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이 가느다랗게 낀 어두운 밤이었다. 눈이 내려앉은 언덕 위에서 짙은 안개가 쓱 내려오더니 어두컴컴하고 허물어져가는 낡은 성 주위를 담요처럼 감싸버린다. 성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아주 조용했다. 한 여인이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램프를 든 채 홀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별안간 길 주변의 시커먼 침엽수림 숲에서 타다닥 발돋움 소리가 났다. 늑대가 길게 울부짖는 소리도 메아리쳐 들려왔다.
밝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통통한 그녀는 회색 외투 앞자락을 손으로 단단히 여미더니 그대로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성의 침침하면서도 음침한 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벨을 열심히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다행히 눈 위치에 매달린 커다란 쇠고리가 겨우 비쳐 그것으로 있는 힘껏 문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늑대의 울부짖는 소리와 눈 밟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듯했다. 그녀의 동공이 점차 확대되고 입이 크게 벌어졌다.
"빨리 문을 열란 말이야! 어서!"
그녀가 소리치며 무섭게 문을 두들겼다.
"콰르르르~"
육중한 문이 열리고 안에서 희미한 램프 불빛이 먼저 나타났다. 그 뒤로 소름 끼치게 허옇고 삐쩍 마른 얼굴이 이어 모습을 비추었다. 키가 크고 검은 망토를 두른 매부리코 남자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검은 곱슬머리처럼 이글거리게 타올랐고, 한쪽 입술이 찍 올라갔는데 붉은 립스틱이라도 바른 듯 엄청나게 빨갰다. 그가 히죽거리는 태도로 뒤로 물러서며 그녀를 맞이했다.
"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메리켈 총리님. 트럼프 대통령과 다른 귀빈들은 이미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정상회의에 뱀파니아 왕국의 저 드라킬라 백작의 성을 선택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자, 그럼 방부터 안내해드리지요. 저녁 식사는 8시에 준비될 예정이고 파티는...."
짜잔~ 지금 드라킬라 백작이 자신의 성에서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피로 연명하는 뱀파이어다. 그럼 혹시 저곳은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성일까? 아님 할리우드 영화 세트장일까? 드라킬라 백작은 연기자가 연기하는 것일까?
흣흣흣, 절대 아니다. 지금 메르켈 총리는 독일에 있고 편안히 의자에 앉아계신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는 가상현실을 위한 고글이나 장비가 씌어져 있다.
이제 짐작들 하겠는가? 뱀파이어 왕국 '뱀파니아'의 '드라킬라 성'과 '백작'은 가상현실속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세계 정상들의 회의가 열릴 예정인 것이다.
과학과 첨단기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론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모두 예측하고 있다. 요즘 한창 주목받고 있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기술도 어마어마한 시장 잠재력을 가진 시장으로 각광을 받으며 구글, 페이스북, 애플, 인텔, 삼성, LG 등 유명 IT회사들과 통신업체, 방송사, 게임사 등이 모두 덤벼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 여기서 가상현실, 증강현실의 의미를 한번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가상현실 (VR, Virtual Reality) :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콘텐츠를 즐기는 것으로 사용자의 시각이나 청각, 촉각 등을 마치 실제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기술이다.
증강현실 (AR, Augmented Reality) : 실제의 공간에 가상의 콘텐츠를 결합하는 것으로 쉽게 예를 들자면 요즘 한창 인기 있는 포켓몬고 게임이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VR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VR 시장은 2020년에 5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전 세계 VR시장은 2020년에 약 800억 달러 (90조)로 초고속 성장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난 개인적으로 이 숫자를 훨씬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앞으로의 미래는, 아니 내가 바라고 보고 싶어 하는 미래는 가상의 세상과 현실이 서로 넘나들면서 그 경계가 점차 모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너무도 생생해서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님 가상의 세상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그런 애매한 경계 말이다.
우린 이미 수많은 SF영화를 통해서 이런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지 충분히 목격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나 영화의 소재가 생기고 이야기를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이제 그 시대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지난 10월 12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2016 STARTUP CON" 콘퍼런스에 참석했었다. 다양한 스타트업 대표들이 나와 앞으로의 세상과 예술에 대해 논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몸에 착용한 스마트 재킷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직접 보았고, 어떤 음악이라도 들으면 바로 음계로 옮겨주는 앱과 기타 다양한 IT 기술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내가 느낀 점은 참 세상이 빨리 변화하고 있고 하루가 다르게 기술들이 발전하고 있구나 였다.
특히 가장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 '가상현실'이었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벤처에서 일하신다는 한 강연자는 멀지 않은 미래에는 자동차를 사기 위해 자동차가 전시된 대리점에 갈 필요가 없어진다고 하셨다. 그냥 의자에 앉아 직원이 건네주는 VR기기만 쓰면 된단다. 그럼 소비자의 눈앞에 달나라가 등장하고 달 표면에 다양한 종류와 색상의 차들이 수백 대 쫙 주차되어 있단다. 소비자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차를 타보고 달려보며 고르면 된다. 달나라를 원하지 않으면 사하라 사막 전시장을 선택해도 된다며 다양한 배경에서 다양한 색상과 종류의 차들을 마음껏 경험할 수 있단다. 현재 어느 유명 외국 브랜드 자동차 회사가 이것을 실제 구축하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앞으로는 국제회의도 힘들게 비행기 타고 테러 위험 감수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가상현실 공간에서 만나 얼마든지 자유롭고 실제처럼 편하게 회의를 열 것이라고 확신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내가 쓰고 있는 '브라잇 동맹'이 문득 떠올랐다.
만약 브라잇 동맹의 난쟁이 왕국 '딥언더니아'의 그 멋진 지하 원형광장을 수백 대의 자동차 전시장으로 내준다면 어떨까?
만약 메르켈 총리가 참석할 정상회의가 뱀파이어 왕국 '뱀파니아'의 백작의 으스스한 성에서 열린다면?
아름답고 다양한 색상의 요트 수백 대가 인어왕국 '아쿠아니아' 바다에 멋있게 전시되어 있고, 인어들이 요트회사 직원으로 채용되어 설명을 해준다면?
순간 굉장히 흥미롭고 생각할수록 너무 재미있었다.
그날 마지막에 한 미국 강연자가 크게 외치셨다.
"Content is the king!"
그렇다. 내가 지금 IT분야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발전해나가는 과학기술을 따라잡을 수도 없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상상하고 관심 있어하는 콘텐츠, 이왕이면 다양한 분야와 계통, 사업들에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브라잇 동맹 3, 4권 등도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써 내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브라잇 동맹 1권의 챕터 8. 오나시아 손님들, 가상현실(VR), 드론, 인공지능(AI) 편을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
수진과 이안 일행은 브라잇 동맹으로 넘어가는 키릴장막 앞에서 오나시아인 3명을 만나게 된다. 그중 한 명이 한국 '산신령전자'에서 온 '이장'이었다. 그는 아직도 비둘기로 연락하는 '오나시아'에게 기술발전의 광명을 전해주기 위한 임무를 띄고서, 즉 그곳에서 사용될 수 있는 통신수단을 개발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던 중이었다.
사 년 전 처음 이 챕터를 썼을 때는 '산신령전자'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고작 '반도체, 핸드폰'이었다. 그 당시는 모두 접히는 폴더폰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삼 년 전 두 번째 원고 수정을 하고 있는데 아니,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등장했고 곧 내 손에도 그것이 들려졌다. 그래서 난 취급 물품에 '반도체, 핸드폰, 스마트폰' 이렇게 고쳐놓았다.
거의 일 년 전쯤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에는 이미 스마트폰은 다들 기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알파고로 인해 인공지능과 로봇분야의 놀라운 발전을 목격하였고, 구글의 무인차도 심심찮게 뉴스로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산신령전자가 취급하는 물품을 대거 확대해야만 했다.
앞으로 나올 4권부터 본격적으로 이것들을 하나하나 재미있는 소재로 등장시킬 예정이다. 3권 마지막에 수진이 브라잇 동맹에서 롤리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짐짝처럼 드론에 실려서 온다.
어제 우연히 한 잡지에서 흥미로운 단어를 알게 되었다.
혼합현실(MR, Mixed Reality) : 가상의 콘텐츠가 실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가상 드럼을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가상 시신으로 부검 실습을 할 수 있다.
이 정도 되면 이제 가상현실이니 증강현실이니 나누는 것도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합쳐져 융합되니 이전에 상상도 못 한 새로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브라잇 동맹 1권이 끝나고 2권을 올릴 예정인데 다소 허무맹랑한 판타지라고 여기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허무맹랑함도 앞으로 다가올 융합현실처럼 생생한 세상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시면서 읽어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