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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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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Nov 24. 2020

이사 간 후 매일 시계만 쳐다본다.

오늘은 어떻게 칼퇴근 하지?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엉덩이는 벌써 들썩거린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산더미 같은 일이 오늘따라 왜 이리 미운 걸까. '그냥 가. 내일 하면 되지.', '무슨 소리야. 오늘 안 하면 내일 어떻게 감당할래?' 천사와 악마의 속삭임이 번갈아 귓가에 울린다. 분주한 머릿속과 달리 이미 손은 서류 뭉치를 하나둘 서랍 속에 넣고 있었다.


남아서 일할 팀원에게 죄스런 마음으로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앞 만 보고 나왔다. 어라 발에 모터라도 생긴 걸까. 1시간이 넘는 퇴근 거리를 50분 만에 달려왔다. 집에 도착해서 녹색 현관문을 열면 세련된 중문이 마중 나온다. 집안은 마치 겨울 왕국에 온 것처럼 곳곳이 새하얗다. 동그란 LED 등은 북두칠성 모양으로 집안을 환히 비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어 말끔하다. 집에 오는 기쁨이 큰 걸 이제야 알겠다.

비단 집에 모습 때문 만은 아니다. 10년 넘는 처가살이 동안 나만의 공간이 없었다. 가끔은 혼자 책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저녁 시간, 식구들 모두 TV 보는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크게 한 숨을 내쉬곤 했다. 밖에서는 시끄러운 TV 소리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달처럼 차올랐다. 1시간 남짓 되었을까. 침범할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방은 점점 더 비좁았다. 그나마 장인, 장모님이 이사를 가서 나와 첫째, 아내와 둘째가 같은 방을 썼다. 첫째가 고학년이 된 순간부터 더는 함께 생활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이도 본인 만의 숨 쉴 공간이 필요했다.  이사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아이들 방을 꾸미는 것이었다.  이사 가기 싫다고 툴툴대던 둘째는 "아빠 방이 생겨서 너무 좋아."라며 수시로 사랑스런 반달눈을 짓는다. 둘째 책상은 이케아에서 구입해서 놀러온 처남과 직접 만들어 주었다. 손의 얼얼한 통증도 아이의 행복한 미소 속으로 사라졌다.

늘 나만의 서재를 꿈꿨다. 부족한 책장 때문에 책은 이쪽, 저쪽에 어지럽게 쌓여갔다. 아내와 나는 거실엔 무조건 큰 책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책장이 들어서고, 아내는 "위에 네 칸은 오빠가 써."라며 통 큰 인심을 보였다. 두 칸, 세 칸도 아니도 무려 네 칸씩이나. 혹여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책을 꽂았다. 그간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구입한 책이 한가득 했다. 드디어 책장이 완성되었다. 나름 주제도 있다. 맨 왼칸부터 에세이, 현대소설, 고전소설, 기타 등등이다.

이제 마음껏 골라 볼 수 있는 곳이 생겼다. 책이 더 생긴다면 슬쩍 옆에 공간까지 넘 볼 예정이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

정리로 줄을 세우면 맨 뒷에 서야 할 아내와 나는 치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틈 날 때마다 정리하니 갑자기 누가 오더라도 걱정이 없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말엔 작정하고 문틈에 낀 먼지까지 제거했다. 일부러 수납공간을 많이 만들었다. 전에 살 때는 밖으로 너저분하게 나와 있었다. 아무리 치워도 한계가 있었다. 정리의 기본은 물건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라는 말을 몸소 체험 중이다. 둘째는 정리 함에 깜찍한 이름도 지어주었다.

이제는 첫째 발길질에 얻어맞으며 쪽잠을 잘 필요도 없다. 한창 성장기라 앞, 뒤, 좌, 우 가릴 것 없이 이동하는 탓에 수시로 잠이 깼다. 더구나 푹신한 뱃살을 배게로 오인하고 무거운 머리를 대는 바람에 가위에 눌린 적도 있었다. 아내와는 오랜 각방 생활로 조금씩 틈이 생겼다. 이제는 자기 전에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전에는 새로 구입할 물건을 생각하느라 이야기가 길어졌다. 맙소사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다음 날 피곤했지만, 이런 시간이 고팠다. 자기 전에 홀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와 아이들은 신선놀음한다고 놀려댔다. 그래 이제 여한이 없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 속에서 문장의 향연을 원 껏 맛보리라.


주말엔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와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이사를 준비하며 아내와 대화가 늘었다. 늘 아이들 이야기만 했던 우리는 인테리어를 구상하고 공간에 채워질 물건을 함께 고민하며 한 발 다가섰다. 사소한 것도 상의하며 바꿔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쩌면 이런 시간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감사하게도 이사가 그 물꼬를 터주었다. 이사는 공간뿐 아니라 마음도 채워주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시계를 자주 보니 습관이 생겼다.  늘 상 밖에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왔는데, 이제는 어떡해서든 집에 빨리 와서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추운 겨울에 때 아닌 봄바람을 맞이했다.


오늘은 어떤 핑계로 집에 일찍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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