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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Jul 24. 2015

바람과 파도의 섬

Drawing Blue #03

그런  있다.

들어본 적이 있는 지명, 정확히 어디쯤 있는지는   봄이 무르익어가는 늦은 4월에 어느 섬에서 청보리 축제가 한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섬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지만, 한 번도 내 입으로  이야기해본 적 없는 곳이었다. 내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 어딘가에 어설프게 기억되어 있던 그 곳. 지도를 찾아보니 그 섬은 우리나라 최남단인 마라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었다. 여행을 결심한 그 순간, '가파도'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은 그것이 전부였다.


김포공항을 떠날 때 옅게 드리워져 있던 구름은 제주에서는 어둡고 근심 가득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궂은 날씨 때문에 가파도로 가는 배가 뜨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와 곧바로 755번 시외버스에 탑승했다. 목적지는 종점인 모슬포항. 가파도를 향하는 정기 여객선은 오직 이곳에서만 출항한다.


모슬포에 도착하니 하늘은 더욱 불편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역시 심상치 않았다.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꼭 부여잡은 채 여객선 대합실로 들어갔다. 배가 결항되지는 않은 모양인지 다행히 여객선 티켓이 판매 중이었다. 창구의 직원이 표를 넘겨주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배가 곧 출발하니 뛰어가셔야 해요!」

모자가 벗겨지지 않도록 다시 한 번 꼭 눌러써야 했다.


배 안에는 빈 자리가 절반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청보리 축제기간인 것을 감안하면, 그날의 가파도는 인기가 무척 없는 셈이었다. 덕분에 선내는 떠드는 이 없이 고요하고 쾌적했다. 뱃머리에 부딪는 파도의 목소리와 여객선의 묵직한 엔진 소리가 여행객의 소란함을 대신했다. 창 밖으로 가파도의 상동포구의 흐릿한 풍경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윙-윙-윙-」


작은 섬에서 느끼는 바람은 제주 본 섬의 것보다 더욱 야성적이었다. 바닷바람의 격렬함에 때론 실눈을 떠야 할 정도였다. 돌담 사이로 난 길을 걷는 동안 누군가의 집에서 가출한 플라스틱 세숫대야가 내 옆을 위태롭게 굴러갔다. 포구를 벗어나자 돌담 너머로 가파도의 청보리밭이 나타났다. 섬의 낮은 능선을 따라 자라난 푸른 것들은 이리저리 부서질 듯 흩날리고 있었다.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 작은 섬이다. 해발 20.5m에 불과한 이곳에서는 이 한 몸 숨길 곳 조차 마땅치 않다. 사람의 손이 닿은지 오래되어 군데군데 무너져 버린 돌담을 지날 때면 몰아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지키는 이 없어 피폐해진 무덤을 지나 다시 해안가로 나왔다. 청회색 바다 위로 바람이 격렬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의 흔적을 쫓아 일렁이는 파도의 하얀 포말이 가여웠다.



기대했던 늦봄의 게으르고 포근한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불평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섬 위의 모든 것들은 고단한 하루를 기꺼이 버텨내고 있었다. 무너진 돌담 사이에서도 들꽃은 피어나고, 먹이를 구하는 제비는 칼바람사이로 날개를 펼쳤다. 그 모습은 처연하다기 보다는 숭고했다. 꿋꿋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그들 앞에서 나약하고 이기적인 여행자로 비춰지고 싶지 않았다.


가파도의 바람과 파도 / 과슈 + 디지털 채색


날씨에 대한 원망은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분칠 하지 않은 가파도를 알게 해 준 것에 감사했다.


리모의 드로잉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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