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속 깊은 친구 하나가 있습니다. 잘 난 척 뻐기지 않고 언제 만나도 한결같으며 무슨 말을 해도 그것으로 내 허물을 삼지 않는 그런 마음 씀씀이를 가진 친구 말입니다.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부드럽고도 단호한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없던 용기마저 생깁니다. 그는 바로 창경궁입니다.
서울에는 5개나 되는 궁궐이 있고 경복궁, 창덕궁 같은 크고 화려한 궁궐들이 있지만 창경궁은 유독 내 맘을 편안하게 합니다. 마음이 짓눌려 어깨와 등이 자꾸 앞으로 거꾸러지던 어느 날, 쫓기듯 허위허위 찾아간 내게 창경궁이 준 조용한 위로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창경궁로(종로구 와룡동)를 사이에 두고 서울대학병원 건너편의 창경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찾는 이가 적은 편입니다. 그래서 봄날의 쏟아지는 보드라운 햇살을 받으며 전각 사이를 한가롭게 산책하거나, 깊어가는 가을날 소복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후원을 그저 어슬렁거리기에 좋습니다.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을 찍어 가며 뽀드득뽀드득 걷는 겨울날의 운치도 놓치기 아깝지요.
창경궁이 걸어온 길을 한번 살펴볼까요?
조선의 아홉 번째 왕 성종은 할머니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의 비 소혜왕후(후일 인수대비), 작은어머니인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등 웃전의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수강궁을 수리, 확장해 창경궁이라 칭하였습니다. 1482년의 일입니다.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북궐, 北闕)의 동쪽에 위치하였기에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지요.
임진왜란 때 세 궁궐이 모두 불타자, 광해군은 규모가 큰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해 법궁으로 삼음으로써 동궐은 조선 후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 무대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 후기 궁중의 수많은 사건사고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궁중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 장소입니다. 특히 창경궁은 애초에 창덕궁을 보완해 왕실 가족의 기거 공간을 확보하는 기능이 컸기에 궁중 사람들의 생활과 더욱 밀접해서 전각과 산책로 여기저기에 한숨과 눈물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지요.
하지만 창경궁은 광해군 대의 중건 이후로도 크고 작은 화재를 겪었고, 일제에 의해 동·식물원으로 탈바꿈해 창경원(昌慶苑)으로 불리는 치욕의 역사도 아로새겨집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으로 다시 제 이름과 원래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새 역사를 써가고 있습니다.
우선 정문인 단아한 홍화문으로 들어서야 합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400년 세월을 버텨온 문입니다. 이 문을 나서며 멋진 시를 읊조린 풍류 왕이 생각납니다. 그는 바로 만 13세에 왕위에 올라 이례적으로 수렴청정을 스킵하고 곧장 왕으로서의 위엄을 챙긴 카리스마 넘치는 19대 숙종입니다.
그는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로 장남의 수난이라는 조선왕조의 불운을 깨뜨린 유일한 왕입니다.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그는 눈치 보지 않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3번에 걸친 환국(換局, 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당파로 권력을 교체해가며 정국을 주도한 정치 형태)으로 송시열과 같은 쟁쟁한 조정 대신들을 굴복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여인들마저 정치의 희생물로 삼았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우리 역사의 라이벌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어찌 보면 이 냉정한 지아비에 의해 폐서인되고 강등당했으며 심지어 사약을 마시게 된 불운의 여인들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혼자서 판단해야 했던 카리스마 왕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외로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홍화문을 나서며 이렇게 읊조립니다.
<홍화문을 나서며>
- 숙종
가마가 궁문을 나서니 해는 더디 지는데
한줄기 향 연기 아지랑이에 뒤섞이네.
탁 트인 거리에 많은 남녀 무리를 이루었고
건듯건듯 봄바람은 얼굴을 스치는구나.
창경궁의 가장 오래된 건조물인 옥천교(玉川橋)에서 서수와 도깨비상 찾기 해보실래요?^^
홍화문을 들어서자 널찍한 돌다리가 보입니다. 어느 궁궐을 들어서든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돌다리인데요, 금천교(禁川橋)라고 합니다. 삿된 것들을 다리 아래 물속에 버려두고 가란 의미이기에 금천교에는 도깨비, 서수(상서로운 짐승) 등의 돌조각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지요. 창경궁의 금천교는 옥천교(玉川橋)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다리라 창경궁이 완전히 불타버린 임진왜란 때도 건재할 수 있었으니 창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조물입니다. 자그마치 540년이 훌쩍 넘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은 도깨비상은 어제 만들어진 듯 복슬복슬한 양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귀엽습니다.
옥천교와 명정문을 차례로 지나면 넓은 조정이 펼쳐지는데 가장 중심 건물인 명정전까지 모두 동향을 하고 일직선으로 놓여 있습니다. <주례-고공기> ‘제왕남면(帝王南面)’의 법칙에는 위배됩니다. 그러나 자연의 원래 모습을 억지로 바꾸어 남향하지 않고 동향으로 지은 것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더욱 중히 여긴 조상들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궁궐은 기능별로 정사(政事)를 보는 정무 건축 공간(외전, 外殿)과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건축 공간(내전, 內殿), 그리고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 건축 공간(후원, 後園)의 3개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사를 목적으로 한 건물군은 앞에 배치하고 생활공간을 뒤편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형식이 통례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배치법은 중국이나 일본의 궁궐 배치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명정전(明政殿)과 넓은 조정
외전의 가장 중심 건물은 바로 정전(正殿)입니다. 국가의 모든 중요한 의례가 행해지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며 왕의 조회가 열리는 으뜸 공간이 바로 정전입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중층구조인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에 비해 소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경궁 건립의 원래 목적이 왕실 가족의 주거 공간 확보 차원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정치 공간인 정전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존하는 5개 조선 궁궐의 정전 중,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국보로 지정될 만큼 가치가 높습니다.
현대의 집 크기는 m² 나 평으로 표시하지만 전통 건축물에서는 칸으로 말합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間)으로 셉니다. 명정전의 경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니 15칸(5*3) 집이 됩니다. 가장 작은 집이 초가삼간(칸)입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사대부 집의 규모를 최대 99칸으로 정해 놓았는데요, 지방으로 갈수록 99칸이 넘는 집들이 꽤나 많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법망을 피해 가는 여러 방법들이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조사가 시작되면 중간에 문을 닫아걸고는 서로 다른 집인 체했던 것이지요. 청렴과 강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만.
자, 이제 명정전 월대 위에 서서 조정이라 불리는 앞뜰을 한번 내려다볼까요? 월대는 궁궐의 정전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입니다. 조정의 문무백관이 품계석 옆으로 늘어서서 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이 위엄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코 명정전의 꽃 창살입니다. 햇빛이 들이치는 오전 무렵, 한지를 관통한 부드러운 햇살이 건물 내부의 전돌 바닥에 꽃 그림자를 점점이 수놓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외국 손님들도 경탄해 마지않는 이 멋진 장면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