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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Aug 06. 2018

한·일, 권력형 범죄 처단 위해 특수부 발족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vs 도쿄지검 특수부 비교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수사 대상과 영역, 역할, 수사 기법, 조직편제 면에서 일본 도쿄지방검찰청 특수부와 비슷하다. 한국 검찰이 특수부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도쿄지검 특수부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나 본땄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두 사정기관은 각각 전직 대통령이나 총리를 구속하면서 기능과 수사 영역의 유사성을 다시 확인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을, 도쿄지검 특수부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수상을 권한남용,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다만 도쿄지검 특수부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와 달리 정치검찰이라고 비난 받지 않는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1947년 발족해 정치·자본 분야 권력형 범죄를 성역 없이 수사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대한 평가는 후하지 않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독립 사정기관으로서 권력형 범죄를 징치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지에 대해서 의견이 갈린다.


조직 규모 면에서는 도쿄지검 특수부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압도한다. 25년 경력 부장검사 조직을 총괄하고 20년차 이상 부부장 검사 3명이 3개반을 지휘한다. 3개 반에는 평검사 50여명과 수사관 300여명이 일한다. 반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지휘를 받고 그 산하에 1,2,3,4부 부장검사 4명과 평검사 28명으로 구성됐다. 범죄 특성에 따라 첨단범죄수사부가 특수부와 공조 수사하거나 지원한다.

군사정권 통치수단으로 설치

도쿄지검 특수부는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뒤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설립한 은닉퇴장물자사건조사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GHQ는 1945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6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은닉퇴장물자사건조사부는 일본군이 전쟁 중 민간인에게 편취한 다이아몬드, 귀금속, 군수물자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발족했다. 은닉퇴장물자사건조사부는 자국군인을 수사했다. 은닉퇴장물자사건조사부를 일본을 통제하기 위해 GHQ가 설치한 수사기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1961년 설치된 대검찰청 중앙수사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12월 검찰청법에 중앙수사국 설치 관련 규정을 마련했다. 중앙수사국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표류하다 1961년 5월9일 대검 산하 기관으로 정식 출범했다. 당시 박정희 소장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기 일주일 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12월 신직수 중앙정보부 차장을 검찰총장 직에 임명했다. 대검 중앙수사국이 출범한 지 2년만의 일이다.


신직수 검찰총장은 대검 중앙수사국 기능을 강화했다. 당시 중앙수사국은 군사정권의 칼 역할을 맡았다. 신직수 총장은 유신정권이 국민여론에 부딪혀 위기에 직면하자 1974년 3월15일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일명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언론들은 해당 사건 연루자 47명의 얼굴과 인적사항을 신문 1면에 실었다. 유신정권이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불만에 부딪히자 통치 명분을 찾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중앙수사국은 울릉도민 47명을 고문하기도 했다. 또 다른 군사정권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중앙수사국은 1982년 4월 중앙수사부(중수부)로 확대개편한다. 중수부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의 전신 격으로 평가받는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지난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고 있다. 
권력형 범죄 단죄하는 칼로서 입지 구축

중수부가 군사정권의 하수인 역할만 수행하지는 않았다. 전두환 정권 때 장영자와 이철희 어음사기 사건을 수사해 두 피의자를 구속 기소했다. 장영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처가와 인척 관계다. 그 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 등을 구속하며 수사기관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도 권력형 범죄 수사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명박 뇌물수수·다스 비자금 횡령 사건 등 전직 대통령 2명을 구속 기소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도쿄지검 특수부 위세는 대단하다. ‘나가타초 역(도쿄지검 특수부가 있는 지오다 구의 한 지하철 역)에만 가도 전율이 느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사 역량도 탁월해 일본 최고 수사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기소한 피고인 중에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례가 없다 보니 불패신화를 자랑한다. 하이라이트는 1976년 록히드(Lockheed) 뇌물 사건이다. 미국 항공기 제조회사 록히드는 대형 제트 항공기를 유리한 조건에 일본에 팔기 위해 일본 고위 관리에게 뇌물을 줬다.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수상이 체포되고 관련자 전원을 기소하면서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도쿄지검 특수부 전성기였다. 이 사건은 오늘날 도쿄지검 특수부가 검찰의 꽃이라고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1976년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전 수상(왼쪽 두번째)를 체포하고 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1988년 일본 정경유착 스캔들 수사에 착수했다. 이른바 리크루트 사건. 이 사건 여파로 다케시다 노보루 총리와 미야자와 기이치 대장상 등 각료 3명이 사임했다. 일본 정보산업회사 리크루트가 계열회사인 리크루트 코스모스의 미공개 주식을 공개직전 당시 수상이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포함해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신타로 등 76명 정치·경제계 유력인사들에게 싸게 넘겼다. 정경계 인사들은 주식 공개 후 주가 차액만큼 부당이익을 챙겼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1989년 2월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회장을 구속했다. 사건 발생 9년 뒤인 1997년 3월에는 검찰의 끈질긴 수사 끝에 후지나미 다카오 전 관방상이 징역 3년 추징금 4270만엔으로 유죄 판결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계 내 정경유착을 끊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92년 사가와규빈 사건에서도 도쿄지검 특수부는 성역 없는 수사 기관의 면모를 다시 과시했다. 사가와규빈은 일본의 거대 운송회사로 1992년 자민당 경세회(다케시타파)의 회장인 가네마루 부총재에게 5억엔 상당의 뇌물을 제공했다. 또 정치인 10여명에게 약 21억5000만엔을 건넸다고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 여파로 일본 정치 최고 실세인 가네마루 부총재는 구속됐다. 자민당 정권은 사가와규빈·리크루트 등 잇따른 뇌물수수 사건으로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고 자민당의 55년 장기집권체제가 무너졌다.


그로부터 25년 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도 대규모 정치 스캔들을 수사했다. 정치인이 개입한 권력형 범죄에 관한한 한국은 일본에 한 세대나 후진적인 듯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2017년 12월 이명박 전 대통령 다스비자금 의혹 관련 수사에 착수해 3개월여만인 2018년 4월 검찰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관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뇌물 공여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서울중앙지검은 2017년 6월 투기자본감시센터가 이재용 부회장 등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특수부에 배당해 수사에 나선 바 있다.


정치검찰 오명 여전…중수부 시절 업보 탓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특수부는 찬사 못지않게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찬사는 비난과 함께 혼재한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적폐청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반면 표적수사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을 정권이 바뀐 뒤 구속 기소해 정치검찰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다. 중수부 시절부터 정권에 따라 수사대상을 달리는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다. 특수부가 과거부터 쌓은 업보 탓에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으로 오해 받는 면이 없지 않다.


중수부는 정권에 따라 수사대상을 달리하고 수사를 무리하게 짜 맞춘다고 비판 받았다. 이 탓에 중수부 기소 사건은 무죄 판결이 많다. 일반 사건보다 무죄율이 26.7배나 높다. 정권 입맛에 따라 표적수사하다보니 적중률이 낮아졌다는 분석이다. 이로 인해 중수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과 권력층이 연루된 대형비리 사건을 수사할 때마다 정치적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급기야 국민의 정부(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들어서자 중수부를 폐지하자는 여론이 불거졌다. 참여정부(노무현 대통령) 시절에서 중수부 폐지 목소리는 더 커졌다. 결국 박근혜 정부 들어 중수부는 폐지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4월 취임 한 달만에 중수부를 폐지했다.


도쿄지검 특수부도 2000년대 들어 위기를 맞았다. 불패신화를 이어가던 도쿄지검 특수부가 증거불충분 등으로 유죄입증에 실패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2009년 하토야마 위장 정치헌금 의혹과 2009~2010년 오자와 정치자금 스캔들이 대표 사례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2009년 10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에 대한 유령헌금, 고인헌금으로 불리는 위장헌금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일본 언론은 히토야마 총리가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사망자 이름을 정치헌금 명단에 기재했다고 보도하고 이렇게 편법으로 조달한 정치헌금은 3억5000만엔(한화 약 48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일본 검찰은 히토야마 총리에 대해 혐의불충분을 적용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히토야마 총리를 서면 조사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비서만 불구속 기소 처리하는 형태로 일단락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집권당 실세였던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에 대한 정치자금 수수의혹도 수사했다. 이른바 오자와 정치자금스캔들이다. 민주당 정치자금관리단체 리쿠잔카이가 구입한 토지(3억4000만엔)를 둘러싸고 자금 조달 과정을 둘러싼 비리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허위장부 기재승인 혐의로 오자와 이치로를 수사했다. 오자와 간사장이 정치실세만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지만 특수부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이 사건은 도쿄지검의 명성이 추락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특수부가 집권당 실세 오자와 간사장을 구속 기소하기에 부담스러워 수사를 대충 마무리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산케이(産經)신문의 검찰 출입기자 이시즈카 겐지 씨는 저서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에서 “증거가 있으면 기소하던 특수부가 시나리오를 설정해 조작하는 집단으로 변질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겐지 씨는 도쿄지검 검사들 수사역량이 떨어졌고 외부 압력 등에 맞서는 기개가 과거만 못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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