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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28. 2016

박제가 되어 버린 기억을 아시오?

사랑 받았다는 비극, 시간에 책갈피 되기까지

  제국주의 시대, 처음으로 동서양이 본격적으로 섞여들기 시작했던 그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서로를 짓밟으려 드는 사람들, 그 사이에 불행이 판쳤다.


  개항지는 그 불안한 공존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뒤섞이다, 라는 동사의 명사형이었다. 식민지는 고요하게 유지되던 체계가 습격을 받아 무너진 자리, 자존심이라 불릴 것도 자존감이라 불릴 것도 모두 쓸려간 자리였다.


  사건 사고도 예사롭지 않았고, 연애 사건이 터져도 고요하지 않았다. 비극이 숨을 죌 듯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시대였다. 식민 지배 국가의 뒤에 슬몃 붙어서 제 일신의 안위를 추구한 세력은 비릿하게 웃었고, 독립 운동가들은 총탄 연기 내음만큼이나 스산한 싸움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떨며 몸을 사렸다. 그럼에도 그 틈사이 어디쯤에서 심심찮게 비극이 솟아올랐다.


  따지고 보면 불륜인 연인이 투신 자살을 하고, 친일파 부잣집 외동아들이 기생과 연인이 되어 음독 자살을 하고, 그러면서 연인간의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억울하게 잔혹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더라도 가해자 쪽이 식민 지배하는 국가의 국민이면 잠잠하게 덮이는 일도 있었다. 뜻을 펼치지 못하고 꺾인 푸른 죽음은 얼마나 많았던지 이루 셀 수조차 없었다. 조선뿐 아니라 수많은 땅에서 그랬다. 가히 광적인 시대였다.



  그리고 어떤 여자들이 있었다. 대개 그렇듯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는 남자보단 여자들이 비극에 더 많이 내팽개쳐졌다. 이 여자들의 이야기는 아주 분명한 뼈대를 가진 이야기로 여태까지 남아 흘러 왔지만, 이 여자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 이 여자들이 실존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역사는 철저하게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되는 야사는 옛날 이야기로 들어도 좋다고 보는 비전공자 야매 덕후 입장에서는, 각 개인의 삶을 파고들기보다는 시대의 일면을 본다는 마음으로 가벼이 보고 싶다. 마치 내 옆으로 나비 한 마리 날아갈 때- 어 나비네, 하면서 그 날아간 자리를 잠시 쳐다보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갈 길 가는, 그런 어느 봄날 오후처럼. 그렇게.



이미지 출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1492

  신경숙의 <리진>, 그리고 김탁환의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은 비슷한 시기에 꽃봉오리처럼 탁 터져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구라도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도하던 조정이 그 힘을 잃어 이제 회색 비극만 남은 듯 보였던 그 궁에 분홍빛 로맨스 이야기가 한 줄기 남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외무 대리로 조선에 있던 프랑스 출신의 외교관 플랑시는 고종을 알현하러 궁에 들어갔다가 무희들의 춤을 보게 된다. 그 중 유독 미모가 빼어나고 눈에 들어오는 무희가 있어, 그 우아미에 빠진 플랑시는 고종에게 그 무희를 달라고 청해 고종의 허락을 받아내는데 이가 바로 리심, 혹은 리진(이하 리진)이라고 불리는 소설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플랑시의 발령지가 바뀌었고, 리진을 조선에 두고 간다면 귀한 궁중 여인도 아니었던 리진이 어떻게 될 지는 불 보듯 뻔했다. 플랑시는 리진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하지만 조선에서 나고 자란 리진에게 벨 에포크라 불리던 파리의 생활이란 컬쳐 쇼크 그 자체였다. 그러던 차에 플랑시가 조선으로 재발령을 받아 두 사람은 조선 땅을 다시 밟게 된다.


  향수병을 가라앉히고 익숙한 생활을 다시 이어갈 기대에 부풀었으나, 조선 땅에 돌아온 리진이 끌려가듯 가게 된 곳은 왕실 무희단이었다. 플랑시에게 '양도'되었던 국가의 '소유'가 돌아옴에 따른 조치였다. 플랑시는 강하게 항의했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고, 유럽의 문물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리진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사회에 좌절을 느껴 금 조각을 삼키고 자살했다, 라고 끝나는 이야기다.


  신경숙과 김탁환은 소설가의 필치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씨앗이 된 이야기는 조금 찝찝하다. 이폴리트 프랑뎅이 쓴 <한국에서(En Corée)>라는 책에 짤막하게 실려 있던 이야기라는데, 우선 이 책의 저자 프랑뎅부터가 그다지 역량이 좋거나 뛰어난 관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록 제목은 '한국에서'라고 붙여 놓았지만, 자기가 겪은 일보다 더 많은 '카더라'들을 두루뭉술 섞어 쓴 책이었다. 당시 수많은 서양 사람들이 그랬듯 이들에게 동양이란 미지의 세계였다. 문화 차이가 워낙 커서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중 대다수의 상상이란 게 대개 선정적인 측면이나 부정적인 면에 기울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까이는 오스만 제국의 할렘부터 향신료와 직물의 나라 인도를 거쳐 중국 자금성, 영 문을 열어 주지 않던 조선, 일찍이 개항을 했던 일본의 나가사키까지 다 그 오만한 상상력 속에서 기묘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프랑뎅의 책도 그 중 하나였다.


이미지 출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1639

(2대 공사 프랑뎅, "한국에서" 표지, 초대 공사 플랑시)


  리진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부분에서도 구석구석 그런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리진이 파리에서 우울해진 이유가 파리의 '우월한' 문물을 보았기 때문이었으며, '서양 여인들에 비해 자신의 육체가 열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그런 리진을 '장난삼아 여자 옷을 입혀 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였다'고까지 적혀 있다니 말 다 했다.


  리진의 이야기가 허구라는 시각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위 두 사진 아래 링크된 기사가 차례로 허구라는 시각, 그에 대한 반론 기사이다. 둘 다 일독하기 좋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했듯 내 목표는 사실 관계를 밝히는 게 아니니까 그 부분은 그저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게 있다. 세 가지 다른 시선이다. 프랑뎅의 시선과 플랑시의 시선 그리고 리진의 시선.


  프랑뎅의 시선은 제국주의의 시선이었다. 부드럽고 로맨틱한 이야기를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 그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제국주의자들의 녹슨 칼날이 느껴진다. '미개한 그들'과 '우월한 우리'를 부각시키는 진절머리나는 시선이다.


  플랑시의 시선은 낭만주의의 시선이다. 사랑을 향한 그 모든 몸짓에서 현실에는 조금 무감하여 유약한 낭만주의의 색이 종종 드러난다.


  그리고 리진의 시선, 그것은 어떤 색깔도 담지 못했다. 스스로 선택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어떤 색깔을 가질 새도 없이 '양도'되고 '반환'되어야 했고, 그조차도 엉거주춤 이런저런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는 손길 아래 그려졌다.


  이 이야기가 허구든 아니든, 비슷한 높낮이를 가진 이야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름이 리진인지 리심인지도 알 수 없다는 점도, 그래서 어울린다. 그 이름 뒤에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이름이 녹아 있을 테니까. '양도'되고 '반환'되며 제 시선의 색을 갖추지 못하고 끌려 가야 했던, 사랑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비극이 되어 박제된 자리라면 이름은 명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내게 그다지 달갑지 않은 기억이었던 스리랑카 여행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꼽자면 단연 해안 기찻길을 따라 가던 어느 오후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푸른 인도양, 그 해안에 업혀 살아가는 어민들의 생활이 묻어 있는 오두막, 운치 있는 해변 레스토랑들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며 갈 수 있다니 정말 봐도 봐도 지겹지 않은 멋진 광경이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콜롬보 포트 역에서는 삼사십 분, 내가 있었던 밤발라피티야 역을 기준으로는 두세 역만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크고 하얀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마운드 라비니아 호텔이다.


  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외곽의 여유 있는 부촌, 해변에서 촛불 하나 켜고 식사에 술 한 잔을 곁들일 수 있는 분위기, 4성급 호텔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멋진 뷰... 굳이 무엇을 더 보태지 않아도 충분히 로맨틱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 여행객의 발길을 끄는 로맨틱한 이야기가 하나 더 숨어 있다. 1805년 아직 '실론' 섬이었던 스리랑카에 총독으로 부임해 온 토마스 메이틀랜드 경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은 사실 총독 관저 건물이었다.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 1865년의 모습.

  '톰 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지역에서는 큼직한 인물이었다. '톰 왕'은 제 격식에 걸맞는 멋진 건물로 총독 관저를 짓고 싶어 했다. 섬 곳곳을 살피며 완벽한 위치라고 선정한 데가 지금 호텔 자리였다. 수도인 콜롬보와 그다지 멀지도 않고 경관도 좋은 자리, 그곳에 '톰 왕'은 관저를 짓기 시작했다. 1806년이었다.


  건물이 완공되고 열린 축하 파티에서, 정문에 서자마자 메이틀랜드 경은 한 무희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무희의 이름은 로비나 아폰수와(Lovina Aponsuwa), 포르투갈-싱할라(스리랑카 현지인) 혼혈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즉시 사랑에 빠졌고 은밀한 연인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기는 어려웠다. 한 사람은 식민지 주민이고 한 사람은 식민 총독이었다. 심지어 로비나는 하위 카스트 출신이었다. 폐쇄적인 스리랑카 시골 마을 윤리에서도, 스리랑카 내 영국인 무리의 시각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비나를 비롯한 하층 카스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총독 관저와 멀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지하 터널을 파서 밀회를 했다고 한다. 터널의 한쪽 끝은 로비나가 사는 집 우물, 다른 한쪽 끝은 관저의 와인 저장고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호텔 측의 상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두 사람의 관계는 6년이나 이어졌다고 한다.


  메이틀랜드 경이 실론을 떠나야 했을 때, 그는 상당한 부지를 구입해 제가 사랑한 로비나의 몫으로 챙겨 주었다. 갈시카(마운트 라비니아 지역의 옛 이름)와 조금 떨어진 아띠디야 지역이었다고 한다. 아마 로비나가 천대 받는 동네보다는 조금 떨어져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지금도 근방 어딘가에 로비나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은 그렇게 끝났지만, 로비나의 이름은 호텔 이름과 지명마저 되어 여태까지 남아 있다.


  로비나의 이야기는 오늘 다루는 세 이야기 중 유일하게 비극적이지 않은 엔딩이다. 비록 백년해로는 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한 이야기 안에 얽혀 있다. 로비나 때문이었는지 메이틀랜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2005년에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 오픈 50년 기념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는 메이틀랜드 가문에서 참석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혹시 스리랑카 여행을 가게 된다면, 반나절 시간을 내어 기꺼이 마운트 라비니아에 다녀오길 권한다. 친절한 호텔 직원들이 (너무 바쁘지 않다면) 호텔 소개도 차분하게 해 주고, 테라스에서 펼쳐지는 경관도 멋지고, 무엇보다 비극이 우후죽순 솟아나던 그 시대에 이렇게 오후의 밀크티 한 잔처럼 은은한 이야기도 있었다는 그 자체로도 가볼 가치는 충분하다. 주머니 사정이 괜찮다면 하루 묵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오가는 길은 꼭 해안선을 따라 기차를 타고 마치 시골 간이역 같은 작은 역에서 내려 나무그늘 드리운 작은 길을 차분하게 걸어보기를. 그리고 호텔 앞에서는 원래 모습과 너무 다를 것 같은, 성녀처럼 천을 뒤집어 쓰고 있는 로비나 동상을 보며 슬몃 미소 지어 보기를.




  나가사키에 가면 글로버 정원(일어 발음으로는 구라바엔) 있고, 그곳에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의 배경이 되었다는 글로버 저택이 있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초기 개항지였고, 이곳을 통해 기모노와 게다 그리고 게이샤 화장으로 대변되는 일본 전통 복색의 이미지를 서양에 강하게 남겼다. 네덜란드에게만 처음 문을 열었기 때문에, '홀랜드'와 유사한 발음의 '오란다'라고 하여 네덜란드 사람들을 오란다 상이라고 주로 불렀다. 또 그들이 모여 사는 언덕 길을 오란다자카(오란다 언덕)라고 불러 지금도 개항지의 이국적인 건물들이 남아 관광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글로버 정원은 오란다자카를 따라 쭉 올라가고도 더 올라가야 있다. 글로버 저택이 제일 유명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글로버 정원이지만, 들어가서 보면 그밖에도 다른 거주자들의 저택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글로버 정원 아래는 나비 문양을 본딴 의자가 가득 놓여 관광객의 다리를 쉬게 하는 분수대 앞에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주역이었던 소프라노 미우라 타마키를 본따 만들어진 이 동상은 이곳이 나비 부인의 본향임을 나타내 준다.


  사실 나비 부인이 이곳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배경이 된 글로버 저택의 '글로버'는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회사가 중국으로 지사를 옮겨 갈 때 따라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 아예 자기 사업을 시작해 버린, 제법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츠루'라는 이름의 일본인 아내를 맞기도 했는데, 츠루 또한 조선 사업에서 뼈가 굵었던 아와지야 회사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 자체가 마치 개항지 나가사키를 고스란히 담아 보여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글로버의 사업이 나가사키 근대화에 힘을 더했다고 보는 것 같다. 글로버 저택에 가면 '글로버의 업적'이라는 이름으로 증기 기관차, 탄광, 기린 주조사, 무기 사업 등 굵직한 사업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실상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취급이다.


  <나비 부인>을 이해하려면 당시 개항지 분위기를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일본은 개항에 적극적으로 나선 입장이었고, 다른 나라들처럼 트라우마나 가슴 아픈 역사 같은 건 그다지 없다. 그러나 마음 앓은 개인이란 태평천하에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일본 게이샤들이 서양인들 상대로도 영업을 하게 되면서 국제 결혼이나 매춘 문제가 종종 생겨났는데, 나비 부인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가련한 인물의 순정을 주제로 내세운다. 결혼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버림 받은 게이샤 이야기다. 그 1막이 시작되는 곳, 두 사람이 전통 혼례를 치르는 곳의 배경이 바로 이 글로버 정원이었다.



  열다섯 살 소녀는 아버지가 할복 자살하신 후 집안이 몰락하고 게이샤가 되어 쵸쵸(나비)라는 예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해군 장교 핑커튼과 전통 혼례를 치르는데, 이 결혼 때문에 양쪽에서 난리가 난다. 이 결혼에 모든 것을 걸고 지고지순한 핑커튼의 여인이 되고자 했던 쵸쵸는 신도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쵸쵸의 숙부가 그런 쵸쵸를 더 이상 가족으로 여길 수 없다고 호통을 치면서 친척들이 모두 결혼식장을 떠나 버린다. 나가사키 주재 미국 영사도 핑커튼에게 경고를 한다. 장난스러운 결혼이라면 그만두라고.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며 기어코 결혼을 한다. 동상이몽이랄까, 쵸쵸 입장에서는 운명적인 사랑이었고 핑커튼 입장에서는 적당히 장단 맞춰 주는 일이었다. 미국에 돌아가면 미국 여자와 결혼을 할 테고, 법적 구속력도 갖지 않는 전통 혼례식 정도는 한 번 해 줘도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2막이 되면 쵸쵸가 홀로 핑커튼을 기다리고 있다. 3년 째 연락이 없는 핑커튼을 기다리는 쵸쵸에게 하녀 스즈키도 조심스레 말한다. 본국에 돌아갔다는 외국인 남편이 돌아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쵸쵸는 벌컥 화를 내지만, (이때 부르는 아리아가 그 유명한 '어느 맑은 날'이다.) 상황은 쵸쵸 마음 같지 않다.


  이미 케이트라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핑커튼의 편지를 들고 미국 영사도 찾아오고, 뚜쟁이 고로도 쵸쵸더러 부잣집에 시집을 가라며 찾아온다. 쵸쵸는 단호하게 구혼을 거절하고 영사에게는 아이를 보여주며 꼭 아이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마침내 예포 소리와 함께 핑커튼이 왔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였다. 새벽 내 꼿꼿하게 앉아 핑커튼을 기다리던 쵸쵸가 잠시 눈을 붙이는 사이 다른 인물들의 대화가 오간다. 자신을 기다려왔음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집안 장식에 핑커튼은 괴로워하며 자리를 뜬다. 케이트는 아기만이라도 돌봐 주겠다고 친절을 베풀고, 스즈키는 그러면 쵸쵸가 불쌍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이를 알게 된 쵸쵸는 잠시 후에 핑커튼이 직접 아이를 데리러 오라고 말해 둔 다음, 아이의 눈을 가리고 아이 손에 성조기를 쥐어 준다. 그리고는 할복 자살한 아버지의 칼, "명예롭게 살지 못할 바엔 명예롭게 죽으라"는 문구가 새겨진 칼로 자결을 한다.



  이 이야기는 푸치니가 시작한 게 아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두어 권의 소설로 나와 있었고, 그 중 존 롱이라는 사람이 선교사 누이를 통해 들은 게이샤의 실화를 바탕으로 <나비 부인>을 썼다. 동양의 신비로운 이미지와 화려한 무대로 볼거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연극으로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고 푸치니도 곧장 오페라로 만들어 올렸다.


  비슷한 이야기가 퍼져 있다는 이야기는 실화의 윤곽이 있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처음 보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랑과 신뢰가 같은 무게를 갖지 못하고 누군가 눈물 흘린 일이 한둘은 아니었을 테니까. 나비부인은 명예를 위해 죽었다기보다, 제 몸 앉힐 곳 없은 세상을 두고 날아갔다는 편이 맞을 테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는 결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노력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물며 서로를 난생 처음 보는 그 시대, 말도 안 되는 호승심과 광기가 숨통을 죄며 세상을 덮던 그 시대, 개인을 개인으로 보기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그 시대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야기에 흐릿하게 녹아 밴 수많은 사람들의 입김을 만져 본다. 영웅이 되지도 주인공이 되지도 못한, 대단한 의협심이나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 되지도 못한, 가십의 등장 인물이 된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비극에 깔려 죽었어도, 대단하지 못했어도, 인간이었다. 이해 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해 아팠던 인간이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안쓰러움을 담은 다정한 시선만은, 이들의 이야기 앞에 헌화처럼 남겨두고 싶다. 어 나비 지나가네, 하고 슥 지나쳐 버릴 만큼 쉬이 잊힐 기억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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