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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Apr 17. 2024

시외할머니의 부고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마음속에 남는 짙은 후회

시외할머니께서 작년 겨울부터 아프셨다. 그 와중에 크게 넘어지기까지 하셔서 고관절에 금이갔다고 들었다. 이번에 만약 못 일어나시면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의사가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병원에 입원하는 걸 거부하셨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자식 넷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할머니 뜻에 따르자고 했다. 아프신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자가 호흡이 안정적이지 않아 산소 호흡기가 필요했고 거동을 못하셔서 자식들이 그야말로 똥오줌까지 다 받아내야 했다. 응급 상황이 생기면 바로 병원으로 모셔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 옆에서 새우잠을 자며 지켜보고 챙겨드렸다. 그렇게 서울 사는 자식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강릉을 왔다 갔다 하며 할머니를 보필했다. 다들 퇴직한 나이였고 마지막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의견 합치가 되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며느리 입장에서도 그 지극정성이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힘드신 시어머니를 챙겨드리고 위로해 드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감정 표현이 크게 없는 남편도 외할머니에 대해서만큼은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손주들 하나하나 다 정성스레 예뻐하던 외할머니였단다. 부모님이 여행 가셨을 때 대신 돌봐주신 적도 많아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기억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결혼하고 나서 두어 번 뵙고 그 뒤로 쭉 뵙지 못했다. 매번 뵐 때마다 '우리 손주며느리'하면서 두 손 꼭 잡아주셨던 게 마음에 남는다. 이번엔 꼭 강릉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보, 우리 경민이 왕할머니 뵈러 어머님 강릉 계실 때 꼭 한번 다녀오자."

"응 그래야지."

시어머니 계실 때 할머니 뵈러 가려고 시간을 맞추다가, 한 번은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가고 또 한 번은 누군가 아파서 못 가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면역력이 약하시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절대 만나면 안 된다고 해서 두 번째 못 가게 되었을 때는 많이 아쉬웠다. 그러고 나서 안부를 여쭤보니, 많이 좋아지셨다고 한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작년 겨울만 해도 오늘내일하고 계셨었는데.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식들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기력을 회복하셨다. 뼈도 금세 다 붙고, 걷는 것도 전처럼 걸으시고, 진지도 잘 드시고, 심지어 전에 다니시던 노치원도 다시 가기 시작하셨다고 들었다. 시어머니께서도 전처럼 딱 붙어서 긴장하며 보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다. 이제 다들 한시름 놓았다.

"와 정말 다행이다. 이제 백 살 넘어서까지 건강하게 사시면 좋겠다."

"할머니도 대단하신데, 어머니랑 자식분들이 진짜 너무 대단하다. 자식들이 살린 거지."

우리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강릉으로 찾아뵙기로 했던 지난겨울의 다짐을 잊었다. 이제 할머니 좋아지셨으니 따뜻해지면 한번 찾아뵙지 뭐. 마음이 날개 단 듯 가벼워졌다. 시간이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머니께 생각날 때마다 할머니의 안부를 여쭈었지만, 그때마다 좋아지셨다는 말이 계속 돌아왔다. 이제 점점 좋아지실 일만 남았구나. 지난주까지만 해도 그랬다.


퇴근하고 집에 온 남편은 언제나 종달새처럼 그날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말해준다. 그런데 며칠 전, 종달새가 무거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면서 엄마랑 통화했는데, 외할머니가 갑자기 칼륨 수치가 높아지셔서 중환자실에 계신대."

"뭐라고? 갑자기? 그걸 왜 이제 말해?"

"나도 방금 들은 거야. 엄마가 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라고 하네. 근데 의지가 강하셔서 이번에도 이겨내시지 않을까? “

"그러면 좋겠는데. 위독하신 거면 강릉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어차피 가도 면회가 안될 수 있대. 일단 그냥 있으래."

그 시간이 밤 10시. 그때 가도 뭘 어쩌지 못하겠다 싶어서 내일 아침에 상황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다음날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벨이 울리길래 설마 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아침에 우리는 시외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평소에 못 찾아뵌 건 그렇다 쳐도 분명 시간이 있었다.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우물쭈물하다 가버린 시간이 너무 야속하고 아깝고 한스럽다. 지난 시간들까지는 어쩌지 못한다고 해도 어제 무리해서라도 가볼걸 하는 후회. 이것조차 이미 늦은 후회다. 후회만이 마음을 한가득 채운다.




그렇게 가족의 세 번째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앞선 두 번의 장례가 문득 떠오른다. 20년 전 나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번, 10년 전 남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외할아버지는 오래 앓다 돌아가셨다. 임종인 것 같은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오죽하면 외할머니께서 외할아버지의 진짜 임종이 가까워오던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얼른 눈을 감으시요. 자식들 성가시게 하지 말고. 이번에는 딱 감고 절대 뜨지 말어. 뭔 미련이 남는다고 자꾸만 눈을 뜨고 있어. 얼른 가요, 이제."

자꾸만 뜨려는 외할아버지의 눈을 외할머니는 손으로 억지로 감기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 얘기를 깔깔 웃으면서 했지만, 여러 가지 감정이 묻어있다는 걸 안다. 장례절차 중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고인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나 편안해 보이셔서 슬픔과는 별개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할머니께서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평소에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그렇게 되셨다. 하필이면 시부모님이 남미에 여행 가셨을 때였다. 시부모님을 대신해 일단은 나와 남편이 그 자리를 지켰다.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표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셨지만 실패했다. 오지라 비행기를 몇 번은 타야 하는데, 가장 빠른 비행기표로 오는 게 일주일 뒤였다. 결국 시부모님은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셨다. 한동안 멍했던 아버님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몇 달간 말을 잃은 듯 거의 말씀도 없으셨다. 자책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의 회한이지 않았을까.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 함께 사는 시어머니도 많이 힘들어하셨었다. 아무리 이성적인 아버님이라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밀려오는 감정은 어찌하실 수 없었을 것 같다.




돌아가신 두 분에 대한 기억은 이제 희미하다. 희미한 기억 저편엔 그리움의 시선들만이 남아 그 흔적으로 하여금 가끔 그분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시외할머니의 장례 이후에도 그 시선들은 한동안 계속 머물러 있겠지. 그 순간을 이미 후회로 물들인 나는 앞으로의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만큼일까. 소중한 사람들을 더 소중히 대하고 그들을 더 많이 보고 많이 웃어야겠다.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니 생각함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바로 행하는 반응속도를 장착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세상에 준비된 죽음은 없으니까. 정말이지 이번 후회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만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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