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식 Jul 26. 2015

나의 3대 음악철황 #2

김현철 

2. 김현철 (1969.6.14 ~ )


1편. 동네형, 춘천가는 기차에 몸을 싣다. 


아직도 그의 음악을 처음으로 들었던 때를 기억한다. 1989년, 어느 저녁 밤이었다. 그 시절에는 친구들끼리 미니카세트를 사서 자랑도 하고 좋은 노래를 녹음해서 선물하곤 했다.  그 당시 부잣집 친구들은 국제시장에서 소니 워크맨, 파나소닉, 아이와 카세트를 샀고, 넉넉하지 못한 친구들은 삼성 마이마이, 금성 아하, 대우 요요를 샀다. 그 시절 우리에게 오토리버스는 환상적인 기능이었다. 오토리버는 밤새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 준 마법의 지팡이었다.


나도 부모님을 졸라 대우 요요를 샀다. 오토리버스 기능은 빠져있었지만 라디오와 녹음 기능은 되는 미니카세트였다. 저녁마다 이불을 둘러쓴 채 귀에 이어폰을 끼고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듣고 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김현철 1집을 소개했다. 그 때만 해도 최고의 가수는 "변진섭", "이승철", "이상우" "푸른 하늘" 이었다. 내 생애에 최초의 김현철 노래는 "동네"라는 곡이었다.


그 때 내 가슴을 파고드는 가사는 "짧지 않은 스물 해를 넘도록"이었다. 14살 중학교 1학년에게 20살 대학생이 되면 어떨까란 상상을 수없이 했다. TV 드라마 "사랑이 꽃 피는 나무"에서 나오는 대학생처럼 미팅도 하고 최수지, 이미연, 이상아와 같은 예쁜 누나들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했다. 스물 해가 넘어가면 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동네라는 가사 속에 나오는 "소녀"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짧지 않은 스물 해를 넘기고" 보니 꼭 그런진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스물 해가 넘겨서 다시 듣게 된 김현철 1집에서는 "춘천가는 기차"가 가슴에 와 닿았다. "저녁 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였다. 헤어진 여자친구와 5월에 춘천에 데이트 갔던 기억을 간직한 채 세월이 지나 눈이 내린 겨울에 춘천행 기차를 타는 마음을 담담하게 노래했다. 누구나 스무 살이 막 넘었을 무렵,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 사랑하기도 했지만 헤어지고 나서 홀로 맘을 추스르려고 여행을 떠난 적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홀로 술에 취해 아픔을 잊으려고 노력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 추억들을 "저녁 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이라고 읊조린다.


김현철은 1집에서 그 시절에 "동네"에서 살아가는 청춘의 삶을 노래했다. 지금은 그 수많은 "동네"가 재개발, 재건축으로 "단지"로 변해버렸다. 아이들이 골목 구석구석 골목길을 뛰어놀던 동네에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리고 아이들은 학원으로 가버리고, 아파트 단지 내에 놀이터로 모여들었다. "내가 걷는 거리 거리 거리마다 오 나를 믿어왔고 내가 믿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던 동네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윗집에 애들이 뛰어다니는 층간소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1989년 대학교 1 학년이었던 김현철은 그 시절의 풍경들을 노래 가사에 담았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삶의 풍경들을 담았다. 그래서 동네를 노래했고, 춘천가는 기차를 노랬했고, 형을 노래했다. 김현철은 그런 재주가 매우 뛰어나다. 삶을 슬라이스 해서 그 단면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마치 공룡이 거대한 퇴적물에 쌓여서 세월이 지나 화석이 되듯이, 김현철의 노래는 다시 들으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는 듯하다.

20살의 김현철은 바로 20살의 누구나 일 수 있는 것이다. 20살에 데뷔한 김현철은 자신을 노래함으로 자신이 살아온 동네를 노래했고, 동네에서 만난 소녀를 노래했고, 그 소녀와 함께 춘천에 갔던 기억을 추억하며 노래했고, 나 홀로 술에 취한 모습도 노래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함께 마주한 형도 노래했다.


20살 천재의 데뷔라고 찬탄했던 김현철은 그렇게 등장을 했다. 나 또한 이불 속 라디오를 통해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짧지 않은 스물 해를 넘겨" 이제는 "짧지 않은 마흔 해를 넘겨"가고 있는 중이다. 그의 노래를 들을 적이면 우리는 그 시절의 살았던 우리네 삶을 그리게 된다. 1989년 그해, 김현철은 노래했다. 그리고 그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랜만에"라는 가사처럼 노래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이런 기분, 내게 들려 오는 흐뭇한 그 얘기들이 좋은 걸, 언제까지라도 간직하고 싶은 이 기분"

나의 3대 철황 중 신해철은 내 이성에게 말하는 형이었다면, 김현철은 내 감성에 말하는 형이었다. 

김현철.. 동네형, 춘천가는 기차에 몸을 싣다. 그리고 그 형이 들려주는 또 다른 얘기를 들어보자. 


2편. 32도씨 여름, 그래도 괜찮아 (부제 : 현철, 뮤지션이 된 남자)


1989년, 재수를 하던 20살 김현철은 화려하게 음악계의 찬사를 받으며 1집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2년에 2집을 발매하였다. 3년 공백기 동안 피 끓는 청춘이었던 김현철은 어디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군대에 다녀온 것일까? 2편에서는 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본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 15일의 기록을 상상하며 광해군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김현철 2집의 제목인 “32도씨 여름”은 1집과 2집 사이의 공백기 3년에 관한 답변인 셈이다. 그는 1990년 5월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데뷔한 지 1년 정도 지난 시점에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받았던 21살의 천재라고 불리던 김현철은 기나긴 투병과 재활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음악적인 재기는 고사하고 신체적으로 재기할 수 있을까라고 절망의 순간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 때의 후유증으로 그는 군대도 면제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언론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식물인간, 전신마비까지 언급한 걸 보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생사를 넘나들 정도의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기나긴 재활을 마치고 1992년 드디어 2집을 발매한다. 그 공백에 대한 김현철의 대답은 "32도씨 여름"이었다. 앨범 제목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의문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사실 나도 2집에서는 "까만치마을 입고"라는 곡을 가장 자주 들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쓸려고 김현철 2집을 수십 번을 듣고 또 들었다. 듣고 또 듣다 보니, 이제야 왜 "32도씨 여름"임을 알게 되었다.


김현철, 그의 음악을 살펴보면 유난히 겨울에 관한 곡이 많다. 

1집: 눈이 오는 날이면, 춘천가는 기차에서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가사

2집:  눈싸움하던 아이들

3집 : 진눈깨비

5집 : 동야동조,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 이브


유달리 김현철은 겨울에 대한 기억이 많아서인지 겨울에 관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근데 유독 2집 앨범만은 제목이 "32도씨 여름"이다. 그 비밀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보자. 여름이면 보통 생각나는 온도는 얼마인가? 대부분 34, 35, 36도 정도 떠오를 것이다. 내가 고3이었던 1994년 여름은 지금껏 그 어떤 여름보다 더웠다. 서울이 38도가 넘는 찜통 같은 여름날로 곤욕을 치르곤 했다.


김현철은 34도씨의 여름이 아니라 32도씨 여름을 얘기한다. 김현철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다. 그 시절 가장 노래를 잘하는 이승철처럼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지 못하였다. 그런 자신 목소리라는 악기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본인 자신이었다. 꽤 덥기는 하지만 그렇게 뜨겁지 못한 32도씨의 여름처럼 말이다.


32도씨 여름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이 바로 "까만치마를 입고"이다. 사실 노래 가사를 들으면 별거 아니다. 토요일 저녁에 처음으로 까만치마를 입고 있는 그녀를 봤다. 그런데 항상 바보같이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것만 봤다. 말도 한번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리고 혼자 상상을 해본다. 남자친구는 있는지.. 어떻게 보면 찌질하고 한심하다고 볼 수 있다.


김현철이 얘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32도씨 여름"이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스쳐지나 가고 우두커니 쳐다만 보기만 하는 상황.. 여름은 여름인데 34도, 35도 여름이 아니라 그냥 꽤 더운 32도 여름인 셈이다. 또 2집에 실려져 있는 "누구라도 그런지"의 가사를 살펴보자.


"왜 이렇게 산다는 게 힘이 드는지 왜 이렇게 산다는 게 어려운 건지 누구라도 산다는 건 그런지 왜 이렇게 내 노래가 듣기 싫은지 왜 이렇게 내 노래가 짜증나는지 누구라도 내 노래는 그런지”


그렇게 먹먹하게 노래한다. 누구라도 그런 순간이 있다. 뜨겁지 사랑하지 못하고, 뜨겁게 이별하지 못하고, 뜨겁게 돌진하지 못하고.. 노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더운 32도씨 여름날이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는 많다. 그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는 노래했다. 

"32도씨 여름,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아. 그래도 사랑했자너 그래도 여름 이잖아. 힘들어하지 말아.. 나도 그래.. 그런 삶을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아니 스스로를 위로하면 노래했다.


1년이 넘는 오랜 투병생활 끝에.. 김현철이 노래하고 싶은 건.. "나는 승철 형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도", "다른 친구들처럼 군대에 갈 만큼 건강하지 못해도" 괜찮아.. 난 나만의 “32도씨 여름이 있다”고 노래한다.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라고 말한다. 서울이 최고는 아니어도 비가 오면 꽤 괜찮은 "32도씨 여름"같은 도시라고 노래한다.


누구에게나 "34도씨 여름"만 있을 수 없고, 때론 32도, 30도 심지어 28도 여름이 올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얘기한다. "누구라도 그렇다"고 담담히 얘기한다. 1992년, 현철은 뮤지션이 된 남자였다. 1992년, 김현철 2집은 우리에게 얘기한다. 지질해도 괜찮아. 그래도 괜찮다고 얘기한다.


3. 프로듀사, 그대 안의 블루를 만나다. 


약관 20살 김현철은 1집을 발매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앨범에 적어놓았다. 프로듀싱 김현철.

참으로 대담하고도 도발적인 선언인 셈이다. 그 당시 동아기획에는 막강한 라인업이 구축되어 있었다. 조동익, 함춘호 등 쟁쟁한 음악적 선배들이 있음에도 대학생도 아닌 입시에 전념해야 할 재수생인 주제에 자신의 첫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에 나선 것이다. 


20살 김현철은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프로듀사로서 데뷔하게 된다. 프로듀사는 음반에 대한 전체 기획을 결정해야 한다. 타이틀 곡  선정뿐만 아니라 작곡, 작사, 편곡에 이르기까지 음반의 음악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끌어가야 하는 선장인 셈이다. 20살 재수생에게 프로듀싱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동아기획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집을 성공적으로 발매하고, 오랜 투병생활 끝에 김현철은 1969년 동갑내기 이소라를 만나게 된다. 불후의 명곡 "그대안의 블루"를 함께 부르게 된다. 프로듀사 김현철은 본능적으로 이소라를 만나고 "소라 안에 현철"을 직감했다. 무척이나 닮은 꼴이었던 두 사람의 인연은 이소라의 데뷔 음반으로 이어진다. 프로듀사 김현철은 그대 안의 블루인 이소라를 만나서 "난 행복해", "잊지 말기로 해", "청혼"같은 곡을 주고 그녀의 음반을 프로듀싱 했다. 


신해철이 윤도현, 전람회, 김동률의 음반을 프로듀싱 했듯이, 김현철은 이소라, 유재하 헌정음반 등을 프로듀싱 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음악인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특히 김현철은 자신이 느끼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음악을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주는 이소라를 만나게 된다. 


"그대 안의 블루"를 살펴보면, 김현철, 이소라는 항상 좋아하는 사람들 주변을 맴돈다.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말도 못하고, 헤어져도 속으로 꿍꿍 삭힌다. 이별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혼자서 술에  취하기도한다. "사랑은 아니지만은 우리의 만남, 어둠은 사라지네 시간은 빛으로 물들어 또다시 흐르네

내 눈빛 속 그대"라고 노래 부른다. 우리의 만남은 사랑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 이별의 아픔 때문에 밤을 새워 어둠은 사라지고.. 또 시간이 지나 하루 종일 괴로워하다가 저녁노을 빛에 물들어 또 하루가 지나간다. 참으로 김현철, 이소라다운 표현법이다.


우리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만남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참 가슴 아픈 얘기다.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파하지 않을 텐데 이런 맘이 전해진다. 어둠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밤을 새웠다는 얘기이고. 시간이 빛으로 물들었다는 얘기는 하루 종일 멍하니 있다가 저녁노을 빛에 물들었다는 얘기다. 그대 안의 블루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쓸쓸하다는 얘기이다.


프로듀샤 김현철은 이소라를 만나고 음악적으로 많은 시도를 한다. 자신의 얘기를 잘 표현할 음악인을 프로듀싱 하기 시작한다. 3집에는 이은미(우리 언제까지나), 유정연(음악은)과  함께했고 4집에서는

고소영(왜그래)와  함께했었다. 그리고 7집은 앨범 제목이 "...그리고 김현철"이었다. 프로듀사 김현철은 가수 김현철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7집 타이틀 곡 "Loving You" 는 (Feat. 김현철)이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프로듀사 김현철과 가수 김현철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본인이 부르고 있지만, 피처링이 본인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앨범 제목이 ... 그리고 김현철이다. Loving You는 "김현철 그리고 김현철"인 셈이고, 봄이와는 "롤러코스터 그리고 김현철"인 셈이다. 1,2,3집을 지나서 그의 천재성이 무뎌졌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7집의 작명 센스는 가히 천재적이다. 김현철은 이제 가수로서의 삶보다 프로듀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연예기획사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기도 하고, EBS 어린이 프로그램(플루토 비밀결사대)에도 출연을 했다.


프로듀사, 김현철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 그리고 김현철"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가수 김현철은 추억 속에 앨범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여전히 "32도씨 여름"이다. 비록 옛 시절 풋풋한 감성을 노래하는 천재 김현철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EBS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어깨 힘도 많이 빠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말로 이 글을 마친다.

"내가 어떤 음악인으로 남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나한테 충실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나는 그냥 나한테 충실할 뿐입니다."


프로듀사, 그대 안의 블루를 만나다. 여전히 나는 그가 프로듀싱 한 음악을 기대한다. 


곁가지. 따라쟁이들, 현철에게서 음악적 유행을 배우다. 

(부제 : 사람을 고치는 의사와 사람을 고치는 악사)


앞서 얘기했지만, 현철은 재수 시절에 데뷔하였다. 그의 부모님이 아들이 의대에 들어가길 원하셨다고 한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Y, K대 의대에 진학하고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홍익대 전기제어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부모님은 그가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길 원하셨지만, 결국 그는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의사(Doctor) 대신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고치는 악사(Musician)가 되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20살 김현철은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악사(Musician)이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선택했던 전공 "전기제어공학"은 나름 그가 전자음악을 잘 다룰 수 있게 만든 힘이 되었다. 그 당시 윤상, 김현철, 신해철, 공일오비 등 젊은 음악인들은 롤랜드, 코르그와 같은 전자음향기기로 새로운 전자음악을 시도하였다. 그가 배운 전기제어공학은 "음악제어공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는 자신이 고치는 병에 꼭 걸려볼 필요는 없다. 의학지식이나 임상을 통해서 질병에 대해서 배우게 되고 진료나 수술 등을 통해서 고칠 수 있다. AIDS를 치료하는 의사가 AIDS 환자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악사(악사라고 쓰고 의사라고 읽는다) 자신이 그 병에 걸려봐야 절절하게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 가슴 아픈 이별을 해본 사람이 진심으로 이별을 경험 중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김현철은 기꺼이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악사가 되었다. 일부러 이별과 슬픔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그가 겪은 수많은 감정들이 음악이라는 처방전으로 변하여 테이프, CD, mp3로 전해졌다.


언젠가 그가 어는 음악잡지사와 대담에서 한 말이 있다. 공일오비가 은근히 따라쟁이라는 말을 했다. 그 당시 김현철은 자신의 앨범에 연주곡을 삽입을 했다. 연주곡의 제목이 앨범 제목이었다. 

32도씨 여름,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Who stepped on it가 모두 그런 경우이다. 김현철은 자신의 음악적 지향점이 노래에만 있지 않고, 연주에도 있음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연주곡은 사람의 목소리라는 악기가 빠져있는 곡이고, 다른 곡은 사람의 목소리라는 악기가 들어가 있는 곡이다. 이와 반대로 아카펠라는 사람의 목소리라는 악기로만 구성된 형태이다. 공일오비는 그 당시 김현철의 스타일을 따라한다. 공일오비는 1집 "쨈에 발린 버터빵" 2집 "동부 이촌동 새벽 1:40" 3집 "Santa Fe" 6집 "Air Borne" "Nuclear Age" 7집 "간장드레싱 레시피" 등의 연주곡을 발표했다.


또한 김현철은 1집 이후부터 자신의 음악을 불러 줄 다른 가수들과 늘  함께했다. 이은미, 유정연, 이소라, 조규찬, 롤러코스터 등 많은 가수와 함께 작업을 했다. 공일오비는 따라쟁이다. 객원가수라는 형태로 윤종신, 이장우, 김돈규라는 가수와  함께했다. 토이도 따라쟁이다. 토이는 김연우, 조규찬, 김형중과  함께했다. 김현철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치는 악사이기도 했지만 동년배 음악의 마음을 낚은 악시이기도 하다. 김현철 이후에 많은 따라쟁이들이 김현철의 음악적 유행을 배웠다.


가장 최근에 따라쟁이는 버스커버스커이다. 여수 밤바다는 춘천 가는 기차의 바다편인 셈이다. 삼시 세 끼가 어촌 편, 정선 편이 있듯이..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은 "춘천 가는 기차", "여수 밤바다" 편이 있는 셈이다. 물론 그 보다 원조는 "제주도 푸른밤"이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떠오르는 방법은 시간과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노래가 Last Christmas, 하얀 겨울, 벚꽃 엔딩 등이 있고, 후자의 대표적인 노래가 제주도 푸른밤, 춘천가는 기차, 여수 밤바다 등이 있다. 버스커버스커는 둘 다를 가지고 있는 대단한 밴드인 셈이다.


어니스티와 피아노맨을 부른 빌리 조엘의 부모님은 그들의 아들이 아이비리그 대학인 "콜롬비아 대학"에 들어가길 소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빌리 조엘은 부모님의 속을 그토록 썩이더니 "콜롬비아 음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김현철 또한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악사가 되었다. 그 덤으로 수많은 따라쟁이들이 현철에게서 음악적 유행을 배웠다. 빌리 조엘과 김현철 부모님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소원을 성취한 셈이다. 의사가 안되어도 좋다. 오히려 악사라서 더 좋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3대 음악철황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