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구한말. 조선최고 권력자들이 넘나드는 '글로리 호텔' 여사장 쿠도 히나(김민정)는 아름답고, 현명하다. 자신의 여급을 괴롭히는 진상을 조근 조근하고 낮은 어투로 우아하게 물리친 후, 울고 있는 여급에게 했던 대사이다.
나 역시 울기보다는 물기를 택했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참 여리고 나약했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한 지 넉달이 넘어가던 때였다.
현재 나는 2대 1로 어쩌다 대치 상황에 놓여 있다. 말레이시안 슈퍼바이저 말리나 와 한국인 킴, 그리고 나.쓰레기 수거장 겸 시트 수거장안의 공기는 쾌쾌하고 냉랭했다.
나는 지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조금씩 차오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는 중이다. 자칫 조금이라도 눈을 깜빡인다면 바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말리나 와 킴은 2대 1로 나에게 쏘아붙였다. 킴은 영어로 말을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는지
"엄.. 지금부터는 한국어로 할게요" 라며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절대 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오른 눈물 때문에 앞은 흐려졌고 결국 뜨거운 것들이 양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눈물이 아니다. 억울함과 서러움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남들 앞에선 울지 않는 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리는 내지 않았다.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때 킴이 말했다.
"아니, 우리가 뭘 했다고 울어요?"
나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겨우 입을 뗐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으흑...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냐고 이러는 건 데에...? 으아앙...."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나는 통곡을 했다.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그들 앞에서 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꾹꾹 눌러 담아 겨우 참고 있었는데..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흘렀다.
킴과 말리나는 당황해했다.
마침 호텔 레스토랑 런치 스태프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주방 보조 셰프 토니와 칸이 우리를 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킴과 말리나는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그곳을 떠났다.
흐르는 눈물을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흘렀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락커룸으로 향했다. 락커룸은 주방을 지나가야 하는 구조에 있기 때문에 몇몇 주방 스태프들이 울며 지나가는 나를 보았다. 평상시 밝고 명랑했던 나였기에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좌우로 흔들고는 락커룸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는데 내내 서러움에 히끅 히끅 거렸다. 런치 스텝 마리아는 무슨 일이냐며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이스팩과 휴지를 챙겨 와 건네어주고는 살며시 나를 안아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녀의 따뜻한 위로를 뒤로 하고 호텔 밖을 나갔다.
날씨는 찢어질 듯 좋았지만 내 마음은 너덜너덜했다.
이렇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은 적은 살면서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트램 타는 것을 포기하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내리쬐는 때약볕 아래 공원 분수대에 앉아 나는 목놓아 울었다.
1시간을 울었는데도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너무 서러워서, 너무 억울해서, 너무 비참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눈물 콧물 바람으로 울고 있던 나에게 아까부터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호주인 젊은 애기 엄마가 다가왔다. 유모차엔 3살 배기 아이가 쎄근쎄근 자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애기 손수건을 하나 꺼내 내 손에 살며시 쥐어 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제가 옆에 있어 줄까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나를 살짝 안아 주었다. 그리곤 쭈글이고 앉아 내 손을 잡고는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어 보이고 떠났다. 그래도 신경이 쓰였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는 공원을 떠났다.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도 친절하고, 런치 스탭 마리아도 친절한데 킴과 그들은 나에게 왜 그토록 못되게 구는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일을 그렇게 못하는 걸까?
처음 한 시간은 내 안에서 잘못을 찾으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 또 다른 한 시간은 분노했다.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런 대우받을 만큼 그렇게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킴과 그들을 제외한 모든 호텔 식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항상 나에게 친절했고 농담도 주고받으며 그들과의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어딜 가나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러는 걸까? 지들은 뭐 처음부터 영어를 잘했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건데? 너무 화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써서 어딘가 가두어 놓고 묻고 싶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아무리 물어도 제대로 대답은 해 주지 않고 그저
"언니가 센스가 없고, 일을 못해서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공원에 앉아 있은지 3시간이 지났다.
눈물은 멈추었고 나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발밑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잡초들을 보고 결심했다.
"그래 나는 잡초야. 너네가 아무리 나를 밟아도 나는 끄떡도 없다고. 밟으면 밟을수록 더 질기게 자라는 나는 잡초야.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모조리 왕따 시켜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