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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은 Aug 09. 2015

지구의 마지막 날

아이슬란드 여행의 첫 날


북극해에 어둠이 내릴 무렵에야 비행기는 레이캬비크 공항에 내렸다. 공항 건물 앞에는 리무진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커다란 앞 유리창으로 아이슬란드 풍경을 감상하고 싶어서 운전기사 반대편 맨 앞자리에 앉았다.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와 바람에 흐트러진 잿빛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가늘고 긴 손가락 끝에는 운전대보다는 일렉트로닉 기타가 잡혀있는 게 더 어울릴 것만 같다. 맨 앞자리에서 서먹한 아이슬란드 풍경과 쓸쓸한 젊은 운전기사의 옆 모습을 번갈아 감상하며 수도 레이캬비크에 가까워져 갔다.




아이슬란드의 국토 면적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인구는 30만 명이 조금 넘을 뿐이다. 건물이 낮아 하늘이 더욱 넓게 느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느슨해 땅은 훨씬 더 광활하게 느껴진다. 아이슬란드의 저녁 풍경은 흐리고 적막했다. 공항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순식간에 제 갈 길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고, 텅빈 길 위에 혼자 남겨져 두리번거릴 때는 마치 거대한 지구에 남겨진 마지막 인류가 된 것처럼 막막했다. 아이슬란드 여행의 첫날은 그렇게 지구의 마지막 날만 같았다.




알파벳으로 쓰여지긴 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아이슬란드어로 적힌 도로 표지판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예약해둔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평소 예약하지 않던 숙소를 아이슬란드에서 미리 예약했던 것은 혹시나 추운 나라에서 잘 곳을 못 구하면 길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원시적인 공포감 때문이다.


숙소의 문이 열리고 문 앞에 나타난 여자는 나를 보더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에게 예약한 이메일로 답장을 보냈는데 못 받았냐고 물으며, 보수공사 때문에 손님을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메일을 미리 확인하지 못했던 나는 추운 아이슬란드의 밤에 갈 곳을 잃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미리 예약까지 했는데 결국은 길에서 얼어 죽을 팔자인건지, 막막한 마음으로 차가운 밤공기에 하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내가 길에서 얼어 죽을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내려놓은 그녀는 길 건너편 건물을 가리키며, ‘Kex(아이슬란드어로 쿠키라는 뜻)’에 가면 잘 곳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오래전 가동을 중단한 채 버려진 쿠키 공장을 숙소로 개조한 곳인데 1층에는 펍과 작은 공연장이 있고 2층에서 4층까지 여행자를 위한 저렴한 숙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1층의 리셉션 데스크에는 볼이 사과처럼 빨갛고 통통한 젊은 여자가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내게 며칠간 머물 도미토리 침대 한 칸을 내어 주었다.




공항에서의 노숙과 두 번의 비행, 그 사이 긴 기다림에 지친 나는 몹시 피곤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에는 유황 성분이 섞여 미끈미끈 했지만 피곤하고 지친 몸을 달래주기에 충분히 뜨끈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물에 포함된 유황 성분 탓에 감촉이 미끈미끈한 데다가 은은하게 삶은 달걀냄새가 난다. 린스를 듬뿍 써도 머리카락은 뻑뻑하고, 몸이 미끈미끈한 것이 개운치가 않다. 바로 전 모로코에서 보낸 2주에 이어 아이슬란드에서 머물 3주까지 더해, 오랜 시간을 이렇게 덜 씻은 느낌으로 살다보면 나는 씻는 것에 아주 관대한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사진에 담긴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면 싶은 폭염의 나날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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