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슨한 빌리지 Jan 21. 2018

7.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을 읽고

*느빌의 책방에서는 "시스템-개인"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시대의 소음>은 앞으로 이어질 "예술" 3부작 중 첫 텍스트입니다.




1. 들어가며


  느빌에서 다룬 지난 주제는 개인과 시스템, 시스템 속의 개인과 개인,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개인 등, '시스템-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게 선정된 마지막 작품인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통해 다뤘던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 중 하나는 빌리라는 천재와 그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한 명의 천재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으며,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다른 무용가들을 뒤로 하고 단 한 명의 빌리만이 주인공의 자리에서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소위 '천재' 예술가는 여러명일 수 없다. 경쟁, 명예, 자본주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만 같은 '예술'이라는 분야야말로 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가장 치열한 공간인 것이다.


  이렇게 다음 이야기는 '예술'로 이어진다. 


  '예술'의 첫 작품은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은 러시아 소비에트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의 인생과 함께 예술에 대한 고민을 담은 소설이다. 한 가지 발제자의 변을 하자면 상대적으로 친숙한 문학이나 미술보다는 음악가와 관련된 책을 읽고 싶었으나, 이것이 독이 된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과 음악 작품들이 생소한 이름이었기에, 소설 속 맥락을 따라가는 것과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쇼스타코비치가 예술 활동을 하며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이데올로기의 부름과 그로 인한 고뇌, 그 속에서 예술가와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볼 수 있었다.

  


2. 시대가 바뀌어도 돌아오는 것


  <시대의 소음>은 크게 세 가지 파트로 나뉘어 있다. ‘층계참에서’, ‘비행기에서’, ‘차 안에서’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파트는 각각 1936년, 48년, 60년에 쇼스타코비치에게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1936년 층계참은 매일 밤 쇼스타코비치가 잡혀가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짐을 싸서 침대 대신 밤을 지새던 공간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 불순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의견이 공론화되고, 주변의 음악가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상황에서 자신 또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보여준다. 1948년 비행기 안은 쇼스타코비치가 강요에 못 이겨 미국을 다녀오는 공간이다. 그는 미국에서 소비에트가 얼마나 좋은 사회이며, 그 속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인민들을 위해 작곡을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야했고 반면에 미국인들은 쇼스타코비치의 본심을 캐냄으로써 자기들의 사상이 옳음을 증명하려 한다. 마지막 1960년 차 안은 스탈린의 죽음 이후의 쇼스타코비치를 보여준다. 개인숭배 시절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정치권은 여전히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에게 러시아 연방 작곡가 조합 의장직을 제안하며 입당할 것을 권유한다.


  이처럼 1936년, 48년, 60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쇼스타코비치가 12년의 주기의 윤년동안 겪어야했던 최악의 시기를 보여준다. 매번의 최악의 시기는 더 이상 최악일 수 없을 것 같지만 또 다시 최악의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더라도,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계속해서 쇼스타코비치에게 그들의 요구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고 활동들을 해주길 강요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띄고 있을 뿐,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예술가도 한 명의 사람이다


  소설 중간 중간에는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어릴 적 첫사랑 타냐에 대한 회상, 부인 니타와 아이들과의 이야기, 이후 실패한 두 번째 결혼과 마지막 결혼 등이다. 이처럼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들과 함께 그의 성격이 그려지는데 좀 소심하고 내성적이지만 가족과 가정을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그의 개인적인 삶과 성격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결국 역사 속의 예술가들도 그저 평범한 한 개인일 뿐임을 느끼게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의 국가정책을 겉으로는 반대하지 않고 수용하였으며 이를 외부에 선전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체제의 요구에 순응한 예술가, 혹은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 점차 그의 작품 세계로부터 드러나는 내면, 주변인들의 증언, 기록들이 함께 연구되면서 그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가 풀렸다.  물론 이 소설속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현실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함께 살펴보았을 때, 비로소 한 인간이 막대한 힘으로부터 느꼈을 공포와 그 속에서도 나름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이 정치 또는 기득권 등의 앞잡이와 같은 행보를 보였던 것은 이미 아주 흔한 이야기이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논란이며, 세계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직접 겪어 보지 못한 후대의 사람이 그 개인들을 겉으로 드러나는 행적으로만 판단하고 욕하는 것은 사실 그 시대 또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쇼스타코비치는 미국에서 내가 당신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사실 그의 목숨을 책임져줄 수 없는 이상 그런 비난은 쓸모 없는 말일 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4. 너무 오래 살아남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은 대부분 험난한 삶을 살아왔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인정받지 못한 채 가난한 삶을 살아오다가 죽음을 맞이하거나, 엄청난 인정을 받아오다가 한 순간 몰락하여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기도 한다. 또는 아주 적은 작품만 남기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예술가’라고 하면 자연스레 이와 같은 비참한 삶, 가난을 떠올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극이 예술가들을 더욱 특별하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도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표현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시대가 죽음이 많았던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과 숙청 등 죽음이 삶과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으며, 특히 예술가 또는 지식인들은 죽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괴로운 시대였다. 때문에 그는 이미 죽은 이들을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2년에 이르러서 그는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겠거니 하였지만 그에게 찾아온 악운은 계속 사는 것이었다. 사실 그 이전의 어떤 윤년의 악운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악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그 살아있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들어야 했고, 기억해야 했고, 술을 마셔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살아남은 자신에 대해 자기합리화와 동시에 자기혐오를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 또는 발제자가 이 소설을 통해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은 예술가가 시대의 소음 속에서 어떠한 스텐스를 유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2017년 현대 사회에서는 독재자의 등장처럼 쇼스타코비치가 겪었을 하나의 강력한 체제 밑에서 살아가게 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의 체제가 아니라 수많은 다른 소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사실 여부가 명확히 드러나기 전에도 기사화가 되고 그 기사에는 수많은 악플이 달린다. 개인적인 SNS에조차 원하는 것을 마음껏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다.


  이런 과정에서 예술가는 자기 검열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랑받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불태우듯이 짧고 굵게 명작을 남기고 단명하기도 힘든 시대가 되었다. 현대의 예술가들이 오래오래 살아남으며 원하는 예술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쇼스타코비치가 했던 것과 어느 정도는 비슷한, 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과연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6-1 <빌리 엘리어트> 뒷담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