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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ul 02. 2020

단독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유현준 교수의 <어디에 살 것인가>

<책읽아웃>에 대한 청취담을 쓰게 되면 가장 첫 글로 어떤 방송편에 대해 다룰까 고민해봤다. 진행자인 김하나작가님 본인이 쓴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처음으로 찾아봤던 제현주 작가님의 출연 방송? 혹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인 최은영 작가님이나 백수린 작가님이 나온 에피소드를 첫 주제로 골라볼까?

그러나 그 무엇도 아닌 유현준 교수님의 방송편을 첫 글감으로 골랐다. 그 이유는 교수님의 책 <어디에 살 것인가>만큼 지금 나의 일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책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24시간 둘러쌓여 있는 지금의 내 집, 내 공간을 결정지은 책.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또 있을까.


<알쓸신잡 시즌2>의 애청자였던 나는 지금으로부터 딱 2년 전 여름, 2018년 6월에 이 책을 만났다. 그리고 그 다음해의 여름, 그리고 올해의 여름을 단독주택에서 보내고 있다. 마당에 펼쳐놓은 미니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지금 이 글을 쓴다.



나와 달리 남편은 같은 해 10월, 이 책을 인천공항 서점에서 구입해 바르샤바행 비행기에서 읽었다. 폴란드 주재원 사령장을 받은 지 일주일이 채 안된 어느 날이었고, 이제 선임주재원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낯선 나라에 가서 한 달 내로 다섯 식구가 살 집을 구해야한다는 미션이 주어져 있었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그가 서점에서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이 책의 제목과 마주쳤을 때, 지름신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80년대에 태어난 나와 남편은 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랐다. 남편은 올림픽은 커녕 아시아게임도 열리기 이전의 잠실 종합운동장 부지 옆에 있는 우성아파트에서 태어났고, 나는 태어날 때는 강서구였으나 나중에 양천구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둘 다 20층이 넘는 높이에 성냥갑같은 모양. 전형적인 80년대의 표준아파트였다. 어린 시절 몇 번의 이사를 했지만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옮겨갔고, 우리의 신혼집도 아파트였다. 큰 애가 3살때 구입한 우리의 첫 집도 아파트였고,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도 기숙사 아파트에 살았다.

그런데 9시간의 비행 동안 책을 다 읽고 난 남편이 전화를 걸어 내게 말했다.

"우리 이번에는 단독 주택에서 살아볼까?"


아파트에는 마당이나 골목길이 없다. 이들은 마당 대신 거실에서 TV를 보고, 골목길 대신 복도에서 시간을 보낸다. 학교에 가면 교실에서만 지내고, 방과 후에는 상가에 있는 학원에 보내진다. 이동할 때도 봉고차에 실려 이동한다. 이들의 생활을 보면 24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실내 공간에서 보낸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삶의 공간에는 자연이 없다. 하늘을 볼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이다. "지식은 책에서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자연을 만날 기회가 없다. 지혜를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삶에 필요한 것은 자연이다. p. 33


 당연히 이번에도 아파트를 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남편의 이 뜬금없는 발언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남편은 사실 비행기에서 이 책을 읽었다고 고백했다. 이미 넉 달 전에 먼저 책을 읽어봤던 나는 그 말을 듣자마다 빵 터져서, "푸핫, 그랬구나. 그래, 그러자. 그 책을 읽어봤으면 단독주택에서 살아야지. 책 전체가 통째로 주택에서 살아야한다고 부르짖는 책인데."하고 말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이렇게 폴란드에서 살게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 좋기야 좋겠지, 하고 아주 막연히 생각했었던 감상이 그 순간 아주 또렷해져서 실감나는 현실의 사건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 거야.


그리고 남편은 남은 한 달 동안 스물여덟곳의 집을 보러 다녔다. 처음부터 아파트를 희망했으면 아마 대부분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 중에서 위치나, 층이나, 가격 정도만 살펴보며 후보군을 줄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독주택으로 마음을 정하고 집을 알아보니 정말 크기도 구조도 제각각인데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은 집이 단 하나도 없었다. 어떤 집은 지하에 칵테일바와 월풀, 사우나, 빔프로젝트 등 풀엔터테인먼트 시설을 갖춘 집도 있었고, 어떤 집은 마당에 바베큐시설과 농구대가 있어서 좋았으며, 또 어떤 집은 '집이 너무 커서 애들 찾기가 힘들 것 같다.'고 남편이 코멘트를 남겨놓은 집도 있었다(직접 집을 보러 다니지 않았던 나는 이제와서 이 모든 집들이 사실 너무 궁금하긴 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마당을 바라볼 수 있는 발코니가 마음에 쏙 들었던, 아이들은 '초록집'이란 애칭을 붙여준 한 단독주택에서 2년째 살고 있다.


과거 아파트와 주택에서 몇 번 번갈아 가면서 살아 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추억은 모두 주택에 있을 때의 기억뿐이다. 아파트는 내 집 같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파트 건물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수십 채의 집이 모야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아파트는 나의 감정과 연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택은 마당에서 여러 가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과하지 않은 크기의 건물이기에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p. 41


우리의 집은 서울에 있다. 30층이 넘는 높다란 아파트 건물에서 딱 중간에 위치한 우리집. 위로도, 아래도 열 세대가 넘는 가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우리집. 그리고 때가 되면, 귀임발령이 나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안다. 그런데도 이 집이, 집주인이 따로 있고 정해진 기간 동안 세를 들어 살고 있는 이 집이 오히려 더 내 집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실제로 10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잦은 이사로 3년 이상 진득하니 살아본 집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제일 오랫동안 살아보는 집은 이 집이 될 지도 모른다.

어제 마당에서 고기를 구우며 남편이 말했다.

"우리 나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지금 이 순간이 엄청 그리워지겠지?"


교수님이 팟캐스트에서 말했던 것처럼 요즘같은 세상에 대기업 회장님이 아니고서는 서울에서 단층짜리 주택에 마당딸린 집에서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아주 잠깐, 대기업 회장님처럼 살아보는 행운을 이 곳 폴란드에서 경험하고 있다. 물론 이 집을 간수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대기업회장님의 일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무거운 빨래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린다든지, 넓은 집을 청소하기 위해 드는 수고와 품은 온전히 우리 부부의 몫이다. 마당에 눈이 소복히 쌓여 차고에서 대문으로 나가는 진입로에 있는 눈을 싹 치웠는데,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 심지어는 5일 연속해서 눈이 내리던 계절의 끝없는 삽질도 순수한 우리의 노동이다. 겨울철에 난방비를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쓰리고, 지하실에 들어온 민달팽이를 처치하기 위해 남편과 나는 서로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른다. 이게 다 서민이 대기업 회장님이 살 법한 집에 살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다. 아마 아파트에 살았다면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수고를 차지하고서라도, 이 집에 살아서 다행이라고, 최고의 집을 골랐다고 느낀다.


우리 아이들은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자랄 것이다. 봄이면 사방에서 피어나는 풀꽃을 보며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여름에는 마당에서 마음꺼서 물놀이를 하며 뜨거운 햇살을 즐길 것이다.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붉게 물든 마당의 장관을 즐길 수 있을테고, 겨울이면 쌓인 눈으로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눈썰매도 타면서 모든 계절을 몸으로, 마음으로, 오감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소중한 추억들이 매일 차곡차곡 쌓여, 유년 시절에 살게 되는 이 집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사실 '어디에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치스럽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항상 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고, 그 외에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아파트가 아닌 다른 주거 형태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여건이 된다면, 하고 다른 형태의 삶을 꿈꾸기만 하고, 책에 나온 이야기는 그저 책으로만 여기며. 그러나 이 책이 없었더라면, 조금 다른 삶의 형태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걸 무시하고 그저 관성적으로 늘 살던 곳과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변화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새로운 삶의 경험을 열어주고, 집이라는 공간 덕분에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억. 그 모든 행운에 감사하며 책읽아웃의 오프닝멘트를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해본다.


"어디서 살 것인가?" 이 책의 제목은 질문형이다. 흔히 우리는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이사 갈 집을 고르는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어느 동네로 이사 가고,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몇 평짜리에 살 수 있나'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가 싫어서 여행만 가려고 한다.
어디서 살 것인가? 이 문제는 객관식이 아니다. 서술형 답을 써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정해진 정답도 없다. 우리가 써 나가는 것이 곧 답이다. 아무도 채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이 공간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가?' 자문해 보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p.372




덧1) 나는 지금 이 글을 3미터가 넘는 천장 아래에서 쓴다. 비록 천장의 전구를 갈기 위해 키 180센티미터(반올림수치입니다)의 남편이 사다리의 가장 높은 층에 올라가 팔과 다리를 동시에 부들부들 떨어야 하지만, 높은 천장이 있는 공간은 창의력을 향상시킨다는 이야기를 그때마다 되새겨 본다. 책에서도 팟캐스트에서도 낭비되는 시간, 혹은 공간이 있어야 그 빈자리에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거듭 이야기한다. 아주 좁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팟캐스트는 정말 재미있고 즐거웠는데, 높은 천장 아래에서 쓰인 내 글은 왠지 딱딱하기만 하다. 3미터가 넘는 천장 아래에서 노트북을 펼치면 좀 창의적이고 새로운 글이 잘 나와야 할텐데 이것은 나의 문제일까 공간의 문제일까. 다음에는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는 발코니로 노트북을 들고 도망가 봐야겠다.




덧2) 주거 공간 뿐만 아니라 학교건축과 도시, 공공의 공간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2018년 여름에 출간된 책이다.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더 행복해지려면 도시 전체를 내 집처럼 즐길 수 있어야(p.96) 한다고 말하지만 이제 공공의 공간은 바이러스의 위험이 잠재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팟캐스트가 방송된 지 2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공간 설계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일까, 신간이 나오면 또 출연을 부탁드린다는 방송 말미의 멘트가 콕 귀에 들어온다. 마침 지난 4월에는 유현준 교수님의 <공간이 만든 공간>이 출간되었다. 다시 한 번 게스트로 출연하셔서, 이번에는 에어컨이 있는 넓고 쾌적한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건축의 과제에 대한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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