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커피에 미친것도 아니고 안 미친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다사다난. 이라고 간단하게 말하기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길목에서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건, 또한, 나를 더 아프게 했던 것도 커피였다.
사오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될 것 같다. 친정 부모님과 합가 한 지 사 년쯤 되었을 때, 내 엄마는 오래 전의 뇌종양 수술 때문이었는지 점점 더 이기적인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고전에나 나올법한 출가한 그렇지만, 부모님을 모시는 딸자식의 역할을 부지불식간에 강요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합가를 하면서부터 회사일이 바쁘다고 주말에도 집에 있는 날이 드물었고, 아이의 수술 이후로는 나에게 짜증을 넘어서 하루도 흠을 잡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중1 때 큰 수술을 받고서 평생 환자가 되어버린 아이는 몸이 아파서, 대학병원 응급실과 진료실, 검사실을 들락날락하느라 학교를 못 가는 날이 더 많았고, 여기에 아이의 절망과 분노, 사춘기가 더해져 어떤 날에는 나에게 물건을 던지며 욕을 하곤 했었다.
그 누구 하나 아니, 나 조차도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나는 마음의 병을 얻었고, 불면의 밤을 보내던 어느 날에는 새벽 두세 시에 베린다로 나가 저 밑을 쳐다보며,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면 이 고통이 끝나는데..되네이며, 결국엔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고 울곤 했었다.
아이 병수발 하느라 몇 년을 흘려보내고 나니, 이제 아이가 학교도 거의 매일 다닐 수 있게 회복이 되어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나는 그제서야 거울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내 얼굴이 이랬구나.. 누가 와서 툭 건들기만 해도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은 표정. 온갖 불행이 얼굴에 드러나서 그 불행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을까 봐 아무도 내 곁에 오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나보고 죽지 말고 살으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딸아이 친구엄마가 말해주길, 고용지원센터에서 내일 배움 카드를 발급받으면 여러 가지 교육을 정부 지원을 받아 저렴하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뭐라도 배우면 이 징글징글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교육 과목을 선택할 때 집에서 교육장소가 가까우면서, 꼭 배워야 할 것과 배워보고 싶은 것을 골랐다. 컴퓨터 오피스 프로그램과 바리스타 과정이었다.
1. 바리스타가 뭔데? 스페셜티 커피가 뭔데?
1)바리스타 수업
바리스타 수업을 등록하면서, 내가 매일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내려주는 사람을 바리스타라고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교육생들을 살펴보니 수수하게 차려입은 전업주부들과 그래도 좀 더 치장을 한 직장인들, 그리고 대학생 두 명이 있었다. 20대라 그런지 생기 있고, 싱그럽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그 젊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 두 명이서 반장, 부반장이 되어 단톡방을 만들고, 선생님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알고 보니 우리 옆동네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계셨다.
수업 내용은 커피의 유래, 스페셜티커피란 무엇인가, 에스프레쏘 추출방법과 맛보기, 간단한 라떼아트 만들기였다.
그 선생님이 갖고 오는 원두는 커피맛이 참 좋았다. 동네에서 마시던 커피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맛이었다. SCA(specialty coffee association) 기준에 따라 80점 이상의 커피를 스페셜티 커피라고 한다. 동네에 서너 개씩 있는 스타**가 80점 미만의 commercial coffee를 쓴다고 한다. 내가 이제까지 원두 사느라 스타**에 갖다 준 돈이 얼마인데 뭐지? 싶었다. 그 특유의 탄맛이 생두의 모자람을 가리기 위해 로스팅을 강하게 하기 때문이라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하나 싶었다.
생두가 프로세싱되는 과정이나 원두에서 커피가 추출되는 원리가 내가 좋아하고 전공했던 과학이 베이스에 깔려 있어서 무척이나 재미있고 즐거웠다.
2)그날의 기억
어느 날 에스프레쏘 추출 시간에 따른 맛을 보면서 그 차이를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그날은 여름비가 와서 더 그랬을까...? 나는 교육생들 틈에서 줄을 서서, 돌아가면서 추출을 하고 맛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수업 중반쯤에 내가 내린 에스프레쏘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실 때였다. 커피 향이 입안에서 폭발하면서 목줄기를 뜨겁게 타고 내려가 명치끝에 닿으면서 찌릿하더니, 거기서부터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강열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커피 동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다급하게 "이것 좀 마셔보라고. 커피가 온몸에 퍼져나가는 느낌이 든다고."하면서 커피를 권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뭐 그냥 그런데?"였다.
그날 나는 커피에 꽂히게 되었다. 나는 이거를 파야겠다. 이거 너무 재미있겠다. 왜 이제서야 이거를 알게 되었을까. 빨리 공부해야겠다. 나는 갑자기 삶의 의욕이 넘쳐났다.
3) 닥치는 대로 읽었다.
Yes24 어플을 다운 받고, 커피 관련 책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두둑한 가방을 메고 스타벅스로 매일 출근을 했다. 제일 먼저 산 책은 James Hoffmann의 The world atlas of coffee였다. 그때 이 책을 국내에서는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서 미국에 있는 언니에게 보내달라고 했었다. 한 권을 읽고 나면 어느새 또 다른 책을 주문하고 있었다. 택배가 자주 오고 책장에 책이 쌓이는 것이 못마땅했던 남편은 어느 날 상기된 표정으로 허릿춤에 양손을 얹은 폼으로, 너 이거 다 읽은 거냐고., 책을 사지 말고 빌려보라고. 했다. 그때 내가 남편에게서 읽은 감정은 위기감이었다. 진짜 그랬던지 안 그랬던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그의 감정은 딱 그거였다.
어쨌거나 나는 하루가 다르게 몸에 피가 돌고, 쳐진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읽지 못한 책들을 여한 없이 읽는 이 시간이 너무나 뿌듯했다. 커피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머릿속은 상상의 날갯짓을 하면서 나는 구름 위에 붕 뜬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망상이거나 도파민 중독이 아니었나 싶다.
그게 무엇이었든지 간에 나를 다시 살게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뭐.
2. 세미나를 따라다니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었다. coffee_artery. 아 손이 오그라드는 이 느낌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날의 기억에 따라 저런 계정 이름을 만들었었다. 인스타그램에 커피 관련 일을 한다고 보이면 일단 팔로잉을 하고 봤다.
그러던 어느 날 생두를 발효하는 프로세싱에 대한 세미나가 부산에서 열린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고,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어떤 화학작용을 거치게 되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무작정 부산행 기차표를 끊었다.
스무 살에 남편을 만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팔 년을 연애하고 결혼을 하게 된 나의 정신연령은 남편을 만난 이십 대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출산과 함께 주부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의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하면서 살았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려고 해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게 버거워서, 남편이 꼭 데려다줘야 했었다. 또 나의 극소심함과 과도한 수줍음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스트레쓰가 되어, 아이들 엄마 무리에 섞이는 게 힘들었었다.
이런 내가 혼자서 부산을 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부산행 표를 끊었다고 하니 남편이 자기도 같이 가겠다면서 표를 한 장 더 사라고 하면서 따라나섰다. 함께 해온 날들이 내 생의 1/2이상인데, 딱 보기에도 내가 너무 이상해 보였고, 아마도 의심스럽기까지 했던 것 같다.
세미나 장소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커피학원이었다. 연사는 대학교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슬라이드에는 중남미에서 생산한 생두를 발효시키는 프로세싱의 원리, 장치, 실험조건 등등이 담겨있었다. 세미나 말미에 나는 그동안에 궁금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는데, 너무 질문을 많이 해서인지 그날 동석한 젊은 친구들의 분위기가 싸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서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커핑을 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원두를 일정한 굵기로 그라인딩 해서 커핑볼에 담고, 92도의 뜨거운 물을 부어 4분 동안 커피를 우려낸 뒤 볼 위에 뜬 커피입자들을 걷어내면서 일차로 향을 맡고, 8분 때부터 커핑스푼으로 한 스푼씩 맛을 보면서 구체적인 맛과 향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에 따라서 뭔가 맛이 변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이거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도 몰라서 당황스러웠고 위축이 되었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한 젊은 여학생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쥤다. 내가 알아들었든 못 알아들었든 간에 이렇게 말이라도 주고받으니 나의 불편한 마음이 조금은 덜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며칠쯤 지났을 때 그 교수님의 피드를 보니, 피드 사진에 흑빛의 얼굴에 아줌마 패션을 하고 있는 내가 있었고, 멀리 경기도에서 와주신 분도 감사하다고 쓰여 있었다. 내가 인상적이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반가웠다고 댓글을 달고 맞팔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서울에 있는 월간커피에서 종종 듣고 싶은 세미나를 골라서 수강 신청을 하고, 서툰 운전을 하면서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카페쇼는 물론이고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월드 리더스 포럼의 각종 세미나도 참석했었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은 점점 더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3. 첫 번째 커핑수업
모닝루틴으로 스타벅스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쉬는 시간에는 인스타그램을 뒤지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오전 시간은 아이 학교에 픽업을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내 시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릳츠에서 커핑수업을 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수업료는 백만 원. 전업주부에게는 꽤 큰 금액이었다. 그래도 내 아빠가 다달이 돈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게 있어서 교육비를 충당할 수 있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십만 원도 큰돈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불행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내 얼굴이 너무 싫어서, 압구정의 유명한 의느님을 소개받아 타고난 쌍꺼풀을 고치고 눈매교정도 받고, 유튜브 튜토리얼 메이크업과 스타일 채널을 보면서 내 스타일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있었다. 아직 능숙하지 않았던 화장법은 점점 더 진한 화장을 하게 만들었고, 정해지지 않았던 스타일로 인해 옷과 쥬얼리를 계속 사들이게 만들었다. 내가 이것도 못 사냐?! 이런 마음으로 말이다. 내 외모에 집중하는 이 시간과 소비가 즐거웠고, 이러한 시간들이 쌓이면서 길을 걸을 때 땅만 쳐다보고 걸을 정도로 바닥을 쳤던 내 자존감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첫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눈빛이 이글이글 반짝이는 여자분이셨다. 아직 부기가 덜 빠진 쌍꺼풀에 진한 화장과 향수 냄새를 풍기는 내 정체가 의심스러웠는지 나눠준 수업 자료에 나오는 영어 단어들을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요오드가 영어로 뭐예요? "
"Iodine(아이오다인)."
"거기 냄새가 뭐라고 쓰여 있어요? "
"Odor(아더)."
그럴 정도로 내 외모는 눈에 뜨이게 되었다.
커핑수업은 주로 네 개의 샘플을 커핑볼에 준비해서 진행이 되었다. 어느 날은 그라인딩 된 원두 냄새를 맡아봤는데, 샘플 배열이 일 번, 삼 번이 유사하나 일 번이 약, 삼 번이 강이었고, 이번, 사 번이 유사하나 이번이 약, 사 번이 강이었던 날이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선생님이 일부러 그렇게 배치를 하셨다고 했다. 또 어떤 날은 네 번째 샘플이 고약한 강한 향이 나서, 이거 로브스타예요? 물었더니 맞다고 하시면서 좋아하셨다. 젊은 커피 전문가 선생님에게서 예쁨을 받으면서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일요일 아침이 되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었다.
커피맛을 표현하는 방식과 단어들은 마치 외국어를 처음 배울 때와 같았다. 꽃향, 산미, 단맛, 초콜릿맛, 견과류, 곡류, 허브 등을 구분하고, 꽃향은 쟈스민, 아카시아 등으로, 산미는 또 레몬, 씨트릭, 오렌지, 애플, 피치, 그레이프 등등으로, 단맛은 슈가, 브라운슈가, 허니, 메이플 시럽 등으로..바디감과 질감까지 표현을 해야 하니 복잡할 뿐만 아니라, 빠른 시간에 그 맛과 향을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 수업이 몹시 재미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핑으로 맛을 구분하는 게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될 줄은 모르는 체로 말이다.
4. 스승님을 만나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싶어서 인스타 팔로잉을 하는 분 중에 그래도 안면이 있는 분께 선생님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나의 구구절절한 장문의 디엠에 그분이 추천해 주신 분은 A 바리스타였다.
피드를 살펴보니 프로필에 다양한 커피 분야에 챔피언 타이틀을 갖고 있는 분이셨다. 사진을 보니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팔에는 타투가 많이 있는 듯 보였다. 디엠으로 내 소개를 하고 수업신청을 하고 싶다고 보내자, 외모와는 다른 느낌의 담백하고 진지한 답문자가 왔다. 백 프로 맞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글이 그 사람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짧은 답글을 보고도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 첫 만남
이런저런 수업을 A 선생님께 들었던 나의 기억은 지금 뒤죽박죽이지만, 2020. 12월 초중반에서 시작해서 다음 해 1월에 첫 수업을 마친 것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나를 포함한 교육생 네 명의 얼굴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첫날 운전도 서툴고 연희동까지 가는 길이 초행길이라, 나는 수업에 늦을까 봐 조바심을 내며 조심스럽게 정체구간을 벗어나고 있었다.
선생님의 매장과 교육장이 있는 연희로 **번지에 도착했을 때, 그렇잖아도 좁은 주차 공간에 어떤 차가 어정쩡하게 정차를 해놓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가 연결이 안 되니 바로 보이스톡을 눌러서, 상황이 이러하여 주차가 어려운데 좀 내려와서 봐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그 앞의 차는 건물주의 차로 바로 나갈 것이니 조금만 기다렸다가 주차를 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조마조마하게 차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차주인과 거의 동시에 선생님이 나타났다. 내차를 뒤로 빼서 앞차가 나갈 수 있게 공간을 만들어 준 후, 각도를 맞추기 어려운 공간에 차를 대야만 했다. 처음 보는 선생님의 수신호에 맞춰 온 힘을 다해서 핸들을 돌렸다가 풀었다가를 몇 번 반복해서 겨우 주차를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상기된 얼굴로 차에서 내렸는데, 핸드폰을 두고 내려서 다시 차에 올라탔다가 내렸다. 아차! 이번에는 차 열쇠를 두고 내린 게 생각나서 다시 차에 탔다가 내렸다. 아 그런데 이제까지 시동을 안 끄고 오르락내리락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온몸에 땀이 삐질삐질 나면서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마지막으로 차에 다시 들어가 시동을 끄고 나온 나는 차 열쇠와 핸드폰을 양손에 꼭 쥐고, 겸연쩍은 미소도 짓지 못한 채 황급하게 계단을 올라 교육장으로 향했다. 그때 선생님의 입가에 조금이라도 웃음기가 퍼져있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창피하고 민망했었다.
2) 학구열에 불을 붙이다.
브루잉 수업은 한 번에 세 시간씩 한 달에 네 번인 과정이었고, 과정이 끝나면 실기와 필기시험을 통해 SCA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교육으로 잔뼈가 굵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게 속사포처럼 방출하는 방대한 지식과 경험에 놀라워하면서, 나는 다시 중고등학생이 된 것처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초집중을 하게 되어 금세 집에 갈 시간이 되곤 했다.
속도감 있게 풀어내는 설명과 간간이 섞여 나오는 유머가 수려한 외모에 더해져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한겨울에 꽉 막힌 상습 정체구역을 통과해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하고 가도 피곤하지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게 되었다.
나는 어둡고 긴 터널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수업료는 결코 싸지 않았다. 그래서 브루잉 한 과목만 듣고 그만 들으려고 했었다. 마지막 시간에 선생님이 다음 과정에서 수업할 물의 종류에 따른 커피추출, 다양한 추출 변수 조절에 따른 커피추출의 변화 등등을 설명하는데, 눈이 번쩍 뜨이면서 저것도 듣고 싶다. 는 강한 욕망이 생겼다. 그렇게 연속해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몇 달을 띄엄띄엄 건너뛰면서 센서리 수업과 에스프레쏘 추출, 로스팅 수업까지 듣게 되면서 2년이라는 시간이 금방 흘러버리게 되었다.
3) 마지막 센서리 수업
작년에 영어강사라는 직업을 주 5일 수행하면서,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커피에 대한 그동안의 나의 시간과 노력들을 떠올리며, 이렇게는 그냥 끝나게 놔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여름방학 직전에 센서리 고급반 수업을 신청해서 듣게 되었다. 다시 한번 몰입의 순간을 기대하면서 조심스럽게 교육장 문을 열자, 반가운 선생님 옆으로 종종 커피 행사 때 마주쳤던 C가 와 있었다. C는 나와 동갑으로 화학을 전공했고, 나처럼 방과 후 강사로 학교에서 과학강사를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마주쳤을 때 A선생님 수업을 적극 추천했었는데, 이번에 수업을 같이 듣게 된 것이었다.
센서리 수업은 커핑을 통해 맛과 향에 대한 감각을 훈련하는 과정이다. 작년에는 초중급반 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올해는 고급반을 신청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의도치 않게 나는 자격증 콜렉터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수업날이었던가.. 여러 가지 원두로 커핑을 하고 수강생 네 명이서 돌아가면서 선생님과 함께 다양한 표현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플레이버 휠(flavor wheel)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아도 뿌연 비닐이 위에 덮여있는 것처럼, 선뜻 정확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나와 비교해서 여기저기 커핑 하러 바쁘게 돌아다니는 C는 참 쉽게도 커피맛에 대한 표현을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눈에 힘을 주고, 꾹꾹 한마디 한마디 눌러 야단을 치셨다.
"**씨! 다른 친구들은 커핑 다니면서 실력이 늘고 있는데, **씨는 작년하고 똑같다!"라고.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저려오면서 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숨을 참으며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이 수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나 자신이 바로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커피를 배우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에 더 가슴이 메어왔다.
십여분 남은 시간 동안 울컥거림은 계속되었고,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겨우 운전을 하고 집 앞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선생님께
수업 들으면서 저도 느끼고 있던 점인데..
고심 끝에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약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길..
가르치고 배우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이렇게 정곡을 찔려 혼쭐이 나고 나니 정신이 퍼뜩 들기도 했고, 나를 정말 아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5.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늘 창업을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식음료 업계에서의 경험이 없었기에 또, 망하고 싶지 않아서, 바리스타 경험을 쌓아보려고 여기저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뒤지고 다녔었다. 이력서도 내어보고, 구인공고를 낸 매장 주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나의 열정을 어필해 보기도 했었다.
이제 티브이 아니, 테레비에 나오는 연예인 중에 나 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백일섭 아저씨나 이순재 아저씨 같은 사람들 밖에 없어서일까.. 돌아오는 답변은 이미 알바를 구했다. 용기 내주셔서 고맙다, 매장에 한번 놀러 오시라. 는 것뿐이었다. 어떨 때는 이런 내가 한없이 미련해 보인다. 당연하지. 경험은 둘째치고 누가 주인보다 나이 많은 알바를 쓰려고 하겠냐.
자고 일어나면 생기는 카페들이 한 건물에 서너 개씩 있는걸
찾기가 어렵지가 않다.
삼 년 안에 망하는 카페가 아니, 일 년을 버티기도 어렵다고 한다잖아.
로스팅까지 하는 카페를 열면 잡무가 너무 많아져서 몇 배는 더 힘들 거야. 그리고 내가 로스팅한 거를 누가 사가겠어. 아마 내가 다 먹어야 될 거야.
창업하면 일인 감옥에 자기가 문 닫고 들어가는 거라잖아.
그 유명한 커피 회사들 빚이 몇억 아니 몇십억이래.
나는 계속 안 해야 되는 이유를 찾아 리스트를 만들면서, 리스트를 방패 삼아 안전지대로 들어가 안온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커피를 즐기는 홈바리스타도 나쁘지 않아.
평가받는 것보다 평가하는 게 더 쉽고 상처도 덜 받아.
이제 너 살만하잖아. 이만큼 했으면 됐어. 등등
그러나 뼈에 각인된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활활 타올랐던 불꽃은 뭉근한 불씨가 되어 언젠가는 다시 타오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하나는 갖고 살자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