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가 뽀얗게 서울 하늘을 뒤덮어버린 아침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서기도 겁이 나 뭉기적거리다 읽은 한 편의 시가 최악의 공기에 감성마저 메말라버린 나를 울게 만들었습니다.
나를 완전히 적셔버린 그 시는 전(前) 해에 딸아이를 잃고 이번엔 아들마저 잃은 400여 년 전 여인의 애끓는 모정이 담긴 「곡자(哭子)」였지요.
곡자(哭子, 아들의 죽음에 곡하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 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키네.
어찌 이리도 처연한지! 마치 다 내려놓은 사람인 냥.
잇달아 자식을 잃고 머리를 풀어헤친 정신이 나가버린 엄마가 아니라, 단정히 머릴 빗어 올리고 무덤가에 술을 붓는 핏기 하나 없는 젊은 엄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흐느낌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복중에 또 다른 아이를 품고 있지만 모든 걸 잃고 모든 걸 소진해버린 위태로운 여인의 모습입니다. 무언가 울컥합니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 시는 우리가 잘 아는 조선시대 허초희(許楚姬, 1563~1589)의 오언고시(五言古詩)입니다. 허초희가 누구냐고요? 그녀는 바로 허균(許筠)의 누이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허난설헌(許蘭雪軒)입니다. 초희가 이름이고, 난설헌은 그녀의 호입니다. 그녀에게는 어릴 적 이름인 경번(景樊)이란 자도 있습니다. 조선의 여인들이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때 이름과 호, 자를 모두 가진 그녀의 존재는 특별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허초희라는 이름 대신 허난설헌으로만 그녀를 기억합니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요?
허초희, 그녀가 점점 궁금해집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그녀가 태어난 강릉으로 가야 합니다. 미세먼지를 뚫을 결심을 합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치르며 강원도는 서울과 한층 가까운 곳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좌우로 횡단하는 기존의 영동고속도로의 잦은 교통 정체를 완화하기 위해 2016년 광주 원주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연결되었습니다. 2017년에는 서울에서 강릉까지 KTX 열차가 개통됨으로써 1시간 30분이면 우리나라 동쪽 끝 가장 큰 도시인 강릉까지 갈 수 있습니다. 산악지역인 대관령 고개를 넘는 700리 거리를 단숨에 내달리는 현대의 기술들이 경이롭습니다. 험준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예전엔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길이 아니었기에 강릉은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고 잘 보존해온 보기 드문 고장입니다.
또한 강릉은 예로부터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널리 이름 난 곳입니다.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어서면 넘실대는 동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고려시대 안축(1282~1348)은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조선의 정철(1536~1593)은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관동팔경의 하나인 강릉의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경포호의 절경을 노래했습니다. 바로 그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포호 근처에 허초희가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터에 초당 고택과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들어선 아담한 기념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초당(草堂)은 허초희와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1517~1580)의 호입니다. 오늘날의 초당이라는 지명도 허엽의 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강릉의 향토 음식 중 하나인 초당두부는 허엽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천일염이 부족한 이 지역에서 두부의 간수를 바닷물로 맞추게 한 데서 전해진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6·25 전쟁 때 강릉 일대의 남자들이 치열한 격전지였던 동부 전선에 투입되면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생계가 막막해진 부녀자들이 두부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반 지금의 초당마을에서 두부를 만들어 파는 가구가 증가하면서 지금의 초당두부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초당 허엽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이 중 두 번째 부인 강릉 김 씨의 소생인 허봉(許篈 1551~1588), 허초희, 허균(許筠, 1569~1618) 3남매의 글재주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이에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찬국조제가시(讚國朝諸家時)>에서, “초당 가문에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 제일의 신선 재주는 경번(景樊, 허초희의 자)에 속하였네.”라고 칭송하였습니다.
허초희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문학적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열세 살 위의 오빠 하곡 허봉은 여동생의 영특함과 글재주를 아깝게 여겨 평소 친교가 있던 시인 이달에게 남동생 허균이 글과 시를 배울 때 함께 공부를 하도록 주선합니다. 그녀가 8세 때 지은 광한전 백옥루(廣寒殿 白玉樓)의 상량문(上樑文)은 신선이 산다는 백옥루에 대한 상상력을 동원해 지은 글입니다. 이 글이 언젠가부터 서울 장안에 나돌아 그녀의 천재성과 재능은 일찌감치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지요.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기 어려웠던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여성으로서 글을 배우고,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던 당시 허 씨 집안의 분위기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5세 무렵 6대 연속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 안동 김 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 1562~1592)과 혼인한 후 허초희의 삶은 평탄치 않습니다. 과거 공부를 했지만 글공부에 크게 소질이 없던 남편은 기생방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이고 가정은 뒷전이었습니다. <규원(閨怨, 규방의 원망)>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비통한 처지와 외로움을 고운 시어로 풀어냅니다.
비단 띠 비단 치마에 눈물자국 겹쳤으니
해마다 봄풀을 보며 왕손을 원망해서랍니다.
아쟁을 끌어다 <강남곡>을 끝까지 타고나자
빗줄기가 배꽃을 쳐서 낮에도 문을 닫았답니다.
가을 지난 다락에 옥 병풍 쓸쓸하고
갈대밭에 서리 지자 저녁 기러기 내리네요.
거문고 다 타도록 님은 보이지 않고
들판 연못에는 연꽃만 떨어지네요.
게다가 친정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달리 엄격하고 완고한 시어머니와 불화를 겪으며 고달픈 시집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조판서를 지낸 송기수(宋麒壽)의 딸로 당대 최고의 사대부 가문 자손이었던 시어머니의 눈에 바느질이나 살림보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며느리는 매우 못마땅한 존재였을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1580년 아버지 허엽이 죽고 잇달아 어머니와 자신의 딸, 아들을 병으로 잃었으며 그 충격으로 태중의 아이마저 유산되는 불행이 닥칩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했다 오히려 귀양을 갔고, 이듬해 1588년에 풀려났지만 방랑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객사합니다. 이 모든 불행이 10년도 안 되어 일어나고 허초희는 홀연 세상의 끈을 놓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 꽃다운 스물일곱이었습니다. 허초희의 죽음 이후로도 허 씨 가문의 불행은 계속되어 동생 허균이 역모죄로 거열형을 당하고 아버지 허엽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등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고 맙니다.
허초희의 시문집『난설헌집(蘭雪軒集)』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1608, 강릉시립박물관 소장)
허초희의 시가 굉장히 많았다 하나 그녀의 마지막 유언대로 거의 불태워 없어지고, 누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동생 허균이 자신이 간수하고 있던 200여 편을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 1546~1624)과 양유년(梁有年)에게 전합니다. 사신으로 조선에 온 주지번, 양유년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선조 임금은 당대의 문사로 유명한 대제학 유근(柳根, 1549~1627)과 종사관 허균을 원접사(遠接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주지번과 교류하게 된 허균이 누이의 문집을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606년(선조 39) 북경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중국에서 엄청난 열풍을 일으킵니다. 주지번은 “허 씨 형제의 문필은 뛰어나고, 난설헌의 시는 속된 세상 바깥에 있는 것 같다. 그 시구는 모두 주옥같고 그 형제들은 동국(東國)의 귀한 존재들이다.”라고 극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초판본은 같은 해에 금속활자로 찍어낸 개주갑인자본(改鑄甲寅字本)이라 전하지만 희귀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 1692년(숙종 18)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中刊)한 중간본이 세상에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큰 인기를 끌었고, 1711년에는 일본의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다시 간행되어 일본 열도에서도 선풍을 일으킵니다.
서애 류성룡은 1590년 허초희의 시를 읽고는 허균에게, “집안의 보배로 간직해서 후세에 전하라.”라고 일렀고, 1695년(숙종 21년) 청나라 강희제는 사신을 파견하면서 “조선 고금의 시문들과 『동문선(東文選)』, 『난설헌집』, 그리고 최치원·김생·안평대군의 필적을 가져오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으니 그녀는 우리나라 문화계의 최초의 한류스타였습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허초희의 시는 조선 사대부의 시처럼 충효나 풍류를 노래한 시가 아닙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질투 같은 인간 내면의 솔직한 감정을 섬세한 시어로 표현해 내었기에 더욱 현대적이고 시대를 넘어서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조선이라는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 그러한 재능은 오히려 그녀 자신에게 독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그녀는 유일한 위안이었던 시의 세계로 더욱 숨어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현실의 고달픔을 뛰어넘는 도교적 상상력이 표현된 시들이 많습니다. 고달픈 현실을 떠나 신선 세상으로 가고 싶을 만큼 현실의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반면에 추운 겨울, 밤을 새워 남의 옷을 짓는 가난한 여인의 모습을 묘사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표현한 <빈녀음(貧女吟, 가난한 여인의 노래)>과 같은 시도 존재합니다. 자신은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그녀의 따뜻한 시선은 어쩌면 그것이 현실에서의 자신의 불행한 삶과 닮아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굴 맵시야 어찌 남에게 떨어지랴
바느질에 길쌈 솜씨도 모두 좋건만,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오.
춥고 굶주려도 얼굴에 내색 않고
하루 내내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부모님만은 가엾다고 생각하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나를 어찌 알랴.
밤늦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노라니
베틀 소리만 삐걱삐걱 처량하게 울리네.
베틀에는 베가 한 필 짜여 있지만
결국 누구의 옷감 되려나.
손에다 가위 쥐고 옷감을 마르면
밤도 차가워 열 손가락 곱아오네.
남들 위해 시집갈 옷 짓는다지만
해마다 나는 홀로 잠을 잔다오.
허초희 생가 터로 추정되는 초당 고택(문화재자료 59호)
초당 고택 자리는 아버지 허엽이 살았고 허초희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의 집은 1912년 초계 정 씨의 후손인 정호경이 가옥을 늘리고 고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택의 안채에는 그녀의 영정이, 사랑채에는 허균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잘 정비되어 있지만 수백 년 전의 그들을 떠올릴 만한 어떤 단서도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고택은 주변의 솔밭과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를 받습니다.
초당 고택 가까이에 허초희와 허균, 두 오누이 문인의 활약상을 소개하고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기념관의 현판에 허균은 이름을, 허초희는 이름이 아닌 호를 사용한 것은 왜일까요? 허난설헌이란 이름이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