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1. 작가 소개
장욱진(張旭鎭, 1917–1990)
장욱진은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복잡한 기교보다 단순한 형식 속에 삶의 본질을 담아낸 작가다.
그의 그림에는 가족, 집, 나무, 길, 새, 사람처럼
일상적이고 소박한 대상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장욱진의 세계는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끝에서 도달한 본질의 언어에 가깝다.
그는 화려한 표현이나 시대적 유행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평생 같은 톤으로, 같은 태도로 그려냈다.
장욱진의 그림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그것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감상자를 가르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든다.
2. 그림 설명
〈길 위의 자화상〉은
넓게 펼쳐진 황금빛 들판 위,
붉은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한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배경은 단순하고, 원근은 강조되지 않으며,
화면에는 최소한의 요소만이 남아 있다.
붉은 길은 화면을 가로지르며 멀리까지 이어지지만
끝은 제시되지 않는다.
그 길 위에 선 인물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무엇을 선택하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다.
하늘을 가르는 새들은 움직임과 자유를 암시하지만,
인물은 그들과 대비되듯 정지해 있다.
이 정지는 멈춤이 아니라
삶을 감당하는 태도처럼 보인다.
이 자화상은
자신을 과장하거나 드러내기 위한 초상이 아니다.
장욱진은 화가로서의 자아를 앞세우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자기 삶의 길 위에 서 있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래서 이 그림은 묻는다.
“나는 어디까지 왔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내 삶의 길 위에 제대로 서 있는가”를.
3. 나의 감상
한 해의 끝자락에서
나는 다시 이 그림 앞에 선다.
끝은 언제나 정리이면서 동시에 질문이다.
예교리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마주했던 그림.
덕수궁미술관에서
장욱진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그의 자화상을 바라보던 나.
그때의 나는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2년이 흐른 지금,
나는 같은 그림 앞에 서 있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다.
그 사이에 쌓인 시간과 사유가
나를 다른 위치로 옮겨 놓았다.
그때의 자화상과 지금의 자화상은
하나의 선 위에 놓여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지점에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내가 만난 사람들의 총합이고,
내가 남긴 말과 글의 흔적이며,
내가 시간과 열정을 쏟아온 선택들의 집적이다.
한 해 동안의 모든 행위는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문장이 되었고,
그 문장들이 모여
올해의 ‘나’라는 자화상을 완성했다.
고통의 시간도,
버텨야 했던 날들도,
기쁨과 아름다움의 순간들 또한
모두 배제할 수 없는 나의 일부다.
삶은 편집할 수 없고,
자화상은 미화할수록 진실에서 멀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기에.
자화상 앞에 서서
나는 미래를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멀리 있는 어떤 이상을 향하지 않는다.
미래는 이미
오늘의 선택 속에서 윤곽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림은 완성되어 걸려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매일 다시 그려진다.
나는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는가로
내 얼굴을 조금씩 바꾸고,
내 태도로
내 삶의 선과 색을 결정한다.
선물처럼, 기적처럼 주어진
하루와 한 주, 한 달과 한 해.
그 시간들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
곧 나의 철학이 된다.
나는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과하며
또 하나의 자화상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보람과 기쁨, 행복이
우연이 아니라 결과가 되기를 바란다.
60년을 살아온 나의 자화상은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너그럽고,
자기 자신 앞에서 당당하며,
자신의 길을 알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존재이기를.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