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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Dec 01. 2021

무주의 맹시

개심사의 가을 연못


  이 사진을 찍은 것이 2007년 11월 초.

  그러니까 카메라를 구입한 지 겨우 한 달 남짓 지났을 때이다. 새로운 장난감(?)을 하나 마련해 놓고 틈만 나면 어디든 나가 사진을 찍던 그야말로 초보일 때였다. 멋진 풍경은 그저 피사체에 불과하고 실험 대상일 뿐인 시기이다. 그저 어떻게 하면 더 좋고 쨍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던 때이다. 조리개 값과 셔터스피드 계산에 머리 아파하고 M모드로 사진 찍는 연습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했다.


  'Inattentional blindness 무주의 맹시'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인간의 주의력과 관련해 실행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어느 것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날도 서산 개심사(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사찰이다. 아마 나중에 이 절에 대한 얘기를 또 하게 되지 싶다.)로 카메라를 들쳐 메고 신나게 길을 나섰고 개심사 입구의 세심동(洗心洞) 표지석부터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결과물을 확인하며 저 사진의 저 연못까지 갔다. 계속 그랬듯이 이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구도를 잡기 위해 여러 번 나의 위치를 조정하고, 줌을 당겨보기도 밀어보기도 했으며, 아웃포커싱을 해보겠다며 M모드로 놓고 조리개도 조정해 보고, 셔터스피드와 화이트밸런스 등을 바꿔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의 풍경을 피사체로 삼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가며 그 결과물을 비교했고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차례의 실험(?)을 계속했다. 그 끝에 저 사진을 얻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노오랗게 단풍이 든 예쁜 풍경을 잘 담았다는 뿌듯함에 무척 만족스러워 했다. 어느 정도 사진 촬영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돌아와서는 여러 장의 사진들 중에 저 사진을 골라 따로 저장해 두고 나중에 보정작업까지 잘 배워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저 사진을 다시 꺼내어 보았다. 사진의 메타정보는 대략 무시해도 될 만큼 여유가 생긴 뒤였다. 큰 모니터 화면에 사진을 띄워 놓고 찬찬히 사진을 들여다 보다가...


  뒤늦게서야 알았다. 노란색 단풍나무~! 가을 단풍이 저렇게까지 노오란색이면 그저 은행나무이려니 했는데... 단풍나무였다. 이파리의 모양이 틀림없는 단풍나무 잎이었던 것이었다. 사진을 찍을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일이다. 아마 그때 알았더라면 이미 그때 신기해하며 놀랐을 텐데, 그때는 그저 카메라에만 정신이 팔려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뒤늦게 우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스스로에게 참 어이없어 했다.


   평소에도 멀티가 잘 안된다고 핀잔을 듣는 편인데 스스로 이런 것을 발견해내지 못함이 참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눈으로 다 보았을텐데 머리로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는 그런 상태라는 생각이 확 다가왔다. 그러니 어디 가서 "내가 다 봤는데..."하면서 함부로 말을 시작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나의 머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나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할 뿐 세상은 저 스스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을 넓게 열어야 하는 것이다.


  개심사(開心寺)에는 노오랗게 물드는 단풍나무가 있다. 

  무심히 들여다보고 은행잎이려니 하지 말 것! 

  마음을 열어[開心] 찬찬히 들여다보면 무심히 제 몫을 하던 것들이 비로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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