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Jun 28. 2019

나를 살리는 밥상.
고향의 맛


 15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였고 여러 개의 짐은 거의 첫 번째로 수화물칸을 나와주었다. 이 산뜻한 출발이라니. 이제 남은 일은 공항 가까이 사는 동생네에 짐을 풀고 맛있는 집밥을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실은 비행기에서 계속 배가 고팠다. 기내식으로 아이와 나 모두 채식메뉴를 주문해놓았었는데 그 양이 실로 빈약하여 허기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채식메뉴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나의 순진함?을 곧바로 반성하게 한 '먹잘 것 없던' 식단. 더구나 우리의 단촐한 식판 위로 맛있는 불고기 냄새가 마구 떠다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보게 된 오늘의 메뉴 '한국식 돼지고기 볶음과 시금치나물'. 헛. 망했다.
 
 아이는 이내 코를 킁킁거리더니 "엄마 우리도 저거 먹으면 안 돼?"(실은 내가 먹고 싶었다) 승무원에게 혹시 한식 메뉴가 남으면 하나 갖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가 저걸 먹고 싶어 하네요"(이럴 땐 아이 핑계가 제일이지)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기다렸건만 역시나 한식 메뉴는 남아있지 않았다.
 빵 쪼가리를 더 먹고 싶진 않았으니 일단 소화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나의 배고픈 비행이 끝나고.
 
 공항에 마중 나온 동생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바쁜데도 늘 나와주고 언니 먹고 싶다는 거 꼬박꼬박 물어 맛있는 집밥 해놓고 기다리는 동생. 

 
 "언니 내가 바빠서 반찬을 많이 못했어" 
 "나 그냥 김치로 만든 거면 돼 알잖아"
 "맛있는 반찬집에서 반찬 왕창 사다놨지! 언니 먹고싶을까봐 겉절이는 해놨어"
 
 여전히 배가 고팠던 나는 차에 타자마자 가면서 김밥을 한 줄 사가자는 말부터 꺼냈다.
 
 "맛있는 빵집 있는데 빵이라도 사갈까?"
 "아니. 밥. 나 밥이 먹고 싶어"
 "김밥집은 돌아가야하니까 그냥 집에서 겉절이에 밥 먹을래? 오징어 초무침도 있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늘 그렇듯 날렵하게 뚝딱 밥을 준비하는 동생. 쾡한 얼굴로 주섬주섬 가져온 선물 꾸러미를 꺼내는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반가운 소리. "언니 밥 먹어~!"
 내가 좋아하는 소리다. 늘 밝은 기운이 넘치는 동생이 맛있는 밥을 해놓고 나를 부르는 소리.
 
 윤기 흐르는 흑미밥에 고운 빛깔의 겉절이와 비주얼도 훌륭한 오징어 초무침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다. 겉절이에서 올라오는 저 풍요로운 젓갈 냄새. 그리고 허겁지겁 첫 입을 떠 넣었다. 
 
 하. 그래 이거지! 내가 기다린 건 이거였지! 눈이 밝아지고 머리가 맑아지고 모든 피로를 한 번에 날려버리는 고향의 맛. 이제야 살 거 같았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폭풍 흡입에 돌입한 나.

 "언니 곧 있으면 저녁 먹어야돼 조금만 먹어" "지금도 먹고 이따가도 먹고 다 먹을 수 있어. 걱정 마!"
 
 그랬다. 늘 한국에 오면 그동안 '못 먹고 산 티'를 엄청 내며 과식을 하곤 했었다. 식당을 가도 밥 두 그릇에 반찬 두 번 리필은 기본이요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이 싹쓸이하고 나오곤 했다.
 프랑스에서 가까이 지내는 한국 친구들도 보면 고향 가는 최고의 즐거움이 먹는 거라는 데에는 일말의 이견도 없었다. 손 많이 가는 한식을 혼자 다 해 먹어야 하는 귀찮음은 둘째 치고라도 없어서 못 먹는게 대부분이기에. 
 

오징어초무침 (만 개의 레시피 '칼스버그')


 이렇듯 한국 도착한 첫날 풍족한 한식으로 첫끼를 먹는 즐거움은 언제나 크다. 더구나 손맛 좋은 동생이 해준 집밥은 언제나 나의 한식 결핍증을 한방에 보상해주는 신비한 마력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주문한 첫끼 메뉴가 또 김치찌개였다. 포인트는 칼칼하게.
 
 "언니 진짜 불쌍하다. 어떻게 맨날 먹고 싶다는 게 다 김치찌개. 김치전. 김치볶음이야. 김치도 못 먹고사는 불쌍한 우리 언니" 동생이 첫끼 메뉴를 물어볼 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 늘 똑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일상에서 김치로 만든 모든 요리는 '가장 귀한 음식'이기 때문에.
 
 내가 때마다 김치를 담가 먹는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요, 김치를 담아도 기껏 배추 3 포기면 금세 냉장고가 꽉 차기에 야금야금 반찬으로만 먹기에도 부족하며, 그렇게 늘 귀한 게 익은 김치다 보니 찌개나 전이나 볶음은 거의 구경할 수 없는 것이 내 눈물겨운 현실이다.
 
 오징어 또한 귀한 음식이라 자주 못 먹고사는 건 마찬가지. 일단 한국 오징어만큼 맛있는 오징어가 드물기도 하거니와 좀 맛있어 보이는 오징어는 가격이 꽤 나가기에 장 보는 주부 입장에서는 이내 발길을 돌리곤 했던 눈물겨운 식재료다. 
 
 그런데 한국만 오면 종합 선물세트가 차려지니 그야말로 나의 비련한 삶의 수준이 '천상'으로 도약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뚝배기 김치찌개에 살살 녹는 겉절이, 오징어를 썰어 넣은 김치전에 시원한 오징어 무국, 젓갈 향 가득한 파김치에 오징어 젓갈 오징어 초무침....
 
 아이도 오랜만에 여러 개의 찬을 놓고 먹는 밥이 맛있었던지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물론 콩나물 멸치볶음 우엉조림 된장국 계란말이 같은 안 매운 찬 위주였지만 한국 와서 이렇게 밥상을 깨끗이 비우는 아이를 볼 때마다 어찌나 마음이 좋은지. 어릴 때부터 거의 매일 한 끼는 한식으로 먹여 키운 보람이 있었다.  
 
 "내일 점심엔 그 집서 꼬막비빔밥 먹고 저녁에는 그 집 닭강정 모레는 그 숯불 불고기집에 가자"
 "무슨 소리야 닭강정은 간식이지!"
 
 일단 '김치 결핍증'이 충분히 채워지고 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메뉴들이 늘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그렇게 꼭 먹고 싶은 거, 지난번에 못 먹고 간 거 등을 리스트에 올려놓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 챙겨 먹지 못하고 가는 게 일쑤기에 기회가 닿을 때 하나라도 더 먹고 가는 것이 남는 것이다. 그것이 한 끼를 먹더라도 맛있는 걸 먹자가 중요한 섬세한 내 미각에 대한 예의요 즐거움이기에.
 
 "저 집 오징어무침은 한 3킬로 포장해가야겠어. 충무김밥 해서 먹게"
 "그래 언니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다 싸가"
 
 이렇게 나의 고향행은 '아름다운 미식여행의 꿈'으로 가득 차올라 경쾌하게 시작되었다. 잠 한 숨 못 잔 나를 벌떡 일으켜주는 동생의 저 행복한 주문과 함께! 



* 메인사진 : 유튜브 '꼬마츄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