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을 잡기 위한 글쓰기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기 전에 잠깐의 텅빈 순간을 가진다.
밤에 잠들기 전에 아무 것도 하지않고 멍한 시간을 보낸다.
아무런 걱정도 의도된 계획도 하지 않고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있는 이 순간이 대단히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다.
하루의 찌꺼기가 비워짐으로써 그 안에 다시 새로운 창조의 샘물이 솟아나는 것 같다. 이런 순간의 틈을 더 자주 더 길게 가져야한다는 생각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락카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나는 꼭 해야할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특별히 할 말이 없는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실 더 속마음은 '안녕하세요' 인사도 안하고 싶다. 아침을 대하는 내 마음의 활기와 기쁨이 있다면 그대로 전달될것이기 때문이다. 아침의 락카 표정은 침묵의 언어에 대한 좋은 관찰의 공간이 된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아침 인사와 형식적인 안부들, 굳이 안해도 될 말들이 오가는 장면들 속에서 심리학자 사티어가 한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서 꼭 필요한 말이 별로 없다'는.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그 중에서도 유독 말수가 많은 언니가 있는데 이 언니는 했던 말을 두번씩 복창을 하듯이 하고 쉼없이 말을 한다. 나이가 더 어린 사람들은 그 언니가 웃으면서 이런 저런 말을 계속하니까 그 언니는 인정스럽고 편하고 좋다고 말한다. 나이가 더 많은 언니들은 말이 너무 많다고 뒤에서 혹은 앞에서도 뭐라하기도 한다.
한번은 나에게 버섯 우린 물이 몸에 좋아서 먹고 있는데 내가 마실 물을 만들어 두었으니까 꼭 마시라는 말을 열번도 넘게 한 적이 있었다. 몸에 좋은 물을 주니 고마워해야할 일인데도 그 말의 피로감이 버섯물의 약효를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결정적인 그 언니의 진술은 자기가 계속 말을 하는 것은 말을 안하고 있을 때 어색하기 때문이란다. 바로 이 지점이 락카 안에서 불필요한 말들이 오가는 현상의 병리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심리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고요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인이 아닌 것이다. 조용한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자체가 이미 오류다.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가 보아야 한다. 고요한 자연의 상태로 있지 못하고 그 고요함을 불필요한 언어의 소음으로 깨뜨려버려야 상대방과 친밀감을 느끼는 병리가 어디서 왔는지 각자 자신의 마음을 보고 고요해져야한다.
이 락카의 아침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말이 너무 없다. 말을 너무 안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한다'는 등의 시기어린 충고를 받기도 했다. 나이와 경력이 많은 선배들의 조언은 더 민감하게 가려서 듣고 행동해야한다. 직장에서 직업적 스키마가 더 많다고 해서 인간적인 충고 까지 할 만한 입장이 못된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되는 충고를 하는 것이다. 나는 계속 내 방식을 고수했다. 아침 미팅장에서도 사람들은 스캐쥴 표를 보면서 불안을 나눌 때 말없이 마음을 보는 시간을 가진다. 나도 그런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방어를 견디면서 내 방식을 지키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병리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9개월이 지난 지금은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나에게는 불필요한 말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나는 나의 힘이 전이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 무탄트 메세지에서 참사람 부족에게 있어서 말이 필요할 때는 기도, 노래, 치료 이 세 가지 뿐이라고 한다. 그 외에는 모두 텔레파시 처럼 마음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는 너무나 놀랐다. 그 맑은 아름다움에.
거짓이 없는 사람, 자연인은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거짓에 억압에 오염되어 웃으면서 아무 말이나 하면서 자신과 남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병들게 한다.
'말하라. 웃으라.' 끊임없이 양가감정을 교육시키고 그것이 옳은 것인듯 애써 노력한다.
말하지 않고 웃지 않아야 한다. 필요없을 때는. 그래야 꼭 필요할 때 정확하게 말할 수 있고 기쁠 때 제대로 웃을 수 있다. 언제 말이 필요한지 언제 웃음이 필요한지 조차 모르게된 분열의 시대. 자연인이 그립다.
-갈등없이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글을 쓴 일곱번 째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