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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Sep 29. 2015

#04 체체 파리와 마사이 이야기

초지가 번성하고 있는 마사이 마라. 그러나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사이 마라'란 이름이 무색하다. 이곳엔 마사이가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오키엑(Okiek)이라 불리는 사냥-채집을 주로 하는 부족만이 마라를 지키고 있었다. 마라 평원의 식생도 지금과는 달리 아카시아 군락과 덤불 숲이 곳곳에서 번성 중이고 그 곳에는 체체 파리(tsetse fly)라는 놈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트리파노소마에 감염된 탄자니아의 소들 (source: Petr Pavlicek/IAEA)

문제는 이 체체 파리가 트리파노소마증(trypanosomiasis)이라는 질병을 옮기는 매개자(vector)라는 것.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가장 힘겹게 싸웠던 질병이 바로 이 트리파노소마증이다. 사람에게 걸리면 '아프리카 수면병(sleeping sickness)'이라고 하고 동물에게 걸리면 '나가나(nagana)' 병이라고 부른다. 감염되면 처음엔 두통에 시달리다가 몇 년이 지나면 끝없는 졸음과 함께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병이다. 슈바이처 박사는 의료선교 일기 '원시림의 가장자리에서 (On the edge of primeval forest)'라는 책에서 트리파노소마증이 휩쓸고 간 지역은 인구가 1/3 또는 1/4로 줄었다고 적고 있으니 당시 그 위력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 수 있다.

체체벨트. 체체 파리가 기승을 부리는 지역이다.

그런데 60년대가 되면서 가축에 백신 접종이  활성화되고 화학 살충제를 이용한 대규모 체체 파리 박멸이 시작된다. 여기에 가세해 마사이족은 마라 평원 내의 체체 파리 서식지인 아카시아 군락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마라의 체체 파리 개체수는 급감하고 트리파노소마증의 발병률도 현저히 감소한다. 죽어 나가는 소의 숫자도 줄어 마사이의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위생 수준도 향상되고 유아 사망률도 감소한다.


여기까진 누가 봐도 해피엔딩인  듯. 유아 사망률의 감소, 기아로부터의 탈출. 누가 봐도 좋은 일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유아 사망률의 감소는 곧 인구증가를 의미한다. 인구(人口), 즉 사람의 입이 늘면 소의 피와 젖을 주식으로 하는 마사이에겐 소의 숫자도 같은 비율로 불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소의 숫자가 늘면 물론 더 넓은 목초지가 필요하다.

트랜스 마라 자치구의 인구밀도 추이(명/평방킬로미터) (source: Wasilwa, 2003)

인구가 늘자 더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던 마사이는 마라 평원을 넘보기 시작한다. 예부터 조상들이 유목을 하던 곳이기 때문에 원래 자기네 땅이라는 게 근거다. 물론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나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마사이는 방목이 금지된 국립보호구역 안으로 버젓이 들어와 소와 염소를 먹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야생동물의 먹이가 줄어 야생동물 개체수가 감소하고 그러면 정부의 관광수입이 줄어든다. 이곳 자치지구가 벌어 들이는 관광수입의 일부는 야생동물보호단체에게  배분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야생동물보호단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뿐만 아니다. 보마(boma)라고 부르는 마사이 부락이 점차 보호구역 쪽으로 접근하면서 코끼리나 사자와 같은 야생동물에 의한 마사이족의 재산피해도 급증한다. 피해를 입은 마사이는 야생동물에게 철저히 복수한다. 마사이는 자신들의 소를 잡아먹은 사자는 꼭 잡아 죽이는 풍습이 있다. 야생동물보호단체는 이러한 마사이족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 야생동물보호단체들은 정부에게 마사이족의 활동을 강하게 규제하고 강력한 처벌을 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마사이 마라 국립보호구역 근처의 목초지에서 마사이가 놓아먹이고 있는 염소 떼

그러나 마사이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 규정을 지킬 리 없다. 마사이의 리더였던 에드와르드 올레 엠바르노티(Edward ole Mbarnoti)가 남긴 다음과 같은 선언은 마사이가 야생동물보호 규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땅의 귀중한 유산을 보존한 것은 우리 마사이다. [...] 그러므로 호텔 경영인과 상업적 사냥꾼의 금전적 편의를 위해 우리가 우리 땅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말하지 마라. 또 우리가 동물학자(역주: 문맥상으로 동물 보호론자)들이 만든 규정에 따라서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도 말라 [...].

It is we Maasai who have preserved this priceless heritage in our land. [...] So please do not tell us that we must be pushed off our land for the financial convenience of commercial hunters and hotel-keepers. Nor tell us that we must live only by the rules and regulations of zoologists [...].


그래서 지금도 일부 야생동물보호단체 사이에서는 마사이가 큰 두통거리다.


이렇게 20세기 초에서 시작해서 여기서 끝났다면 마사이를 무심한 난봉꾼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차피 트리파노소마증 때문에 자신들이 살지도 않던 곳인데 체체 파리가 박멸되면서 살만해 지니까 이제 와서 권리를 요구하며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무단으로 침범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일부 야생동물보호단체에서 주장하는 논리도 이런 시각과 일맥 상통한다.




이제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때의 마사이 마라 식생은 20세기 초와는 또 다르다. 20세기 초에 보이던 아카시아 군락과 덤불은 별로 보이지 않고 요즘 마라의 풍경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초지가 마라 평원을 뒤덮고 있다. 아카시아 군락이나 덤불 숲에 서식하는 체체 파리도 위협적이긴 하지만 20세기 초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정도.

마라의 초원에서 톰슨 영양이 풀을 뜯고 있다.

이때 마라의 평원은 지금 보다 훨씬 많은 수의 발굽동물들이 노닐고 있다. 이들을 노리는 육식 동물들의 수도 많다. 그야말로 야생동물의 지상 낙원이다. 마사이는 이 곳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반유목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높은 유아 사망률 때문에 마사이 인구는 크게 늘지 않고, 큰 변화 없는 목가적인 전통적 생활 방식이 반복된다.


그러나 1880년대가 되자 아프리카에는 유래 없는 대재앙이 찾아온다. 이탈리아인들이 에티오피아를 식민지화하면서 인도에서 들여 온 가축이 발굽동물에 치명적인 우역(牛疫: rindefest) 바이러스를 아프리카로 옮긴 것이다. 우역에 면역력이 전혀 없던 아프리카의 가축과 야생동물은 맥을 못 춘다. 우역은 지역에 따라 80-90%의 무서운 치사율을 보이며 중앙 아프리카를 완전히  황폐화시킨다.

1896년에 촬영된 우역으로 죽은 가축 사진 (작자 미상. source: wikimedia)

그런데 우역의 창궐은 엉뚱하게도 마라에서 체체 파리가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 그런가? 누(gnu)와 같은 초식동물이 번성하던 19세기 중반엔 이들의 왕성한 먹이활동 덕분에 덤불과 아카시아가 퍼져나가지 못 하다가 우역으로 이들 초식동물들이 급격히 줄자 덤불과 아카시아 군락이 갑자기 번성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덤불과 아카시아 군락에 서식하는 체체 파리의 개체 수도 급격히 늘어난 것. 특히 마라강을 중심으로 체체 파리가 번성하기 좋은 조건이었던 마라 평원은 트리파노소마증의 기승으로 도저히 마사이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그래서 마사이는 마라를 등지고 떠났고 그 빈자리를 오키엑 부족이 메웠던 것이다. 이 틈에 영국 식민지배자들은 마라 평원을 자기들의 사냥터, 휴양지로 만들었다.


케냐를 차지한 영국인들은 1913년 마사이를 나이로비 북부에서 나록 자치구로 몰아냈다. 그러다 1948년 영국 식민정부는 마라 평원의 일부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사실상 식민지배자들을 위한 사냥터로 만든다. 그러다 독립 이후 1974년 케냐 정부가 이 지역을 국립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보호구내 마사이의 거주와 방목을 금지하게 된다.


반유목민 생활을 해 땅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며 정치력 또한 약했던 마사이는 영국의 식민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터전을 내주고 야생동물과 야생동물보호단체, 관광객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터전을 내줘야 했던 셈이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사이와 야생동물보호단체 간의 갈등을 흑백 논리로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리저리 내쫓기며 힘들게 지난 세기를 견뎌낸 마사이에게도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지키며 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고 야생동물보호단체와 정부도 야생동물의 지상낙원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다. 참 쉽지 않은 문제다.


최근엔 마사이 중 일부가 외국인용 호텔이나 캠프에서 일자리를 찾아 수익을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자치구에서도 관광수익 중 일부를 주변 마사이 리더들에게 배분한다. 그러나 이 불안한 동거 내면에는 아직도 마사이와 환경단체, 정부와의 첨예한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인용문헌

Wasilwa, N. S., 2003. Human-elephant conflict in Transmara district, Kenya. In: Wildlife and People: Conflict and Conservation in Masai Mara, Kenya. IIED Wildlife and Development Series no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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