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ÚT MÀU TÍM 보라색 펜_ 그리고 빈노트의 저력
우리집 애기인 막내 아들을 베트남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1학년에 갓 입학한 겨우 7살 아이가
첫날부터 새벽 6시 반에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해서 오후 4시 반에 집으로 돌아왔다.
입학식 하루가 지난 그 둘째 날부터 펜촉이 뾰족한 보라색 펜으로 한 시간 이상은 족히 써야 할 것 같은 필기체 따라 쓰기 숙제를 들고 왔는데, 1학기 내내 아이는 징징 울면서 매일 그 숙제를 해가야만 했다. 한국의 초등 1학년 1학기는 유치원생들이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한 발짝 발을 디디게 하기 위해 어르고 달래는 워밍업 기간 아니던가. 그에 반해 베트남의 1학년 1학기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빡센 스타트업 체험인양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중학교, 고등학교 때 베트남어를 시작한 형들이 베트남어를 썩 잘한다. 그렇기에 베트남에서 태어난 막내에게는 조금 더 욕심이 났다. "너는 베트남에서 태어난 아이니까 베트남어도 현지인만큼 잘했으면 좋겠어"라며 등 떠밀어 초등 1학년부터 입학시킨 나 자신에게 괜히 화가 나고 있었다.
초등 1학년의 등교 시간이 6시 30분 인것을 처음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7살에게 이 시간은 꼭두새벽이였다.
하지만 아주 합리적인 시간표를 적용하고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6:30am: 스쿨버스 등원
7am: 아침식사 (주로 쌀국수 또는 죽 종류와 요거트를 준다)
1,2교시 후 20분간의 놀이 시간 (놀이터에 나가 뛰어 놀 수 있다)
4교시후 45분의 점심시간 그리고 1시간의 낮잠시간 (초등 4학년 까지 낮잠은 필수 코스다. 5학년 부터 낮잠 대신 도서관 타임을 선택할 수 있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15분간의 스낵시간 (피자, 케익, 과일등을 주고 때로는 라면도 준다)
그리고 5,6교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 오는 시간이 4:30pm이다.
이 정도면 아주 괜찮지 않은가.
베트남의 엄마들은 대부분 워킹맘이기 때문에 학교는 저녁 6-7시까지 케어센터를 운영하기도 한다.
사악하게 느껴졌던 타임테이블에 수긍이 갈 뿐더러 아침까지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마음의 준비 없이 맞은 여러모로 놀라운 첫 학기는 그렇게 지나갔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2학기 첫 숙제는
'빈 노트 하나와 보라색 펜 하나'
"엄마, 이거 오늘 숙제야" 하며 내민 건
손바닥 만한 빈 노트 한 권과 보라색 펜 한 자루였다.
학교에서 그렸다며 알록달록 색연필로 별도 그리고 꽃도 그려서 꾸며 온 앞 장 커버에는 'sáng tạo' (창의)라는 한 단어만 달랑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글이나 시를 창작해서 써 오는 거란다. 그림도 곁들여서.
한 학기를 힘겹게 마치고 일곱 살 반에 우리 막내는 우리 집에서 필기체를 제일 잘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 베트남어가 서툰 이 애기한테 시를 써오라고?
그림일기도 아니고 시를 직접 창작하라는 것이니 참 난감했다.
한글로 일기 쓰기도 힘든 아이와 사전을 찾아가며 단어를 찾기 시작했다. 생존 베트남어를 하는 엄마의 엉터리 발음은 알아듣지도 못하겠다고 짜증 내는 아들과 끙끙대며 매일 한 두 문장 겨우 만들어 적어 보내곤 했다. 학기말쯤은 겨우 시의 한 연 정도를 써냈을까.
그만큼이라도 써낸 막내의 등을 토닥이며 특급 칭찬을 해주고 다독였지만
초등 1학년에게는 너무 과하고 이른 과제가 아닐까, 이게 맞는 교육과정인 걸까 나는 매번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다 가고 학기말 학부모 참관 수업에 갔다.
세상에...
교실 책상 위에는 아이들의 시와 글들이 주르륵 전시되어 있었다. 보라색 예쁜 필기체로 노트를 가득 매운 글과 아기자기한 그림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곱 살 만년필 맛이 깃든 시라니...
반에서 홀로 외국인인 우리 아들보다 다들 더 잘하기야 하겠지란 생각은 물론 했었지만
내가 혹시 5학년 교실에 잘못 들어왔나 교실 표지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초등학교 1학년의 숙제로 빈 노트와 펜을 하나 내어주는 베트남.
저 깊은 곳에서 가슴을 쿵 하고 울리는 소리는
감동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베트남 민족이 7살부터 다 이렇게 교육을 받아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던가.
베트남 교육 수준에 은근한 의구심이 많았지만
현지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현지어를 자산으로 남겨주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너무 큰 모험을 하는 건 아닐까
늘 자책하고 불안했었다 나는.
하지만 그날 내 안에는,
보라색 만년필을 손에 쥔 베트남인들의 저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겠다는 묵직한 울림이 일었다.
몇 년 전 큰 아이가 해외 거주자 특례 혜택을 버리고
베트남 국립 경제대 진학을 선택했을 때 주위의 엄마들이 얼마나 어이없는 시선을 내게 보내며 험담들을 했는지 모른다. 애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 나며 어떤 마음으로 애를 베트남 대학에 보내는 거냐고 타박했다. 특례 혜택으로 인서울 대학을 그리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아까운 걸 포기한 우리는 한마디로 미친 사람들이었다. 당시 누군가는 한국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가 KTX 입석칸이라도 타고 가야지 느릿느릿 기어가는 낡은 무궁화호를 타고 뒤쳐져 가면 안 되는 거라고 베트남 교육 현실을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무궁화호에 비유한 사람도 있었다. 사실 나 역시 베트남 학교에 가면 은연중 사회주의 사상 교육을 받는 건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한국보다 후진국이란 개념 때문에 베트남 학교로 아들을 진학시키는 것이 마음 한 켠 졸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국 교환학생이 많은 하노이 외국어대 대신 일부러 한국인이 딱 한 명 있는 국립 경제 대학을 선택한 아들의 포부는 통했고, 삼성을 따라 베트남 무역시장으로 진출하기 원하는 회사들이 많은 요즘 영어와 베트남어가 능통하고 베트남 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 자라난 큰 아들은 어느 회사 면접을 가던 러브콜 0순위다. 둘째는 베트남 비교 문학 박사님과 협력하여 한베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두 편의 베트남어 논문 작업에 공동저자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런 형들이 있기에 나는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첫 아이를 보내던 때보다 지금은 한인 자녀들의 베트남 학교 진학률이 높아지고 있다.
어느덧 7학년이 된 막내. 매년 눈에 띄게 성장하는 학교의 모습은 그 발전의 속도와 규모가 확실히 체감되고 있고, 열정과 순수를 갖춘 교사들의 모습은 교권이 무너지기 전의 한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한 번의 이사를 하고 엄청난 제동력을 가지고 꾸준히 발전하는 현재 아이의 학교는 이제 어지간한 한국의 학교와 비교 못할 수준의 시설과 커리큘럼을 갖추어 가고 있다. 한국 성장 모델의 닮은꼴이라 하는 개발도상국 베트남 국가의 미니어처가 학교의 발전에서도 그대로 담기고 있다.
우리 막내가 밖에서 베트남어를 하는 상황이 오면 베트남 사람들이 깜짝 놀라 다시 쳐다보며
부모님 중 한 분이 베트남 분이냐는 질문을 한다.
하하하.
엄마는 한국말 잘하는 베트남 사람이 되었고,
아들은 난데없이 부모님이 베트남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자의로 타의로 점점 베트남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걸 맞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세 아들 모두 해외에서 태어나 우리 집엔 국산이 없다고 농담하곤 한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아니지만 한국말 잘하는 코리안은 분명하고 그러나 마인드는 또 한국인 같지만은 않은 국제인들로 자라나고 있다. 외국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얻는 가장 큰 이점은 아이들의 시야가 열려있고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여러 나라의 관점을 수용하는 넓은 사고관을 갖추며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세상으로 나아간다 해도 두려움이 없이 시도해 볼 용기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삶을 나는 매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