의 병력을 1813년에는 250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때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위대한 프랑스'라는 '민족주의'가 함께 보급되며 프랑스군의 충정심이 고취되고, 스스로를 혁명의 메신저로 여기는 '혁명 전사'라는 정체성이 생겨난다. 그러나 침략군이었을 뿐인 그들의 사명감은 '배타적 민족주의'에 기반했기에 자유와 평등 정신에 위배된다
 

1804년 3월 21일 탄생한 '프랑스 나폴레옹 법전'을 신성하게 포장한 선전화
1805년 자신이 세운 '이탈리아 왕국' 국왕으로 제위하는 나폴레옹(좌) 세계 최강군대 프랑스군의 최고무기, 압도적 숫자의 병력(우)


 더구나 나폴레옹은 ‘약탈의 합법화’를 위해 ‘평화 조약’이라는 법적 도구를 이용하였다. 이 방식으로 침략한 나라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어 국가 재정을 조달하였으며, 후에 프랑스가 식민지 나라들에서 받아낸 식민지배 배상금 등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 이 법이 프랑스혁명 정신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자 거의 모든 국가의 헌법 초안이 된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이다. 또한 혁명 후 프랑스는 ‘국민총동원령(Levée en masse)’을 내렸다. ‘미혼 남성은 전쟁터로 나가고, 기혼 남성은 무기 제조와 식량 운반을 맡고, 부녀자들은 막사와 제복을 만들고, 아이들은 외과용 가제를 만들며, 노인들은 광장에 모여 군주에 대한 증오심을 설파하고 장병들에게 공화국의 덕성을 가르칠 것’이 내용이었다.

 
 건물들은 병영화 되었고 공장들은 무기 제조장이 되어 국가 전체가 ‘전쟁 체제’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국가적 통일성’을 위해 1790년 국민의 12%만이 정확히 사용하던 프랑스어를 농민에게 대대적으로 교육하였고, 각 지역의 방언과 문화는 획일화되었으며, 농민들 삶의 터전이던 촌락공동체는 붕괴된 채 ‘국가주의적’으로 모든 것이 흘러갔다. 혁명 세력이던 공화주의자들이 '민족적 단일체의 불가침성'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혁명 정부는 파리의 식량 공급 명분으로 농부들의 농작물 압류를 위해 군대를 시골에 파견했다. ‘국가의 합법적 약탈’이 시작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민족주의'에 근거한 강력한 포퓰리즘 독재는, 히틀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만의 특이한 정치사상인 ‘보나파르티즘’은 자유주의적 사회비전을 강력한 1인 통치의 권위를 통해 이룩하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자유주의와 독재, 혁명이 공존한다. 그러한 나폴레옹 방식의 뿌리는 계몽주의였다. 이십대에 이미 왕당파 반란을 두 번이나 진압한 그의 ‘불굴의 의지’는, 공화당원이자 자코뱅 지지자이자 계몽주의 후계자였던 나폴레옹의 ‘계몽주의 이상’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신으로 세계를 깨우기 위해’ 나폴레옹은 군대라는 무력으로 모두를 굴복시켰다. 그것은 히틀러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단일화가 강요되고 폭력이 동원된 ‘전체주의’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위대한 혁명 정신'은 어떻게 나폴레옹의 어두운 면과 연결 될 수 있던 걸까. 프랑스가 혁명기간 동안 자행한, 자국민에 대한 '나폴레옹식 학살'에 그 답이 있다. 





자기팽창이 부른 프랑스 잔혹사


* 참고 자료 : 나폴레옹의 비밀 무기,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 http://asq.kr/RPwcXnwgxZgEl, 나폴레옹 군대 기동력의 비밀, 현지 약탈 http://asq.kr/iNCJmgisRa0Uc, 나폴레옹 군대 스페인 집단 강간 역사 http://asq.kr/LUQ6mH1gEyEhU, 나폴레옹 자국군대 '독살' 미국 학자 칼럼 http://asq.kr/a2ihLb0ODlqv0, (한국기사 http://asq.kr/asbCtZ6hyTo1), 프랑스 혁명의 '단일화'된 민족주의가 폭력과 독재를 가능하게 함, 강철구 교수 http://asq.kr/dKitcIJjV4rBH, '징병제' 프랑스 혁명의 사생아이자 괴물, 최재희 교수 http://asq.kr/FdIdhkqqVh3MN, "프랑스 혁명 '국민총동원령'은 세계대전의 기원" 영국 전쟁사가 존키컨 http://asq.kr/qSgEcr1elvAhu, 나폴레옹은 계몽주의 후계자, 영문 위키피디아 http://asq.kr/hZ8jnXeGofmb, 나폴레옹, 혁명의 후계자 http://asq.kr/NV31j3KgF9gE, 이미 EU를 구상했던 나폴레옹의 계몽주의 이상 http://asq.kr/Se4zEqNwg9Sv, <나폴레옹의 외교정책:범죄적 기획>, 폴 슈뢰더 http://asq.kr/jOYdzxRXddz9<나폴레옹의 범죄>, 클로드 리브 http://asq.kr/OUrcg9GlazUf (영국신문 리뷰 http://asq.kr/gr18yVMEs364호주신문 리뷰 http://asq.kr/nnlLICb1yBI9, 한국신문 리뷰 http://asq.kr/opOcdWjIQhttp://asq.kr/IckkcomWN), <나폴레옹과 히틀러> 데스몬드 시워드 http://asq.kr/OuZlnfRxku9A,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나폴레옹 히틀러 비교 http://asq.kr/1zkY2mGMaDjh, 나폴레옹 스페인 침공 http://asq.kr/JnKh7gzZkxSphttp://asq.kr/ak8WwiUBN79q나폴레옹 이탈리아 원정 대약탈,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1300개 여전히 프랑스에 보존 http://asq.kr/VfRsXahsPWOru, 나폴레옹 전쟁배상금 http://asq.kr/go8ZLH38p58, 나폴레옹 나무위키 http://asq.kr/DDaN1Tn0cZ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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