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중구 남창동 닭진미강원집
한반도의 육식문화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왕조는 가축의 살생을 막기 위해 육식 금지령을 내렸으나, "금단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일본 정벌을 위해 부마국이었던 고려에 농우(農牛) 수천두를 요구하게 된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 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몽고인들의 능숙한 도축법과 고기 요리법을 배우게 되니 오히려 온 백성이 소고기 맛에 매료되었다.
그 결과 식육에 의한 농우의 감소는 농업 국가였던 조선시대의 근간을 뒤흔들었고, 조선 초 왕들은 우금령( 牛禁令)으로 소를 보호해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백성들에게 있어 먹기 가장 만만했던 가축은 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와 돼지는 인간과 먹을 것을 공유하지만, 산과 들의 벌레와 씨앗을 먹는 닭은 인간과 먹이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 데다 신선한 계란을 제공해주며, 짧은 기간 동안 크게 성장하니 식용가축으로써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튀김이라는 조리법이 없던 시대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조리 방식은 결국 굽거나, 찌거나, 끓이거나 세 가지로 압축된다. 그중 물을 부어 끓여 먹는 방식은 가장 간편하면서도 적은 양의 고기로 다수가 즐길 수 있으니 민간에서 가장 애용하던 조리법이었다.
복달임 음식으로 가장 사랑받는 삼계탕의 시작은 백숙이다. 인삼과 함께 끓인 삼계탕은 우리 시대 만들어진 음식인 데다 고가의 보양 식품인 삼(蔘)은 서민 음식 재료로 사용하기에는 장벽이 너무 높다. 백숙(白熟)은 고기나 생선 따위를 양념하지 않고 푹 삶아 익혀낸 음식이라는 의미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권력에 가까울수록 미식(美食)을 추구한다는 것은 고금 불변의 진리이다. 풍미를 살리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각기 다른 식감과 맛을 내는 여러 식재료를 넣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만 해도 저장과 보관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민간 백성들의 정지(부엌)에까지 맛을 내는 향신료가 널리 보급되진 않았을테니 결국 별다른 재료 없이 닭을 넣고 푹 고아낸 <닭곰탕>은 "서민이 만들어낸, 서민이 먹기 위한 음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서민들이 즐겨먹던 닭백숙>은 조선 후기 들어 닭을 중탕하여 진하게 졸여낸 계고(鷄膏)라는 요리가 되어 <왕실의 약선 음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최장수 왕인 영조는 무려 83세까지 살며 큰 병을 앓지도 않았고, 조선 왕들의 고질적인 유전병인 종기나 당뇨도 없었지만, 소화 장애로 크게 고생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소화 장애를 고치기 위해 <계고>를 즐겨 먹었는데,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비허증(지라(脾)가 허하여 먹은 것이 소화되지 않아 체력이 저하되는 증상)에 계고의 진액이 효과가 있다고 소개되었다.
돈은 흘러넘치고, 먹을 것 역시 풍족한 시대라 그런지 요즘은 닭곰탕집보다는 삼계탕집을 만나기가 훨씬 쉬워졌다. 특기할만한 공통점은 서울 3대 닭곰탕집이라 불리는 식당 모두 서민들의 생활 중심지였던 남대문과 을지로 인근에 자리했으며 부유하게 살지 못했던 시대 개업한 노포라는 것이다.
이 중 방문한 곳은 남대문 시장에서 1962년 개업한 <닭진미강원집>이다. 본디 강원집이라는 상호로 영업을 하다가 닭진미집으로 변경하였는데, 단골들의 팬덤이 워낙 크다 보니 옛 상호까지 뒤범벅이 되어 닭진미강원집으로 불린다.
식당 입구에는 할머님께서 한소끔 식힌 닭을 손으로 잘게 찢고 계신데,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음식은 아직 입에 대지도 않았건만 맛있다는 평가가 절로 내려지게 된다.
양은냄비 한가득 닭고기가 담겨 나오는 닭곰탕도 매력 있지만, 반주 한잔 겸한 자리라면 고기 백반을 추천한다. 국물과 닭고기가 따로 나오는데 심심하고 깔끔한 육수도 일품이지만 직접 손으로 잘게 찢은 쫄깃한 식감의 닭고기는 식사로도, 술안주로도 별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