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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Sep 18. 2015

그들만의 경기, 주피터 vs 베나벤트

스페인 바르셀로나, 캄프 무니시팔 라 버네다


스페인 6부 리그


말 그대로 행운이었다. 2006년 가을,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은 지금 생각해도 행운이라고 말 밖엔 다른 표현도 설명도 어렵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호나우지뉴의 새로운 축구화 발표를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부터도 그렇지만, 인천공항을 떠나 다시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힘든 여정 속에서도 기묘한 행운이 계속해서 따랐기 때문이다.


일단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을 향했던 비행기 안에서 훗날 한국을 넘어 세계를 감동으로 들썩이게 만든 '피겨요정' 김연아를 만났고, 17세 이하 축구 대표팀도 함께 했다. 그때 동행했던 現 SPOTV NEWS 김덕중 기자가 내게 "남사스럽게 싸인과 사진이 웬말이냐?"며 정신차리라고 말해 김연아 선수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던 것이 아직도 못내 아쉬울 따름. 그 친구는 여전히 술자리에서 나에게 당시 일로 구박을 듣곤 한다.


그뿐 아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호나우지뉴의 화려한 축구화 발표회를 목도했을 뿐 아니라 FC 바르셀로나의 훈련 모습, 샤비 에르난데스의 인터뷰 등을 직접 경험했다. 하물며 빠에야를 먹기 위해 들어간 바르셀로나의 한 식당에서까지 우연찮게 에드미우손을 만나 즉석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건 정말 행운의 연속 아닌가?


당시 호나우지뉴의 새 축구화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행운이 계속 강조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같이 갔던 카메라 감독님 소개로 '최광재'라는 젊은 선수를 만난 덕에, 그를 통해 당시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2부리그(스페인 6부리그) 경기인 CE 주피터와 FC 베나벤트의 경기를 직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이름, 최광재


나는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를 통해 축구 기자와 해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커라인'이라는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라 리가 필진 활동을 하다가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엑스포츠'에서 라 리가 경기를 해설하면서 축구 해설가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 따라서 나 역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축구 전문가로서의 첫 걸음을 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후 마드리드 더비를 마드리드에서, 아시아 투어를 온 바르셀로나의 경기들을 베이징과 후쿠오카, 홍콩 등을 따라다니며 직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본 CE 주피터와 FC 베나벤트의 경기 만큼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진 못했다. 사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직관'이란 주제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땐 마드리드 더비를 소재로 잡고 PC 앞에 앉아 있었다. 


헌데 딱 한 경기를 고르자면 기억 속에 더 강렬히 남아 있는 걸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이내 주피터와 베나벤트의 경기로 바꿨다. 아니, 어쩌면 경기 자체보다 멀고 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가는 한국인 '최광재'라는 청년에게 받은 인상이 그 어떤 스타 플레이어에게 받은 인상보다 강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최광재


9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 최광재라는 친구가 축구를 계속하고 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그는 적어도 필자의 눈에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의 반대로 축구 선수로서의 생활을 접고 학업에 전념했지만 축구 선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해 스페인으로 축구 유학을 온 상황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명문대인 고려대 사회체육학과에 진학한 후, 바로 휴학을 하고 바르셀로나에 왔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유학 생활 중의 노력 또한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의 일과를 살펴보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는 오전에 스페인어 공부를 한 후, 마르셀 축구재단에서 축구 교육을 받았다. 마르셀 축구재단은 RCD 에스파뇰 유스팀과 연계되어 운영되는 축구 학원인데, 현재 카메룬 대표팀과 말라가에서 활약하는 카메니 골키퍼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 그리고 오후와 밤에는 주피터 팀에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그는 좋게 말하면 '진흙 속의 진주'였고, 냉정히 보면 그저 한국의 고등학교 선수 수준의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테세이라 리가(4부 리그)나 세군다B(3부 리그)가 아닌 세군다 리가(2부 리그)나 프리메라 리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고, 언제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나를 주피터와 베나벤트의 경기가 펼쳐지는 경기장으로 이끌었다.

당시 걸었던 바르셀로나의 뒷골목



조기축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뜨거운


최광재가 뛰었던 주피터를 검색해보니 지금은 4부 리그인 테세이라 리가까지 진출한 모습이지만, 당시 주피터는 카탈루냐 지역 2부리그 소속이었다. 즉, 주피터와 베나벤트의 대결은 스페인 6부 리그에 속하는 경기였고,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조기 축구와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장비 욕심 강한 아저씨들이 다들 화려하게 갖춰 입고 뛰는 우리의 조기 축구와 비교하면, 솔직히 그보다도 못한 첫인상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유니폼조차 제대로 구비되지 않아서 조끼로 팀을 구분해 경기를 뛰는 모습이었으니까.


벤치에는 2-30명의 선수가 앉아 있었고, 감독은 되도록 많은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를 주고자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선수들 대다수는 소위 어린 시절에 볼 좀 차본 축구 클럽 유스 출신들과 축구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민자들, 축구가 취미인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었다. 데이트가 있거나 학교 시험 또는 야근을 하는 선수들은 당연히 경기장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고, 경기에 뛰던 선수도 감독에게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 교체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흔한 동네축구스런 광경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나와 카메라 감독의 등장,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카메라의 등장이 주피터와 베나벤트의 경기를 뜨겁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최광재를 취재하려는 목적을 설명하자 주피터의 감독은 최광재를 선발 출전시켰고, 주피터의 다른 선수들도 카메라가 자신들을 향해 움직이자 더욱 분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일부 선수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한국에서 선수로 뛰고 싶다고 자기 소개를 할 정도였다. 경기장 위의 선수들은 모두 열정을 불태웠고, 작은 몸싸움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승리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물론 이날의 경기가 엘 클라시코나 마드리드 더비처럼 화려하거나 비장했다고 표현한다면 과장이다. 살짝 지루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결과보다 과정을, 안주보다 도전을, 실력보다 노력을 보기 위해선 세계 최고 수준의 라 리가 경기를 관전하는 일 만큼이나 스페인 축구의 기반이 되는 밑단에서 그런 문화를 지탱하는 경기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캄프 누 투어도 다녀왔다


만약 당신이 엘 클라시코나 마드리드 더비, 또는 안달루시아 더비처럼 라 리가를 대표하는 경기를 보기 위해 스페인을 방문한다면 주중에 펼쳐지는 6부 리그의 경기도 꼭 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 속에는 당시 최광재의 이야기처럼, 혹은 최근 국내에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청춘FC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진정성이 담긴 축구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펼쳐지고 있을테니까.


2006년 저와 인터뷰하고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선수를 꿈꿨던 최광재군이 혹시 이 글을 본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주길 바랍니다. 짧은 만남이었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와 다시 스페인 축구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cornerk@naver.com



글·사진 - 송영주 (SPOTV 축구해설위원)

타이틀 사진 - FCF 공식 홈페이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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