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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Mar 26. 2023

내 인생 최고의 반전

비녀치장 할 가(珈), 계집 희(姬), 가희는 내 이름이다. 처음부터 ‘비녀치장 할 계집’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름다울 가(佳), 계집 희(姬)라 적힌 종이를 들고 동사무소에 가서 정확하게 출생 신고를 했다. 그런데 직원의 실수로 ‘아름다울 가(佳)’가 ‘비녀치장 할 가(珈)’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갓난아기의 이름이 ‘비녀치장 할 계집’이라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가족과 함께 김천 할머니 댁에 갔다. 사촌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다 우연히 과수원 뒤 큰 우물을 발견했다. 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우물을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탐색했다. 신기해서 두레박을 올려보리라는 생각에 줄을 당겼다. 팔에 팽팽한 느낌이 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10m 깊이의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물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였다. 내가 할머니 등에 업혀 사흘을 보내는 동안 그렇게 마을 공동 우물은 메워졌다. 

그다음 해 여름, 할머니 댁을 다시 갔을 때, 나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사촌 오빠가 잡아주던 자전거를 타다가 ‘아차’하는 순간에 탱자나무 울타리로 굴러 떨어졌다. 온몸에 가시가 박히는 대형 사고가 났다. 그해 여름은 가시 때문인 상처를 견디느라 엄마를 따라다니며 내내 울었다. 어디 그뿐인가. 공사장에서 놀다가 통나무에 깔리고 지나가던 자동차에 교통사고가 날 뻔하고. 얌전한 맏딸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이따금 계속 이어졌다. 


시간은 흘러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하굣길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엄마에게 다가와서 ‘가희라는 이름은 팔자에 좋지 않다’라는 조심스러운 충고를 했다.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던 엄마는 수성교 근처 작명 집에서 선할 선(善), 꽃부리 영(英)이라는 이름을 데려왔다. 한동안 나는 가희라 불리지 않았고 복잡한 개명 절차는 자꾸 미루어졌다. 어렵게 지은 선영이라는 이름도 점차 엄마의 언어 속에서 사라져 갔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가희라는 이름이 부르기 좋고 예쁘다고 말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다. 


대학생 때부터 커피를 무척 좋아했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를 즐겨 들었고 커피 관련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커피 예찬을 내 몸에 붙이고 살았다. ‘커피로 끼니를 때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커피를 사랑했다. 그야말로 나는 커피광이었다.

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교토 대학의 한 학생과 이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가희(珈姬)라는 한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비녀치장 할 가(珈)는 일본에서 ‘커피(coffee)’를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계집 희(姬)라고 알던 한자도 히메(ひめ)라 부르며 공주나 품격 있는 여성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비녀치장 할 계집’이 ‘커피 공주’로 재탄생하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반전이었다.


몹시 차가웠던 우물물, 우물 안에서 보았던 동그란 하늘과 울려 퍼지던 메아리는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나만 그런 특별한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연습 없는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는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라. 우리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동안 따뜻한 반전이 어느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 ‘내가 선영으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본다. 가지 않은 길은 늘 미련이 남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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