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이민자들의 역사가 살아있는 Ban Yuan 커뮤니티
방콕에 베트남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 반응은 이제 와서 생각하기 부끄럽지만 아주 단순했다. “드디어 방콕에서 진짜 베트남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가?”
방콕에서는 사실 시내 곳곳에서 베트남 음식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태국 현지화된 베트남 음식을 팔기 때문에, 모양은 비슷해도 진짜 베트남 음식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지리적으로 베트남과 가까운 태국에 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베트남 음식에 대한 고픔은 항상 채워지지 않은 채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Baan Yuan 베트남 마을에서도 진짜 베트남 음식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밥 한 끼, 그 이상으로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방콕 여행 중 들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반유안(Baan Yuan) 커뮤니티에 도착하면 먼저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하나는 작은 동네에 큰 천주교 성당이 두 개나 자리하고 있다는 것. 이는 태국 인구의 약 93%가 불교 신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도드라지는 특징이다.
둘 째로는, 이 동네가 ‘베트남 마을’이라고 불리지만 베트남어로 된 간판이나 베트남어를 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없다는 것. 여기 자리한 베트남 식당들도 태국식으로 현지화된 베트남 음식을 판매하고 있다.
위 두 가지 특징은 태국에 베트남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국에는 현재 10만 명이 넘는 베트남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이 태국에 정착하게 된 역사적인 계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제일 먼저 1700-1800년대 전반에 걸쳐 베트남 내 종교적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천주교인 이민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방콕과 그 동남쪽에 있는 도시인 찬타부리 등에 정착했다. 그 후손들의 일부는 방콕의 Baan Yuan같이 ‘베트남 마을’로 인식되는 지역에 남아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들이다. 베트남의 언어와 문화를 계승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이민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태국 사회에 흡수되어 태국식 이름과 국적을 가지고 태국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Baan Yuan은 현재 방콕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베트남 커뮤니티다.
두 번째로는 1800년대 후반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며 태국에 잠깐 체류하러 왔던 이민자들이 있었다. 그 일부와 1900년대 초반에 건너온 베트남인들이 태국에 남아 정착했다. 이들은 대부분 태국 남동부와 북동부에 정착했다. 현재 태국 내 가장 큰 베트남 이민자 커뮤니티는 방콕이 아닌 태국 북동부 (이싼) 지역에 있다.
세 번째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전역에 대한 북베트남의 지배가 강화되던 시기에 베트남을 떠나온 이민자들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 이후에 태국에 도착한 베트남인들은 대부분 태국에 정착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경유지로 거쳐갔다.
출처:
1. Country Studies – The Vietnamese
천주교 박해를 피해 방콕에 정착해온 천주교인들이 이룬 지역 공동체답게, Baan Yuan 커뮤니티는 천주교 성당과 학교를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 (St. Francis Xavier Church)과 원죄 없는 잉태 교회 (Immaculate Conception Church) 두 성당이 같은 블록 내에 약 100m 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컨벤트 여학교 (St. Francis Xavier Convent School), 세인트 가브리엘 남학교 (Saint Gabriel’s College)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는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은 1834년 태국의 라마 3세 국왕이 이 지역에서 증가하는 가톨릭 베트남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땅과 건설비용을 기부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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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an Yuan의 Soi Samsen (쏘이 삼센) 11길과 13길 사이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는 교인들을 맞이하는 아침 장이 열린다. 가장 활발한 시간대에 시장을 구경하고 싶다면 일요일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에 도착하면 된다.
성당 뒤쪽에는 베트남 식료품을 파는 노점상을 비롯해 반 꾸온(Bánh Cuốn), 반 가이(Bánh Gai) 등 베트남 길거리 음식을 판매하는 카트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성당 입구 쪽에도 노점상들이 있으니 성당을 중심으로 한 번 빙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시지와 베트남 식료품을 판매하고 있는 노점상이 눈에 띈다. 베트남계 태국인 이민 3세대인 야(Ya)씨 그리고 그녀의 하노이 출신 남편 공(Gong)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가게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라이스페이퍼 반쨩(Bánh Tráng)을 비롯해 베트남 커피, 다양한 소스, 조미료 등을 판매한다. 평소 베트남 식재료에 관심이 있다면, 분명 챙겨 올 아이템을 한 두 가지 발견할 수 있을 거다.
Ya 씨는 이제 Baan Yuan 커뮤니티에도 베트남어를 할 줄 아는 인구가 많이 남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본인을 포함해 겨우 네 가족 정도가 베트남어를 할 수 있고, 나머지 베트남계 주민들은 대부분이 따로 배우지 않아서 베트남어를 할 수 없다고 말이다.
몇 세대째 다른 나라에 정착해 살아가면서 조상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3세대인 Ya 씨는 직접 하노이에 가서 언어를 공부했을 정도로 노력한 케이스다. 그런 그녀도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가족과 있을 땐 베트남 사람, 태국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는 완벽한 태국 사람 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무리 태국식으로 현지화된 베트남 음식이라고 해도, 베트남 마을까지 와서 베트남 음식을 먹어보지 않으면 쩝쩝 박사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여기서 가장 맛있는 베트남 식당이 어딘가요?”라고 주민들에게 물어봤다.
뜻밖에 흥미로운 점을 알아냈다. Ya 씨가 운영하는 노점 바로 앞에 위치한 Orawan은 언뜻 보기에는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베트남 식당일 것 같은 포스를 풍긴다. 하지만 사실 베트남과는 연이 전혀 없는 태국인이 Baan Yuan 베트남 마을의 특수성을 노리고 차린 식당이라고 한다.
그러니 진짜 베트남 이민자의 후손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보고 싶다면 Orawan이 위치한 골목을 따라 2분 정도 더 걸어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작은 골목에 Ba Ke Naem Nueang (빠 께 냄느응) 이라는 식당이 숨어있다.
Ya 씨가 말한 이 동네에 남아있는 베트남어를 할 수 있는 네 가족에 이 식당을 운영하는 Ba Ke(께 이모)의 가족이 포함된다. 동북부 이싼 지역에서 맛볼 수 있는 베트남 음식처럼, 태국 현지화된 베트남 식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식사 시간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오후 3-4시쯤 방문했음에도 식당 안이 가족 단위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정말 저렴했고, 방콕에서 먹어본 베트남 음식 중 손에 꼽게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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