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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Jun 22. 2018

한국 축구 촌평을 통해서 본 '근저'에 대한 사색

해커에 대한 정의에 견주어 본 한국 축구 수비에 대한 촌평

'Via 비어 웹'이라는 결제 애플리케이션으로 스타트업 성공을 한 미국인 폴 그레이엄이라는 괴짜 해커가 있다. 그가 쓴 책 <해커와 화가>에서 'hack'이란 명사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한 가지는 사물이나 무언가에 대해 정통할 정도로 영리해서 시스템을 앞질렀을 때를 일컫는다. 반면에 어떤 일을 형편없이 처리했을 때도 일컫는다. 지은이는 전자보다 후자의 의미가 미국에서 더 자주 사용되는 일은 아마도 형편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라며 단어의 두 의미가 가지는 공통점은 둘 다 주어진 규칙을 어긴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Cambridge dictionary를 통해 검색한 hack의 의미


케임브리지 사전을 통해 검색하니 또 다른 한 가지의 의미가 더 나열된다. 첫 번째는 폴이 언급한 두 번째 개념과 유사한 '종종 어떠한 목적의 겨냥도 없이 거칠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어떤 과정의 일부를 방해하다'이다. 새로운 의미로 축구나 럭비에서 볼을 차 버리거나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 상대의 다리를 걷어차버리는 파울을 하다이다.


그야말로 한국말로 '핵'폭탄의 핵과 같은 뉘앙스이다. 역대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이 수비수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한 시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는 이후에 이 팀보다 실력이 역대급 수준으로 평가받았던 국대가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때의 한국 수비수들은 세계 클래스급이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 축구사 중 긍정적 의미의 '핵'과 같은 존재들이 수비수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김태영, 최진철 그리고 주장이었지만 이들 중 피지컬면에서는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홍명보가 있었다. 김태영이 붉은 마스크를 쓰고 월드컵 경기에서 전투를 펼쳤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얘들은 도대체 언제 고3으로 자라난 거야, 2002년이 엊그제 같은데...)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수가 아시아 수비수로는 최초로 유럽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구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본인이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스페인전에서 김태영 선수


대개는 끈질기게 밀착하는 수비수로 기량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수비수이건 공격수이건 타깃으로 하는 대상만 바뀔 뿐 집착하는 정신력은 선수의 가장 기본적인 역량이다. 최진철은 본래 공격수였다. 한 번 정규방송 특집으로 이 선수에 대해 다큐멘터리 형식의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성인 대표팀에서 수비수를 맡기 전까지 학생 시절에 최진철은 엄청난 괴력을 지닌 공격수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선수를 마크한 수비수들이 폭력적인 그의 공격에 나가떨어졌다고까지 한 묘사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독일 월드컵 당시 최진철 선수


그것을 증명하듯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전에서 격돌한 이탈리아 전에서 최진절이 전담 마크한 선수가 녹다운됐었다. 최진철이 자빠트렸다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 이탈리아 최전방 공격수였던 비에리라는 선수는 본래 헤비급 복서 출신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장전 전반 접전 중에 한국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이 선수 앞에 공이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비에리는 그야말로 바닥에 퍼지면서 공을 허공으로 찼다. 물론 이 선수 뒤에서 몸싸움을 계속 벌인 선수는 최진철이었다.


마지막으로 홍명보다. 히딩크 감독 눈에는 그 당시 한국 국민들이 바라보는 홍명보의 이미지가 아닌, 체력이 달리는 팀의 맏형뻘 수비수로밖에 안보였는지 월드컵 예선 나가기 전 끄트머리에 국대 엔트리에서 제외시켰었다. 우여곡절 끝에 체력훈련을 소화하여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기는 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마지막 경기에서 체력이 달렸는지 터키와의 3, 4위 결정전에서 패스 미스로 실점을 만들었다. 홍명보가 이전의 두 차례의 월드컵 중 94년 미국 월드컵, 독일과의 경기에서 중거리 득점포도 올리고, 아시아 수비수로는 일본의 나카타와 함께 세계 올스타 선수로 뽑히기는 했지만 '탈아시아' 수준의 선수는 아녔다고 생각한다.

한일 월드컵 4강전에서 스페인과의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득점에 성공한 홍명보 선수


그러면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의 눈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선수는 누구였을까? 유상철이다. 유상철은 월드컵 평가전에서 플레이 메이커 수준의 멀티 플레이어였다. 경기 후 상대팀 감독으로부터도 가장 잘 뛴 선수라고 경기 평점을 받았던 선수였고,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은 어떠한 포지션에도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선수라고 칭찬했다. 그러면 당시 히딩크 감독은 왜 박지성과 이영표만 데리고 네덜란드 아인트호번으로 갔었냐고? 성장 가능성을 보고 자신에게 포옹을 했던 선수에게(히딩크도 사람이니까 한국인의 정 같은 것은 있지 않았겠나...) 기회를 줬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때 국대에서 이들이 공격수로서 유럽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계약이 체결이 되었겠지만 당시에 유럽으로 진출한 안정환, 이천수, 송정국 등은 갔다가 거의 일 년도 못 버텨서 K리그로 복귀한 걸로 안다.


사설로 황선홍이라는 한국의 간판 공격수조차도 오래전에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었지만 피지컬에 밀려서 오랜 기간은 활동하지 못했던 걸로 안다. 그래서 차범근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그리고 유럽의 명장들도 경기가 끝나면 먼저 인사할 정도다. 요즘 유튜브 한국 축구 선수 동영상 보면 아무나 레전드라는 호칭을 갖다 붙이는 것을 본다. 하지만 레전드란 지난 세대들이 ‘이거 실화인가?’라고 반문할 정도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운 앞선 사람에게나 붙이는 호칭이다. 한국 축구계에 살아있는 전설 정도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차범근 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아닌 독일인이 더 우상으로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우승으로 이끈 팀의 리그는 2부 리그가 아니라 1부 리그였다.


한국 축구협회는 히딩크조차도 처음 국대를 맡았을 때 네덜란드에게 5:0으로 참패당했다는 것을 봤다면 그에게 월드컵 도중에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하차를 시킨 것은 국가적 망신을 시킨 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잠깐 논점이 빗나갔다. 조금 보태자면 현재 신태용 감독이 예선전 경기 3패를 하더라도 축구협회는 여론의 비난을 등에 업고 또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란은 10여 년 간 같은 감독(재정적 문제도 있었겠지만)으로 ‘짠물 수비’라는 팀컬러를 추구하면서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아시아 팀 중 첫 번째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이 준결승까지 진출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선수들은 누구일까? 지금까지 대중에게 골장면으로 오랫동안 기억 남는 공격수 진영의 선수들이었을까? 맞지만 결코 50% 이상은 아니다. 그 공헌의 'Hack'은 공격 진영이 아니라 수비 진영에서부터 중원까지 한국 대표팀의 공격 루트로의 볼 배급이 원활히 이루어진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에서 'Hack'은 득점일 수 도 있다. 일단 이겨놓고 봐야, 나가서 본전이라도 뽑을 수 있으니까.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 페루처럼 프랑스전에서 아무리 많은 인터셉트를 하고 패스 성공률도 높고 슛을 많이 때려도 골 결정력이 없으면 결국에 패배하므로 아무 소용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반이 무너지면 골을 넣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먹히는 게 더 문제가 된다. 한국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가진 것도, 공격 화력이 막강한 브라질이 2014년 월드컵 때 독일에게 8점을 실점한 것도, 골을 넣기까지의 기반인 수비 진영이 부실하면 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누군가 축구는 미드필더 싸움인 중원 장악력이 승리에서 가장 유효하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네덜란드의 '토털 사커' 전략이 현대 축구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대중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골을 터뜨리게 해야 하는 유럽의 3대 리그에서도 공격의 전략은 가장 상업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한국이 2002년에 홈 경기장 이점을 가지고 4강까지 진출한 것의 가장 근저에는 골키퍼부터 최후방 수비수들의 신뢰가 팀 전체에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뢰의 기반이 무너지면 제아무리 손흥민이라고 해도 볼을 뺏기면 실점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공격의 전개를 펼치기가 쉽지 않다. 허리에서부터 압박하고 수비수들의 기량이 받혀준다는 것이 각인되어있다면 볼 트래핑 한 번 실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볼 뺏기면 실점"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새겨진 공격수들에게 창의적인 플레이는 기대하기 힘들고 미드필더들의 크로스는 더욱 힘들다.


그러니 김태영, 최진철, 최소한 홍명보와 같은, 현재 대표팀의 주장인 기성용 선수는 '탈아시아 선수'급으로 불리지만, 대한민국 축구협회는 후방의 수비수에 대한 자라나는 축구 꿈나무들의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대중들도 축구를 볼 때 골만 잘 넣고 드리블을 시원하게 하는 선수들에게만 이목을 집중할 게 아니라, 수비에 대한 칭찬과 수비수의 기량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한다. 한국 축구의 발전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장 아래'라는 의미의 바닥이 아니라, '가장 근본'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의미인 "근저"에서부터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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