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명한 새벽빛 Apr 13. 2016

불안의 실체

마음수련 명상 효과는 꿀잠

그림 - 김주희 작가님


어둡고 한적한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내 뒤를 따라 왔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정작 남자는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극도의 불안이 나를 집어삼켰다.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살려주세요!'



나도 모르게 평소에는 찾지도 앉던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기에 마음 속으로 반복해서 되뇌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그대로 깊은 불안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끼이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익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기계음이 들리더니 이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대로 눈을 떴다. 나는 살아 있었다. 꿈이었다.






가위눌림이었다. 임용고시 1차 시험을 치러 가기 바로 전날 밤에 내가 겪은 일이다. 흔히 가위눌림은 귀신을 봤다는 체험담과 함께던데,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지 내 꿈에 귀신은 나오지 않았다. 가위눌림은 그냥 스트레스로 인한 수면 장애라고 생각했다. 내가 범불안장애마냥 언제나 긴장 상태였고 불면증도 일상적으로 겪었지만 가위에 눌려본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임용고시가 주는 불안감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집안 사정상 내가 합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도 한 몫 했을 터다.


불안감을 동반하는 꿈과 함께 제대로 가위에 눌린 나는 뇌의 꿈제작 기술이 놀라웠다. 어떻게 그런 불안감을 그대로 투영하는 꿈을 만들어냈을까. 우연의 일치라기엔, 내 몸이 느끼고 있는 불안을 표현하는 데 너무나 적절했다. 뇌는 언제나 꿈에다 우리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다. 왜곡과 변형이라는 양념을 치기는 하지만 마음에 없는 것이 꿈에 나오기도 힘든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은 별 것 아니었지만 꿈 속에서 나를 덮쳤던 불안은 정말이지 너무 끔찍했다. 나는 한 동안 가위눌림이 두려워 잠이 드는 것을 무서워 했다.



불안의 실체


내가 어디를 가든지 불안이라는 녀석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것이 극도의 공포감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일상적인 수줍음의 형태일 때도 있었다. 겪어보지 않고는 그 공포를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또 다시 나를 덮칠지도 모르는 그 불안감이 두려워 불안에 떨었다. 그런데 나는 마음수련 명상 1과정을 하다가 내 불안의 실체를 발견했다. 분명히 쉽고 재미있는 명상 방법을 따라 나를 돌아보고 빼기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막혔었다. 1과정을 넘어가야 2과정을 할 수 있다는데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빼기는 하기 싫고 불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나는 1과정을 확인 받지 못하는 것이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수련 명상은 과정 확인을 받아야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정을 넘어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오히려 넘어가지 못한다. 어째 마음수련 명상은 역설 투성이인 것 같은데, 세상 이치 자체가 그러하다. 여하튼 나는 단순히 과정을 넘어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도움님들이 이야기하는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목표였다. 삶이 다 다르니까 사람마다 마음을 버리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조급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했다. 도저히 강의실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방에 돌아와 눈물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엉엉 울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저 1과정 방법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계속해서 버려보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버려보니까, 그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 하나에 내 불안의 실체가 있었다.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이것이었다. 하하. 나는 허탈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그 불안의 실체가 고작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니. 놀랍게도 이것을 알아차렸을 뿐인데 그렇게 무겁고 힘들던 마음이 다 사라져 버렸다.



죽음을 알아야 삶을 안다


이 매거진의 예상독자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마음수련 명상을 통해 나를 돌아본 이야기를 쓰고 있어서 마음수련 명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난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글 <죽음에 관하여>를 읽으면 그나마 이해가 쉬울 것이다. 부제가 '죽음이 곧 삶인 이유'였다. 좀전에 죽는 것을 두려워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대목에서 내가 허탈했던 이유도 여기에 나타나 있다.


마음수련은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위해 일단 "상상적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방법대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내 삶을 돌아보는 중이었으면서,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지 않나. 나는 명상 방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심으로 따라하고 있는 줄 알았건만,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자 그 뒤로는 마음수련 명상 방법이 조금 더 쉬워졌다. 역설의 끝판왕이라 해야하나. "죽음", 그것은 "삶"의 열쇠였다.



이 일상


나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었다. 내 멋대로 '꿈을 꾸며 자는 잠'을 "꿈잠"이라고 부르려 한다. 꿈잠을 자다가 깨면 언제나 덜 잔 느낌이 들어서 개운하지가 않았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아무리 많이 자도 부족해서 고민이었다. 그런데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나서는 잠에 대한 걱정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가위에 눌린 적은 있었는데, 꿈도 허상에 불과하니까 잠결에도 마음수련 명상 방법으로 빼기했더니만 불안감이 엄습하다 말고 그냥 시시하게 끝났다. 이제는 꿈도 안 꾸고 깊고 깊은 숙면을 취하니까 조금만 눈을 붙여도 개운하다. 이하 "꿀잠"이라고 부르겠다.


더 놀라운 것은 일상의 변화였다. 나는 몸이 전보다 훨씬 가볍고 건강해졌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것은 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알다시피 "꿀잠"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편안한 상태이다. 하룻동안 지친 몸의 기능 회복도 이러한 숙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나면 깨어 있을 때도 그런 상태라고 보면 된다. 사람의 뇌가 생각을 하는 데도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생각뭉치가 없으니까 뇌로 갈 에너지가 절약되어 필요한 다른 데 가서 쓰이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내 추측이며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나만의 개인적인 변화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꿀잠이 일상이다.





그림 - 김주희 작가님

불안은 "모름"에서 온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일 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그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길을 밝힐 한 줄기 빛이 희망이 된다. 같은 길을 걸어도 대낮과 한밤중은 다르다. 아무리 익숙했던 길도, 빛이 없으면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빛"이 "있음"이고 "앎"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겐 단지 촛불 하나가 필요하다. 어둠은 '빛 없음'일 뿐이기에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 어둠과 불안의 실체는 "없음"이다. 없음을 이기는 것은 "있음"이다. "있는 것"은 빛이자 세상이다. 그리고 세상은, 당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