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Sep 20. 2019

최초의 기억

비장애 형제 '무영'의 이야기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우리 오빠는 장애 진단을 받았다. 오빠의 장애에 대해 내가 인지한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점은 네 살 무렵이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베란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오빠는 거실 소파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는 바닥에 앉아 소파 쪽으로 등을 기대고 동화책을 보고 있었다. 곤히 자던 오빠는 갑자기 경기 증세를 보였다. 어린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술을 꽉 깨물어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오빠가 몸을 뒤틀며 큰 소리를 내자 엄마는 사색이 되어 거실로 달려왔고 나는 구석에 숨어 앉아서 벌벌 떨었다. 그냥 그 상황이 무섭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 자던 오빠가 괴물이 된 것만 같았다. 


엄마는 오빠를 한 차례 진정시키고 약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나는 오빠의 상태를 살피러 조심스럽게 오빠 옆으로 다가갔다. 오빠의 눈에는 흰자만 가득했고, 얼굴과 몸을 계속 떨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엄마는 물과 경기 약을 챙겨 다시 거실로 왔다. 오빠의 경기 증세로 엄마도 혼이 나갔는지 들고 온 경기 약을 오빠가 아닌 나에게 먹였고,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약을 먹었다. 오빠가 다시 진정된 상태로 잠이 들자 엄마는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오빠 약을 먹은 것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실을 알게 되면 엄마에게 혼이 날까 무서웠다. 가장 무서웠던 건 나도 오빠처럼 괴물로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구석에서 계속 엄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는 저물어 있었고, 나는 거실 한 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주변에서 뭔가 큰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오빠는 또다시 경기를 하고 엄마는 넋이 나간 채로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를 따라 주저앉아서 울며 엄마에게 내가 오빠 약을 먹었다는 것을 말하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엄마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오빠에게 약을 가져와 먹였다. 엄마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왜 그 이야기를 이제야 하느냐고 화를 냈다. 오빠가 힘없이 경기를 하는 것도, 엄마가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내가 약을 먹은 것도 다 무서웠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겁이 났다. 모든 일들이 마치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이 날의 기억은 계속 나를 따라왔다. 내가 오빠를 돌보지 않고 책을 봤기 때문에 오빠가 경기를 한 것이 아닐까. 오빠가 이상 증세를 보일 때 엄마에게 바로 말했더라면, 엄마가 나에게 약을 먹일 때 이야기를 했더라면, 약을 먹고 나서도 엄마에게 바로 이야기를 했더라면 오빠가 괜찮았을까. 내가 오빠 약을 대신 먹었기 때문에 나도 오빠처럼 경기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없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어쩌면 오빠가 장애를 갖게 된 게 나 때문은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오빠가 아픈 것은 나 때문이라는 생각은 점점 확신이 되었고, 계속해서 그 기억들로 나 자신을 옥죄고 탓했다.





오빠가 장애를 가진 것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늘 미안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도 오빠가 평생 경기 약을 달고 사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엄마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엄마가 되려 내 탓을 하게 될까 여전히 무서웠다. 점차 커가면서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 잘못이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공존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그때 너무 어렸잖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하던 중 그 날의 기억을 다시 하게 되었고, 내가 가진 두려움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담임선생님께서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셨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사실 내가 태어나던 해 오빠가 장애 진단을 받았던 것도, 그 날 오빠가 경기를 했던 것도, 엄마가 주는 약을 받아먹었던 것도, 엄마가 힘들어하는 것도 결코 내 잘못이 아니다. 오빠가 경기를 하던 그 여름날, 나는 너무 어렸고 그 누구도 나를 챙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챙겨야 했고 오빠를 돌볼 수도 없었다. 오빠에게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네 살이었던 내가 오빠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진 않는다. 물론 스물 세 살인 지금의 나에게도 그런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무서웠다. 그래서 모든 일이 나 때문이라고 답을 내리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돌봄 받지 못했고 무기력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네 살의 나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오빠에게 장애가 있고, 오빠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돌봄 받지 못했고, 돌보아 달라고 말하지 못했던 네 살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후로 나는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밤새 열이 39도로 펄펄 끓어도 아프다는 말 한 번 못 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또 힘들까 봐. 항상 내 걱정에 나는 없었던 것 같다.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해서 눈치도 많이 보고, 나를 챙기지 못했고, 내 인생에서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도 스스로를 챙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여름날의 기억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일이 나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날은 단순히 운이 안 좋았던 것이 아닐까.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오빠는 경기를 했을 거고, 엄마는 사색이 되어 달려왔을 것이다. 그 날 엄마의 눈에 내가 없던 것은 슬프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내 잘못은 없다. 이제는 죄책감 가득했던 그 날의 나를 나 스스로 용서해주고 싶다.





written by 무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