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알>이나 <꼬꼬무>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놀랄 때가 많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범인들을 어떻게든 잡아내는 경찰의 수사력 때문이다. 갓한민국 치안의 위엄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2019년 기준 강력범죄 검거율은 77%를 넘어선다. 그중 살인사건은 무려 100%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CCTV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사회 곳곳에 CCTV 설치가 확대되면서 범죄 검거율도 급증했다. 2014년에서 2019년 사이에만 CCTV를 활용한 범죄 검거 건수가 4배 늘었다고 한다. <그알>이나 <꼬꼬무>에서 다루는 옛날 미제사건의 단골 레퍼토리도 “그때는 CCTV가 없어서…”이다.
그런데 2000년대 초만 해도 CCTV 설치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권력이 시민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수단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좌파 인문학자들이 이러한 비판에 앞장섰다. 마침 일상의 파시즘, 미시 권력 같은 신좌파 담론이 각광받던 시대이기도 했다. 조지 오웰의 『1984』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그때 곧잘 인용되던 텍스트였다. 빅브라더가 우리를 감시 사회라는 디스토피아로 몰아넣을 거라는 공포는 그만큼 현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CCTV를 줄여야 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권력의 감시에 대한 우려가 사라져서가 아니다. 빅브라더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데도 CCTV를 줄일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CCTV로 얻는 기술적 혜택, 즉 범죄 예방과 범인 검거 효과가 넘사벽이기 때문이다. 이걸 포기하고 그 이전의 <살인의 추억>과 <범죄와의 전쟁>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CCTV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실 과학기술의 발전이란 게 원래 그렇다. 인류의 진보를 이끈 혁신적 기술은 대부분 양면성을 갖는다. 100% 순효과만 있는 기술이란 없다. 멀리는 원자력부터 가까이는 유전자 가위까지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 기술 개발에 수정과 변용은 필수다. 하지만 개발 자체를 중단하거나, 개발 이전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이미 기술이 주는 혜택을 알아버린 인간이 그걸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한번 써본 사람이 벽돌폰을 다시 쓸 수 있겠는가? 인간의 그 욕망이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원동력 중 하나였다. 19세기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법칙을 이론화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적 확신은 계급 투쟁보다는 기술 개발에 더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과학기술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좌파 성향, 인문학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과학기술에 ‘인문학적 성찰’, 나아가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며, 인간의 운명을 기술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이러한 철학적 조류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우생학, 홀로코스트, 핵폭탄으로 얼룩졌던 그 인류 최악의 전쟁은 과학기술, 더 나아가 인간 이성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60~70년대 불어닥친 신좌파, 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유행은 그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오늘날의 인문학적 성찰론자들도 크게 보아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1세기 인공지능의 시대에 1970년대를 풍미했던 미셸 푸코(통치성), 위르겐 하버마스(도구적 합리성 비판) 등이 여전히 거론되는 이유다.
조지 오웰(왼쪽)과 미셸 푸코(오른쪽)는 21세기 과학기술을 성찰하는 담론에도 여전히 소환되는 20세기 인문학자들이다.
문제는 인문학이 뭘 어쩌기에는 현대 과학기술이 한참 앞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을 ‘성찰’하고 ‘통제’하려면 일단 그것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예컨대 원자력에 제동을 걸려면 핵물리학을, 유전자 편집의 윤리성을 문제 삼으려면 분자생물학을, 인공지능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려면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조건에 부합하는 인문학자가 얼마나 될까? 해당 분야에 치밀한 이해와 근거가 없는 성찰은 성찰이 아니라 “내가 보니까 그렇더라”라는 식의 인상비평에 불과할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공지능 전문가 @최재운 작가님에 의하면 좌파 철학자들의 요란한 성찰에 엔지니어들은 1도 신경 안 쓰는 분위기라고 한다. 업계에서는 인문학자들보다는 일론 머스크나 샘 알트먼의 목소리가 더 클 수밖에 없다며. 당연하다 싶지만 웃프기도 하다. 사실 이런 상황은 이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론물리학의 석학이자 197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는 과학철학자들을 싫어한 걸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과학 이론이 사회문화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 사회구성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건 시대를 초월한 진리의 발견이라는 과학의 기본 임무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와인버그는 철학이 때로는 과학에 방해가 된다고까지 했다. 1970년대 철학 이론에 근거해 21세기 과학기술을 성찰하려는 인문학자들도 와인버그가 비판했던 사회구성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인문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과학과 교류하며 사회의 지적 기반을 든든히 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어설픈 도덕적 우월의식을 앞세워 과학을 지도하거나 간섭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요즘 강조되는 통섭과 융합은 다른 학문을 입맛대로 주무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통섭과 융합의 시대일수록 다양한 학문의 특징과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과 인문학은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궁구하는 기초학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인문학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예측하거나 비전을 제시하는 학문은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 연구는 어떤 현상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고 역사적 조건이 무르익은 뒤에야 시작된다. 그래서 G.W.F. 헤겔은 이렇게 갈파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