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어쩌다, 천년고찰

[아이와 함께하는 천년고찰 108배 프로젝트]

by ordinaryclip
2026. 1. 31. @마곡사



시작은 공주 마곡사(麻谷寺)였다.




그 무렵 남편이 공들이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일 년을 꼬박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일이었다. 처음 남편은 무척이나 자신만만했다. 시작만 하면 금방이라도 될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일의 성공이 불러올 장밋빛 미래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다.


차일피일 미뤄질 때도 조금만 더 준비하면 될 거라며 낙관했는데 결국 어그러졌다. 마지막 결과를 받아보더니 많이 낙심했나 보다. 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플랜 B’를 넘어 플랜 C, D까지 준비하는 기획자의 습성을 지닌 나와 달리, 긍정적 성향의 소유자인 남편은 잘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뭐.

고생했으니 당분간 머리 좀 비우고 쉬자. "


모두 다 잘될 거라는 근거도 없고 대책도 없는 긍정의 확언을 쏟아내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전했다. 짧고 무미건조하지만, 진심을 담아. 그래도 눈치 있게 낙담한 이를 앞에 두고 당장 실패의 원인을 짚어보자거나, 대책을 세우자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대문자 T인지라 낙담한 이에게 다정하게 위로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누군가 속상해서 빵을 샀다고 하면 “속상한데 왜 빵을 사?”라고 묻는 스타일이다. 누군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맞장구치며 공감해 주기보다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성향에 가깝다. 그래서 얼마나 속상한지 꼬치꼬치 물어 마음을 읽어주고, “그랬구나”하며 어깨를 토닥여 주는 일은 내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대신 기획자답게 데이터에 기반해 얘기했다. 실은 챗지피티랑 제미나이 모두 당분간 일을 벌이지 말고 내실을 다지는 게 좋겠다 했다고. 최첨단 트렌드인 AI를 동원해 다소 합리적인 제안처럼 보이나, 실상은 AI에게 생년월일을 넣고 올해 운세를 봐달라고 한 결과다. 그러니까 AI와 샤머니즘을 결합한, 허튼소리였다. 남편은 수긍했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얼마 전에 모임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는 이가 공주에 마곡사라는 절이 소위 ‘기도빨’이 좋은 절이라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땐 그곳에 간다고 했다고, 영험하냐고 물었더니 지어진 지 천년도 넘어 그런지 기도하던 게 이루어졌다고 했다. 우스갯소리로 듣고 넘겼는데 갑자기 그 얘기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 패착이 혹시 간절함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냐며 운을 뗐다.


"간절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잖아. 혹시 알아?"


정말 영험한지 확인할 겸, 코에 바람이나 쐴 겸 내일 마곡사에나 가볼까 미끼를 던졌더니 남편이 덥석 물었다. 모든 의욕이 사라져 주말엔 쉬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영험하다니 귀가 솔깃한가 보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 시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종교적 견해에 적극 동의해 온 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니. 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합리성을 가장한, 최고로 비합리적인 위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다정한 위로의 능력을 타고나지 못해 슬픈 대문자 T의 어쭙잖은 위로가 불러온 참사였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날 천년고찰 마곡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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