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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May 28. 2021

엄마,라니씨

첫 번째 이야기

2011년 라니씨가 퇴직했다.
정년퇴직.
라니씨가 만 35세에 취업한 생애 두 번째 직장에서 꼬박 30년 하고도 한 학기를 보내고 퇴직을 했다.

라니씨는 영원히 마흔 언저리일 줄 알았다.
라니씨는 영원히 직장인일 줄 알았다.
그랬는데, 라니씨의 일하는 여성, 일하는 엄마의 삶이 일단락되었다.

퇴직 후 라니씨는  여고 동창생들의 산책 코스를 제안하는 ‘산책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 글은 나밖에 모르던 딸인 내가 엄마 라니씨의 삶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며, 라니씨가 디자인한 산책 이야기, 그리고 라니씨의 엄친아(엄마 친구 아줌마들)의 이야기이다.


<삶을 개척하던 여성이 꾸준히 개척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라니씨와 나는 엄마와 딸 관계다.

모녀.

그것도 가부장이 부재한 여성천하의 모녀.


맏딸로 태어난 라니씨는 가장이 되기 전에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왔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여자임에도 반수’를 감행했고, 대학에서는 여학생 등산부 활동을 하며 산으로 들로, 계곡으로 스키장으로 모험을 했다.

라니씨를 믿고 라니씨의 선택을 존중하는 그의 부모, 나의 조부모의 덕분에 라니씨는 자유로운 청년기를 보냈다.


라니씨의 남편이자, 나의 부친인 규씨는 내가 태어나고 11개월이 되었을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라니씨는 그렇게 라니씨 자신과 그의 딸인 나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규씨를 잃은 라니씨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그만둘까 생각했던 학업을 다시 이어가야 할까?’

‘나는 저 아이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라니씨가 해온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규씨와 살던 집을 정리하고 규씨의 본가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규씨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기고 조교로 일하며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라니씨의 스승들은 혼자가 된 라니씨를 마음으로, 정보로, 응원하고 지원해주었다.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이십 대 후반의 제자가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규씨와 결혼을 결심하게 했던 것은, 라니씨를 웃게 하는 그의 유머와 독일과 연이 있었던 규씨가 결혼하면 함께 독일로 가 공부하자던 제안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아이가 생기고 아이를 돌보고, 틈틈이 졸면서 책을 읽고 집안 살림을 하며 ‘주부’의 삶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며 ‘전업주부의 삶도 괜찮은가?’라며 슬며시 공부에 대한 마음은 사라지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신은 라니씨를 책상 앞에 앉히고 싶었던 것인지 그렇게 전문적인 프로 주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학교에 남기로 결단을 내린 라니씨는 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제 겨우 두 살을 넘긴 아이와 떨어져 2년 반의 유학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아마 라니씨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아이가 한참 예쁠 때 지켜보고 싶은 마음과 미래를 위해 아이 걱정 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싶은 마음.

그렇게 라니씨는 아이를 두고 공부하러 먼 길을 떠난다.


<냉전과 독재자의 시절 공부하는 싱글맘 라니씨>


그때는 1970년대 중반이었다.

스마트폰도 없었고, 이메일도 없었고, 그리고 방학이면 한국으로 돌아올 여비도 없었다.

무엇보다 해외왕래가 자유롭지 않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다.

라니씨를 그리워하던 나는 라니씨가 남기고 간 보석함을 매일 들여다보며 반짝거리는 반지, 목걸이로 라니씨를 향한 그리움을 채웠다.

국제전화가 비싸기도 했고, 자유롭지도 않아 나의 이모들과 삼촌들은 가족들의 목소리가 담긴-특히 내 목소리, 노랫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독일로 보내곤 했다.

라니씨를 그리워했던 나는 이모, 고모, 작은엄마, 삼촌, 외숙모들에게 편지를 읽어달랬다.

듣고 또 들었다.


그렇게 절절하게 그리워하던 라니씨가 돌아왔다.

편지 속에서만 보던, 보석함 속에서만 보던, 사진 속에서만 보던 라니씨.

내 엄마.

그가 돌아왔다.


그런데 상상과는 달랐다.

라니씨가 있는 내 삶은 핑크빛일 줄 알았다.

서러운 일도 없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무조건 다 받아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매일 이 닦으라고 했다.

닦기 싫은 데 닦아야 한다고 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엄마 팔에 그렇게 매달리지 마. 엄마 힘들어. 똑바로 서서 엄마 손 잡아.’

‘너 그럴 거면 다음부터는 안 데리고 올 거야.’

‘너 잘 때 이빨 갈아서 같이 못 자겠어. 혼자 자.’

내가 상상했던 라니씨가 아니었다.

그런 엄마는 상상 속에만 있는 거였다.

현실 엄마는… 그렇다. 관계가 좋을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서 라니씨가 제일 좋았다.

라니씨가 제일 예뻤다.

그런데 라니씨는 차갑고 엄격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천사 같고, 선녀 같은 친엄마가 아니었다.

악독한 계모는 아니었지만, 사감 선생님 같았다.

나는 여전히 외롭고 서러웠다.


아차차, 라니씨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라니씨>


다시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몇 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이는 훌쩍 자라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어색해서인지 규씨의 어머니 뒤에 숨어 흘끗거리고 있었다.


라니씨는 그간의 시간을 만회하고 싶었다.

못 본 사이 아이는 응석받이가 되어있었다.

다정하게 대하면, 아이의 감정을 받아주고 공감해주면 버릇이 나빠질 것만 같았다.

엄격한 엄마, 제대로 가르치는 엄마가 되어 아이를 제대로 훈육하고 키우지 않으면 양육에 실패할 것 같았다.

외동으로 키워야 하는 아이가 응석받이에 의존적인 존재가 될까 걱정이 되었다.


어린애 이빨이 온통 충치치료의 흔적이었다.

이를 잘 닦아야 했다.

밤이 되면 등을 쓸어달라고 했다.

규씨의 어머니는 그렇게 아이를 재웠던가 보다.

그런데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커다란 아이를 더 이상 그렇게 얼러가며 키울 수는 없다.

어쩐 일인지 아이는 자면서 이를 갈았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일하러 가야 하는데 그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학위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다.

보따리 장사 시간강사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뛰어야 하는 시절이 열렸다.

독재 말기 혼란스러운 정치적으로도 엄혹한 시기였다.

학교는 매일이 시위였다.

높은 구두를 신고 학생들과 경찰을 피해 달려야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정신없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랬다.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하던 것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일상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라니씨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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