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4년 만의 한국 방문기
‘역시 공항은 아시아였어.’
경유 차 들린 싱가포르 공항,
깨끗함을 넘어서 세련된 우드톤과 식물들의 조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4년 만에 느끼는 신식 공항 문물에 감격을 하며 그 어느 때보다 쾌적하게 볼일을 보았다.
평안한 장과 함께 약 7시간여 만에 도착한 인천공항에서의 화장실,
싱가포르의 모던한 우드톤과 클래식 음악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맞이한 눈이 부시게 환하고 칸마다 비데가 설치되어 있고 불이 번쩍번쩍 들어오는 여기는…
2월 어느 날, 코로나가 없는 세상을 기다리는 것은 일찍이 무의미해져 버렸고 호주 내 확진 자 수가 꺾일 줄 모르는 기세에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인가도 추적할 수 없이 정신 차려보니 나도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정부 지원도 없고, 친구도 없고, (지내는 곳 특성상) 배달 음식도 할 수 없는 곳에서 1주일 격리를 위해 방 안에 갇혀 지나다가 견딜 수 없는 서러움에 4년 만의 한국 행을 홀린 듯 계획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해외 입국자 격리 면제에 대한 소문이 여기저기서 스멀스멀 피어오를 즈음, '방안에 콕 박혀 있어도 한국이 낫겠다.'는 마음으로, 휴가 안 보내주면 그만두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혼자서 애처롭도록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비행기표를 결제했는데...
언제부턴가 누가 봐도 병든 닭처럼 생기 없이 다니던 나를 보고도 휴가를 거절할 만큼 여기는 팍팍한 분위기가 아니고, 떠나는 날을 며칠 앞두고 한국에서 해외 입국자 격리 면제가 공표되면서 아주 순조롭게, 코로나 이후 여행객들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직전에 모든 부분에서 가장 적절하고 저렴한 시기에 다녀오지 않았나 싶다.
#화려한 공항에서의 충격을 가라앉히고 공항 밖으로 나가기 위한 단계들을 거치는데 저 멀리서 한 할아버지의 고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입국심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한 Q-code 작성을 미리 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줄을 잘못 서서 기다리다 순서가 다 되어 제지를 당하자 직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며 항의를 하신 것.
한 두 번이 아닌 듯 당황한 기색 없는 마른 표정과 목소리로 “어르신, 여기서 소리 치치 마시고 뒤로 가셔서 소리치던지 하세요.”라고 말하는 직원들을 보니 이상하게 '나 한국 제대로 도착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 4년 만이라는 게 아주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발 가는 대로 공항철도를 찾았지만 개찰구에서 몇 년 동안 사용한 적 없이 '간직'만 하고 있던 교통카드 겸 체크카드를 첫 사용할 때는 혹시나 안될까 봐 맨 뒤에 서서 떨리는 마음으로 단말기에 찍었다.
공항철도를 무사히 타며 한 시간 가량 집으로 오는 동안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뽀얗고 단정하고 멀끔한 사람들이 향기를 내며 타는데 호주 직사광선에서 옆구리 뚫린 옷만 입으며 가열차게 살을 (본의 아니게) 태우다가 간만의 15시간 비행까지, 너무 깔끔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남루하게 느껴질 때마다 올린 마스크는 목적지에 다다라서는 눈동자까지 가리고 있었다는 슬픈 얘기.
그렇지만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예약해 둔 미용실이며 피부과를 비롯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울 사람으로 변신하기’ 일정을 마치고 나서는 바로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 4년 동안 한국을 비웠던 적은 처음이라, 게다가 서울과는 비교도 안되게 한적하고 또 한적한 동네에 있다가 만난 한국은 아니 서울은 좀 ‘유난스럽게 말하자면’ 적응이 필요했다.
먼저 도로 폭이 너무 좁다는 걸 처음 느꼈다. 사람 많고 차 많은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서울에서 버스든 자가용이든 차선 위에 있으니 도로가 너무 좁아서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호주에서는 이미 도로 자체가 넓기도 하거니와 내가 차 안에 있을 때도 (카니발을 탔을 때를 제외하고는) 넉넉한 도로를 느낄 정도였는데 한국은 도로 폭도 호주에 비해서 좁고 차들도 워낙 많으니 더욱 좁게 느껴졌다.
또 횡단보도와 차량 정지선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는 것. 횡단보도에 서서 파란불을 기다리다가 차들이 너무 가까이 까지 와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차 유리문이 너무 시커멓게 느껴진 것도 처음이었다. 호주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한도에서의 틴트(tint)만 허용이 된다고 하여 운전 중 양보를 주고받을 때 인사를 나누는 것도 차 안에서 충분히 용이한데 한국은 다들 차창이 너무 까매서 좀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이 얘기를 나눴던 친구와 차를 타고 가다가 우리 앞쪽에서 한 차가 무리하게 끼어들어 다른 차들의 경적을 한 몸에 받는 장면을 보고 친구가 말했다.
“이래서 다들 시꺼멓게 하는 거야. 저거 얼굴 보이면 저렇게 할 수가 없거든.”
아… 그래서 다들 비상등을 자주 쓰는 건가? 표현을 하고 싶은데 보이지가 않으니까?
공항 화장실의 놀라움도, 오고 갈 때마다 느꼈던 도로 위의 어색함도, 오랜만에 만난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낯설기는 했지만 사실 차선도 익숙해지기 전에 나에게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을 만큼 나는 이미 서울 사람스러웠다. 그리고 나 역시 한국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 10여 년 간의 외국에서의 시간들이 ‘한 여름밤의 꿈’이 된 듯했다.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사재기를 하고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먹어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으면서… 마치 원래 있었던 사람처럼… 마치 계속 있을 사람처럼…
어느새 다시 호주,
내리는 문마다 불이 번쩍거리거나 대중교통을 탈 때 가방을 어떻게 매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안내 방송은커녕, 정거장 방송도 안 나와서 알아서 잘 내려야 하는 버스가 다니는,
외출 시 겉옷과 신발은 옵션이고 비키니와 맨발로 마트를 다닐 수 있는,
후진 주차하는 방법을 알려달라 하니 어디든 갖다 꽂으면 주차가 될 정도로 주차 공간이 넓은 곳이라는,
화려한 조명과 신식 세면대는 없지만 깨끗은 하고 열쇠나 비밀번호 없이도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여기저기 널린 호주에서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5주간의 한국에서의 일상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배고픔에 자연스럽게 ‘쿠팡 이츠’를 열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또 ‘한 여름 밤의 꿈’이 되었는데 주인 맘도 모르고 손의 습관은 아직 한국인가 보다.
한국 도착하고 한 일 이 주일쯤 지났을 때였나? 형부와 형부 지인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다. 다들 호주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불과 며칠 전의 내 일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되게 가물가물해하면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당황한 형부가 물었다.
처제, 그동안 영어마을에 있었던 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