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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an 11. 2022

시루떡 한 조각

 

딱딱히 굳은 시루떡 조각을 찜통에 넣었다. 하얀 면포 대신에 기름종이를 깔고 습기가 적당히 올라오도록 한 다음 떡을 올렸다. 며칠 전 남편은 서류 봉투에 회사에서 동료가 떡을 돌렸다며 시루떡 서너 조각을 들고 왔다. 늦은 저녁이어서 냉동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니 점심 무렵이면 이 떡이 생각났다. 단호박 가루가 섞인 듯 노란 빛깔에 윗면은 설탕처럼 고운 팥이 올려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이 가는 떡이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갖췄다.     


이웃들이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는 팥 시루떡을 해서 가족과 나누는 모습을 가끔 마주쳤다. 특히 흰쌀보다는 찹쌀로 해서 쫀득한 찰진 것을 즐겨 먹었다. 난 그것보다는 쌀가루가 포근포근 쪄진 떡을 좋아한다.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로 떡을 주문해서 먹지는 않았다. 이번처럼 남편이 누군가가 전해준 것을 들고 오는 날이면 얼굴에 환한 미소로 반겼다. 냉동실에는 언제나 몇 가지 떡이 저장되어 있다. 아이들은 이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종일 집을 지키는 내가 챙겨 먹는다.     


찜통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고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얼음처럼 굳어있던 그것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5분을 훌쩍 넘길 무렵 젓가락을 떡 안으로 가져가 보니 겉면은 쑥 들어가더니 다시 멈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다시 뚜껑을 열었더니 포근하게 쪄졌다. 접시에 놓고 포크를 들고는 천천히 조금씩 먹었다. 그리 달지 않으면서도 입안에서 머무는 느낌이 참 편안하다. 시루떡은 이 계절과 닮았다.      

시루떡은 하얀 쌀이 중심인 듯하면서도 위에 올려진 검붉은 팥을 빼놓을 수 없다. 겨울이 절정을 달려가는 듯 매서운 칼바람이 오가다를 반복하고 그사이에 함박눈 역시 내리다 그치다 한다. 밖에 나가고 싶으면서도 잠시 멈춰 집 안에 머무는 게 편하다.      


오후 늦게까지 집에만 있었다. 집안을 정리하고 거실에 들여놓은 식물들을 살폈다. 시루떡은 하루 중 점심을 대신해 주었다. 밥을 멀리 하고 싶은 날 시루떡을 먹는 시간은 나를 위한 고요가 머무는 듯했다. 접시에 떡을 올리고 포크로 조금씩 먹다 보니 어느덧 바닥에 남은 팥고물만이 내가 떡을 먹었음을 알려준다.      

먹는 일에 인색해지고 싶은 요즘이다. 무언가를 먹고 나서의 기쁨보다는 불편함이 더 많다. 가능한 적게 먹으려고 마음먹는 중이다. 몸 안에 꽉 차지 않은 비어 있는 느낌이 오래 머물 때면 기분이 좋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욕도 살아난다. 얼마 동안 이걸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최대 과제다.     

     

음식이 앞에 놓여 있으면 종종 이성이 도망가 버린다. 마음이 가는 대로 가득 먹고 나서 후회한다. 그동안 몸에 익어버린 식습관이 절로 나타나서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 순간에도 이성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적정량을 먹을 수 있도록 나를 깨우쳐주었으면 한다. 시루떡 한 조각은 이런 의미에서 딱 좋은 포만감이다. 여러 가지를 차릴 필요가 없으니 번거롭지 않아서 좋고 적당히 온기를 품은 그것은 추운 날씨에 제격이다.     


내가 먹는 것과 입는 것은 가장 쉽게 지금의 나를 말해 주는 듯하다. “아무 생각 없이 먹었어”하고 말할 때가 많다. 이런 날은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버거워서 외면했거나 진정되지 않은 마음으로 음식에 달려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간이 흐른 후에 살펴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대부분은 스트레스다.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정서가 한 세트를 이룰 때 가장 많이 나타나는 행동이다.     


진심으로 맛있는 한 끼라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적극적으로 여러 음식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고 열심히 먹는 일이 당연한 듯하다. 이런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숟가락과 젓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는 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순간이 지금의 내 마음을 만나는 지점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천히 적당히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음이고, 먹고 또 먹고 쉼이 없다면 뭔가 불편한 것이 생겼다는 증거다.      


아이들의 방학은 주부의 일이 자연스럽게 많아진다. 진심으로 삼시세끼라는 단어가 현실로 해야 할 일이 된다. 몸이 힘들어질 때면 감정이 더 널뛰기를 한다. 밥상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겨울에 절제와 깨어있음의 적절한 균형이 꾸준히 이어졌으면 한다. 딱 시루떡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아직도 다른 먹을거리를 찾는다. 귤 하나를 까서 먹었다. 지금 멈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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