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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Mar 23. 2023

아름다운 미자 씨!

여주행 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터미널로 향했다. 바쁘게 서두른 탓인지 버스 출발 시각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다. 출입문 쪽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입구를 찾고 있었다. 내가 “이쪽입니다.”라고 하니 양손에 짐 보따리를 들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디를 가느냐?’고 묻길래 ‘여주’라고 했더니 “나도 여주가요!”라고 큰 소리로 답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화장실 안 가느냐?’ ‘아침밥은 먹었느냐?’라는 질문을 연달아 받으면서 그녀의 짐들을 엉겁결에 맡았다. 싸늘한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얼마 안 있어 그녀가 왔다. 보따리에서 귤 두 개와 박카스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 통증에 효과가 있었다는 운동을 선보이며 나보고 따라 하라고 했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잠도 덜 깬 상태였다. 독특한 분이라는 생각을 굳히기도 전에 ‘왜 여주에 가느냐?’는 질문이 또 날아왔다.

그때부터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좀 있으니 자신의 이름은 ‘미자’라며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가짜 번호를 말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맴 돌았다. 그러나 내 입은 이미 이름과 전화번호를 말하고 있었다. ‘아뿔싸, 큰일 났네?’ 그때부터 나의 초조함도 시작되었다.

여주행 버스에는 4명의 승객이 있었고 미자 씨는 자신의 좌석은 놔두고 내 옆에 앉아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여주를 가는 목적뿐 아니라 거주지, 직업, 가족관계 등 중요한 나의 개인 정보를 순식간에 빼갔다. 융통성이 없는 나 자신을 탓하기에, 때는 이미 늦었다. 또한, 버스 안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리라는 계획도 무산되는 듯했다. 계속되는 심문이 약 20분쯤 되었을까? 그녀가 문자를 확인하는 동안 나 역시 이어폰을 꺼내어 음악을 듣는 척했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미자 씨가 약간 벌어진 입과 함께 코를 골며 아주 평온히 자고 있었다. 자신의 다리를 앞 좌석 쪽으로 쫙 펴고서 여주 가는 2시간 동안 계속 잤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쑥스러운 듯 내게 귤 하나를 더 건넸다. 여주 터미널을 나와서도 가성비가 좋은 마트와 내가 타고 가야 할 버스 정보를 알려주고, 원하지도 않는 그녀의 집 위치까지 나에게 각인시켰다. 대구 가면 전화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그녀는 아쉬운 듯 발걸음을 돌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터미널 근처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하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별일 없겠지?’라며 나 자신을 다독이고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가는 동안 버스 안의 사람들을 지켜보게 되었다. 승객들 대부분은 나이 든 사람들이었고 버스 기사와도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대도시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버스 안은 사람들의 대화로 약간 어수선했지만, 정감이 넘쳤다.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심지어 버스 기사는 승객이 타고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안부까지 건넸다. 물론 이방인인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사람도 있었다. 버스는 마을회관 곳곳을 들어갔다 나오면서 승객들을 하나둘 하차시켰다. 결국, 나를 포함해서 두 사람만 남았다. 남은 그분은 내가 가는 목적지인 ‘도전 돌밭공동체’를 알지 못했지만, 주소를 말하니 내리는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시골길을 걸으면서,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만 살아온 나의 정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오늘의 상황들을 다시 떠올렸다. 공동체에 도착해서 미자 씨 만난 얘기를 했더니 따뜻한 여주 사람들의 여러 경험담을 도로 내게 들려주었다.

갑자기 미자 씨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의심부터 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또한, 도시와 시골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나 자신이 얼마나 삭막하게 살아왔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물질적으로는 도시에 사는 내가 나누어주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나눔의 덕을 본 사람은 나 쪽이었다.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자 씨,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구나.’


약 2주 뒤, 그녀로부터 안부를 묻는 문자가 왔다. 연락이 올까 봐 두려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여주행 버스 안에서의 추억이 그리워졌다. 그때의 인연은 비록 오래가진 못했지만, 미자 씨를 떠올리면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와 함께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서로의 마음을 나눈다는 것! 여러 힘든 상황으로 지친 요즈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저절로 우러나오는 나눔의 정신은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소박한 일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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