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사판 6번째 책
빅데이터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알고 보면 빅데이터는 매우 효과적인 심리정치적 도구다. 그 도구는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빅데이터는 지배를 위한 지식을 산출한다. 그 지식은 당사자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심리에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인격체를 수량화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한다. 그렇게 빅데이터는 자유의지의 종말을 선포한다. (38쪽)
투명사회는 긍정사회다. 사물이 모든 부정성을 떨쳐 버릴 때, 매끄러워지고 평평해질 때, 자본과 소통과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저항 없이 편입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행위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과정에 예속될 때, 행위가 고유한 특이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가격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행위는 투명해진다. 그림이 모든 해석적 깊이를, 한마디로 의미를 벗어던지고 포르노처럼 될 때, 그림은 투명해진다. 특유의 긍정성을 띤 투명사회는 같음의 지옥이다. (52~53)
오늘날 반드시 필요한 것은 감속이 아니라 시간 혁명,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혁명이다. 가속 가능한 시간은 나-시간 Ich-Zeit이다. 이것은 내가 나를 위해 내는 시간이다. 하지만 다른 시간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동료 인간에게 주는 동료 인간(타인)의 시간이 있다. 타인의 시간은 선물이며 가속되지 않는다. 타인의 시간은 성과와 효율성을 거부한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간 정치는 타인의 시간을, 선물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제 다른 시간 정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를 고립시키고 개별화하는 나-시간과 달리 타인의 시간은 공동체를 조성한다. 바꿔 말해 공동의 시간을 창출한다. 공동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136)
한병철의 16번째 책이 번역되었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도발적 제목으로. 이전에 출간된 15권의 책은 이미 정리하여 브런치 매거진 <한병철 철학 정리>에 올려놓았다. 참고 바란다. 이번에도 이전과 같이 소제목에 밑줄 친 부분을 옮긴다. 밑줄은 사람마다 다를 터이니 내가 인용한 부분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 아닐 수도 있다. 한편 이 책은 한병철이 이런저런 책이나 신문에 발표한 글을 모은 것이다. 책을 위해 새로 쓴 글은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이 가장 철학적 밀도가 높고 읽기 어려운 글이다. 그래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 읽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책의 분량만큼이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따로 옮기지 않겠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이 체제에서 체제 유지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그 권력은 규율 체제에서처럼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대도, 자유를 억압하는 적도, 맞서 저항하는 것이 것이 가능한 적이 더는 없다.(9)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단히 안정적이며 어떤 저항에도 끄떡없는데, 왜냐하면 이 체제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신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억압은 곧바로 저항을 부추긴다. 반면에 자유에 대한 착취는 그렇지 않다.(11)
목적 없는 친절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상호 평가 사회에서는 친절도 상업화된다. 사람들은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친절해진다. 협력 경제의 한복판에서도 엄격한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공유"의 질서 안에서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13~14)
인류 특유의 공격성 곧 폭력 Gewalt은 죽음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오로지 인간만 죽음 의식을 가지고 있다. 축적 논리가 폭력의 경제를 지배한다.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더 강한 권력을 지녔다고 느낀다. 축적된 살해 폭력은 성장, 힘, 권력, 상처 입지 않음, 불멸의 느낌을 산출한다. 사디즘적 폭력과 짝을 이루는 나르시시즘적 향유는 바로 이 권력 성장에서 유래한다. 살해는 죽음을 막는다. 인간은 살해함으로써 죽음을 장악한다. 더 많은 살해 폭력은 더 적은 죽음을 의미한다. 핵 군비경쟁도 이 같은 자본주의적 폭력 경제의 원리를 따른다. 축적된 살해 능력은 상상 속에서 생존 능력으로 취급된다. (22)
무당이 신에 씌듯이, 자본주의는 죽음에 씌어 있다.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자본주의를 추진한다. 자본주의의 축적 및 성장 강박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 깨어난다. 그 강박은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여러 정신적 재앙도 불러온다. 파괴적 성취 강박은 자기주장과 자기파괴를 하나로 합친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도록 최적화한다. 무자비한 자기 착취는 정신적 붕괴를 불러온다. 잔인한 경쟁 전투는 파괴적인 효과를 낸다. 그 전투는 타인에 대한 냉정함과 무관심을 낳고 자신에 대한 타인의 냉정함과 무관심을 유발한다. (25)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역설적인 죽음 충동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죽은 자는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 있다. 건강 히스테리는 자본 자체의 생명정치적 모습이다.(26)
에로티즘은 연속성의 모험이다. 에로티즘은 경제의 기반인, 각자 고립된 개인의 불연속성과 단절한다. 에로티즘은 나에게 죽음을 준다. 죽음은 타자 안에서 자기 잃기이며, 이 자기 상실이 나르시시즘을 끝장낸다.(31)
자본주의는 죽음을 부정함으로써 형이상학을 상속받는다. 자본주의는 다름 아니라 무한한 자본을 추구하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이다.(32)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또한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삶은 삶 자신을 부정한다. 오로지 삶에게 죽음을 되돌려주는 삶꼴만이 우리를 설죽은 삶의 역설로부터 해방한다.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34)
인격체에 대한 경제적 평가는 인간 존엄의 이념에 반한다. 어떤 인격체도 알고리즘을 통한 평가의 대상으로 격하되어서는 안 된다.(39)
신뢰란 타인의 모름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긍정적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신뢰 덕분에 우리는 앎이 부족해도 행위할 수 있다. 내가 타인에 관한 모든 것을 사전에 알면, 신뢰는 불필요하다. 슈파(독일 신용평가 회사)는 매일 20만 건 이상의 신용 조회를 처리한다. 이것은 통제 사회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신뢰 사회에서 슈파 같은 회사들이 필요하지 않다.(39)
게오르크 뷔히너의 다음과 같은 말은 시의성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우리는 꼭두각시이고, 낯선 힘들이 줄을 당긴다. 어떤 것도,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이 아니다!" (43)
빅브라더의 자리를 빅데이터가 차지한다. 물샘 틈 없는, 삶의 총체적 기록은 투명사회를 완성한다. 그 사회는 디지털 파놉티콘인 셈이다.(46)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의 빅브라더는 단지 바깥에서만 수인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의 내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모른다. 그는 그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다. 반면에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거주자들의 생각에 침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엄청난 효율성이 바로 이 가능성에서 나온다. 거기에서는 사회를 심리정치적으로 조종하는 것이 가능하다.(47)
비밀이나 낯섦, 다름은 한계 없는 소통의 장애물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투명성을 명분으로 제거된다. 투명성 장치로부터 대세 순응 강제가 나온다. 투명성의 논리는 폭넓은 동의를 조장한다. 그 결과는 총체적 순응성이다.(48)
오웰의 감시국가의 특징인 부정의 원리는 긍정의 원리에 밀려난다. 바꿔 말해 욕구들이 억압되는 대신에 부추겨진다. 소통이 억압되는 대신에 극대화된다. 고문으로 짜낸 자백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자발적 사생활 전시와 디지털 영혼 조명이 차지한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체한다. (49)
투명사회는 긍정사회다. 사물이 모든 부정성을 떨쳐 버릴 때, 매끄러워지고 평평해질 때, 자본과 소통과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저항 없이 편입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행위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과정에 예속될 때, 행위가 고유한 특이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가격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행위는 투명해진다. 그림이 모든 해석적 깊이를, 한마디로 의미를 벗어던지고 포르노처럼 될 때, 그림은 투명해진다. 특유의 긍정성을 띤 투명사회는 같음의 지옥이다. (52~53)
진실하려면, "투명성은 신뢰를 창출한다"가 아니라 "투명성은 신뢰를 없앤다"라고 외쳐야 마땅하다.(54)
투명성 요구는 다름 아니라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 드높다. 투명사회는 신뢰가 사라져 가기 때문에 통제에 의지하는 불신 사회다. 주민들 사이에서 깊은 신뢰를 받는 정치인에게는 더없이 경미한 투명성 요구조차도 모욕일 것이다. 드높은 투명성 요구는 다름 아니라 사회의 도덕적 토대가 부실해졌다는 증거, 정직이나 성실 같은 도덕적 가치들이 점점 더 중요성을 잃는다는 증거다. 선구적인 도덕적 권위 대신에 투명성이 새로운 사회적 명령으로 출현한다. (54)
도래하는 것, 다른 것, 결과의 시간으로서의 미래는 디지털 관행의 시간 형태가 아니다. 또 미래는 투명한 것들의 시간성이 아니다. 디지털 관행을 지배하는 것은 단박에 몸소-있음의 시간성, 점과 같은 현재의 시간성이다. 미래를 빚어내기, 더 나아가 다른 미래를, 다른 삶꼴을 빚어내기를 디지털 관행으로 실행할 수는 없다. 손가락 끝으로 버튼을 누리는 활동은 시간적 너비가 없다. 그 활동은 넓은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디지털'이라는 말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우리는 행위하는 대신에 손가락만 놀린다. (64)
생각하기도 탐험이다. 생각하기는 아무도 다닌 적 없는 곳으로 가서 구별하기를 통해 오솔길을 낸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이론이다. 한없이 성정하는 데이터와 정보의 규모는 오늘날 학문을 이론과 생각하기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강력하게 유도한다. 정보는 그 자체로 실증적이다. 데이터를 토대나 추진력으로 삼는 실증학문, 바꿔 말해 데이터를 비교하고 조정하는 작업이 전부인 구글학은 진정한 의미의 이론을 끝장낸다. 실증학문은 한낱 덧셈이나 탐지에 머무를 뿐 서사적이거나 해석적이지 않다. (68~9)
투명사회 혹은 정보사회는 소음 수위가 매우 높은 사회다. 그 사회는 댓글 폭탄 같은 소음과 쓰레기를 아주 많이 생산한다. (69)
자아 혼자서는 의미를 산출하지 못한다. 수집된 데이터는 다음 질문을 답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일까? 휴대용 고해소인 스마트폰은 자기 인식을 제공하지 않으며 진실에 접근할 길도 열어주지 않는다.(73)
데이터-앎 Data-Wissen은 제한적이며 초보적인 형태의 앎이다. 데이터-앎은 인과관계조차도 밝혀내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은근히 절대적인 앎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실제로 빅데이터는 절대적인 무지와 짝을 이룬다. 빅데이터 속에서 방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73~4)
데이터주의는 필시 허무주의와 짝을 이룬다. 데이터주의는 의미와 맥락을 포기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데이터가 의미의 공허를 채워야 한다고 데이터주의자는 믿는다. 온 세계가 파열하여 데이터가 되고, 우리는 더 크고 더 높은 맥락들을 점점 더 시야에서 놓친다. 이런 의미에서 데이터주의와 허무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74)
우울증이나 경계선 성격장애(BPD)를 겪는 사람들은 흔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라고 한탄한다. 자해자의 다수는 우울증이나 경계선 성격장애를 지녔다. 상처 내기는 철저한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느끼려는 시도, 자기 자신을 느끼는 감각을 재건하려는 시도인 것으로 보인다. 몸이 붉은 눈물을 흘린다. 나는 피를 흘린다. 고로 존재한다.(76)
나르시시스적 주체는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계를 지각한다. 이런 지각의 치명적인 귀결은 타인이 사라지는 것이다. 자아와 타인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자아가 확산하고 불분명해진다. 안정된 자아는 타인 앞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반명에 과도한 자기 관련,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은 공허감을 낳는다. 나는 자아에 빠져 익사한다.(77)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경영자로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제에 예속된다. 자기를 생산해재지 못하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면도날을 움켜쥔다.(77)
나는 자존감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타인들의 보상에 의존하여 자존감을 얻는다. 인간의 나르시시스적 개별화, 타인의 도구화, 그리고 총체적 상호경쟁은 보상 풍토를 파괴한다.(78~79)
오늘날에는 어떤 수량화도 거부하는 사전 보상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전 보상은 예컨대 진정한 우정으로 제공된다. 우정은 나를 안정화하고 채우는, 타인과의 관계다. 소셜미디어 안의 "친구들"에게는 타인의 부정성이 없다. 그들은 손뼉 치는 군중이다. 그들은 '좋아요'를 누름으로써 자신들의 다름을 삭제한다.(79)
인간관계와 정체성은 갈등으로부터 발생한다. 사람은 갈등을 붙들고 공을 들이면서 성장하고 성숙한다. 상처 내기가 유혹적인 것은 정체되어 고인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많은 시간을 들여 갈등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 신속한 긴장 해소는 화학적 과정들을 통해 이루어진다고들 한다. 몸에서 자연적으로 약물들이 분비된다고 한다.(82)
셀피 중독도 자기애와 별로 상관이 없다. 셀피 중독은 나르시시스적인 나의 영영 멈추지 않는 공회전일 따름이다. 내적인 공허 앞에서 사람들은 부질없이 자기를 생산하려 애쓴다. 당연히 성공하지 못하는 애씀이다. 오로지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피와 공허한 자아. 이것은 공허감을 심화한다. (82)
폭탄을 터뜨리는 단추 누르기는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빗댈 만하다. 그 장면을 지배하는 것은 상상이다. 왜냐하면 차별과 절망으로 이루어진 현실은 더는 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83~4)
오늘날 연극 연출의 미학적 기본 합의는 "무대 맨 앞에서 관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울부짖기"라고 말한다. 풀이하자면 정면 돌격, 바꿔 말해 관객을 향해 사정射精 하기가 대세라는 얘기다. 배우들은 감정을 생산하여 관객에게 쏟아붓는다. 이런 포르노 연극 혹은 감정 연극에 없는 것은 타자에게 묻고 대답하는 시선이다. 결합도, 바뀜도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85~86)
감정은 느낌과 달리 대화적 구조를 띠지 않는다. 감정에는 타자의 차원이 없다. 따라서 감정을 함께 갖는 일은 없다. 반면에 느낌은 근본적으로 함께 느낌이다.(86)
에로틱한 사람은 비직접성과 우회성을 통해 포르노와 구별된다. 그는 연극적 거리距離를 사랑한다. 그는 실사實事, Sache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에 암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에로틱한 배우는 포르노적인 배우가 아니다. 에로틱한 것은 감정적이지 않고 암시적이다. 반면에 포르노적인 것의 시간 양태는 '곧장'이다. 사정되는 정액의 궤적이 포르노적인 것을 특징짓는다.(86)
과거의 사진은 전시 가치가 없는 대신 예식 가치가 있었다.(95)
우리 사회에서는 전시 가치가 절대화한다. 제자리에 멈춰 있는 모든 것, 자기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는 모든 것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사물들은 전시되고 눈에 띌 때만 가치가 상승한다. 사람들도 상품처럼 행동한다. 자기를 전시하고, 자기를 생산한다(내보인다). 이는 자신의 전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96)
예식 가치를 지녔던 예전의 인간 얼굴은 오늘날 사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페이스북 시대는 인간 얼굴을 페이스 face로 만든다. 페이스의 알파요 오메가는 전시 가치다. 페이스는 바라봄의 아우라가 없는, 전시된 얼굴이다. 그것은 인간 얼굴의 상품 형태다. 바라봄에는 내면성, 겸양, 거리 두기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바라봄은 전시될 수 없다. 얼굴이 상품화되어 페이스가 되려면, 바라봄은 파괴되어야 한다.(96~7)
기억과 역사가 없는 사진, 말하자면 항상 뛰어오르는 중인 사진, 전혀 다른 시간 구조를 가진 사진, 시간적 너비와 깊이가 없는 사진, 덧없는 감정이 이는 한순간에 소진되는 사진, 서사적이지 않고 단지 지칭적인 사진이 발생한다. 뛰어오를 때 온몸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집게손가락의 구실을 하게 된다. 롤랑 바르트가 보기에 사진의 본질은 "이러이러했음"이다. 이 본질은 사진에 예식 가치를 부여한다. 반면에 디지털 사진은 나이가 없다. 운명도 없고, 죽음도 없다. 디지털 사진의 특징은 영원한 지금 여기 있음이다. 디지털 사진은 기억 매체가 더는 아니다. 오히려 쇼윈도 같은 전시 매체다.(97)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들"은 오늘날 카메라 앞에서 뛰어오른다. 새로운 인간이 출현한다. 호모 살리엔스Homo saliens, 곧 뛰어 오르는 인간이다. 이름의 발음은 호모 사피엔스와 유사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핵심 특징인 통찰과 지혜의 미덕은 호모 살리엔스와 거리가 한참 멀다. 호모 살리엔스는 주목받기 위해 뛰어오른다.(98)
우리가 열렬히 사랑하는 스마트폰, 태블릿, 게임 콘솔 같은 제품에 들어가는 희토류는 참담한 노동조건에서 채굴된다. 주로 중국에서 일어나는 이 착취에 모든 산업국가들이 동참하고 있다. 서양의 복지는 타인들의 곤궁에 기반을 둔다. 이는 지구적 자본주의에 본질적인 비대칭이다. 폭력과 불공정은 시스템에 내재한다. 지구적 복지는 자본의 논리에 어긋날 성싶다. (100~101)
영원한 평화에 관한 칸트의 생각은 보편적 "환대"를 요구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욕구에 따르면 모든 이방인은 타국에 머무를 권리가 있다. 그는 적대적인 대우를 받지 않으면서 거기에 체류할 수 있다. "그가 자기 자리에서 평화롭게 행동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지상의 한 위치에 있을 권리를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없다"라고 칸트는 쓴다. 칸트가 실제로 지적하는 세계의 지구화는 세계시민적 헌법과 짝을 이뤄야 한다. (107~8)
칸트적인 의미의 이성은 보편적 규칙을 제시한다. 이성을 보유한 자들은 그 규칙을 자기이익보다 상위에 둔다. 유럽연합의 난민 정책은 오늘날 몇몇 회원국들의 몰이성과 이기적인 자기이익 고수에 발목이 잡혀 좌초하기 직정이다. 자기이익은 이성의 범주가 아니라 지성의 범주다. 자기이익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이겠지만 이성적이지는 않다. 이런 방향 잡기는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 (109)
금액은 지성의 범주인 반면, 존엄은 이성의 범주다.(110)
이익을 따지는 질문은 이성의 결정을 합리적 계산으로 격하한다. 도덕적 이성이 계산하는 지성에 맞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도덕성은 사업 및 계산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도덕성은 어떤 의미에서 맹목적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성은 인본주의적이며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110)
아렌트는 전혀 새로운, 어쩌면 미래에 등장할 난민을 떠올린다. 그 난민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새 국가로 가는 평범한 누군가다.(114~115)
좋은 시민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신조에 따라서 좋다. 그는 자유, 형제애, 정의 같은 도덕적 가치들을 공유한다. 정치적 지배 시스템에 맞선 그의 행위는 그 시스템에 의해 범죄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도덕적(칸트가 말하는 의미의) 신조로 인해 좋은 시민이며 또한 애국자, 나라와 인간을 사랑하는 자다.(119)
내가 가장 바라는 바는 다시 한번 꿈의 나라로, 환대의 나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라면 나는 다시 완전한 의미에서 애국자 곧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도 될 것이다.(120)
유럽은 지리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다. 요컨대 유럽은 인위적인 구성물이며, 그런 연유로 역사적 변동과 재구성을 겪는다. 오늘날 유럽은 순전히 경제적인 구성물로 전락하고 있다. (122~123)
오늘날에는 유럽도 추상적인 경제적 집합체다. 개별 사람들은 등한시하는 그 집합체는 지구적인 상황에 에누리 없이 순응하나. 경제적 추상물로서의 유럽은 도처에서 불만을 유발한다. 모든 추상물은 차이를 평준화한다. 이것이 추상물의 폭력이다.
실제로 지구화는 모든 지역적 차이를 폭력적으로 제거한다. 이는 자본과 소통의 순환을 가속하기 위해서다. 바로 모든 것을 같게 만드는 지구화의 폭력 앞에서, 정체성을 향한 그리움이 깨어난다. 오늘날 정체성은 특히 우익 포퓰리즘 정당에 의해 이용된다. (124)
화해는 또한 자유다. 특수한 것이 추상적 일반자 아래 예속되어 있을 때, 특수한 것은 어떤 자유도 없다. 추상적 일반자는 다양하기 그지없는 저항을 불러일으킨다.(127)
내가 느끼기에 낯선 것은 유혹하는 힘을 지녔다. 같은 것, 지국적인 것은 나를 유혹하고 홀리지 못한다. 정신은 낯선 것을 사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낯선 것이 없으면 영감이 고갈된다.(......) 내가 보기에 낯섦을 빼놓고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진짜 아름다움은 낯설다.(128)
모든 시간 형태가 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추얼 행위를 가속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일 터이다. 리추얼과 예식은 고유시간을 지녔다. 그것들 고유의 리듬과 박자를 지녔다. 마찬가지로 계절과 결합된 모든 행위도 가속을 거부한다. 친밀한 쓰다듬, 기도, 축제 형렬도 가속되지 않는다. 리추얼과 예식을 포함한 모든 서사적 과정은 제각각 고유한 시간을 지녔다. 계산하기와 달리 이야기하는 가속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은 이야기의 서사적 시간구조, 리듬, 박자를 파괴한다.(131~132)
오늘날 노동시간은 시간 전체를 장악하여 단적인 시간으로 되었다. 노동시간은 가속되고 착취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속 비결들은 다른 시간을 창출하지 못한다. 그 비결들은 노동시간을 전혀 다른 시간으로 바꾸지 못하고 단지 감속할 따름이다.(132)
의미는 지속을 창출한다. 의미의 공허가 가져오는 또 하나의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끊임없이 또 방향 없이 소통하는 것이다. 소통 사이의 공백은 마치 죽음처럼 느껴진다. 더 많은 소통을 통해 그 공백을 최대한 신속하게 감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가망 없는 시도다. 소통의 가속만으로는 죽음을 제거할 수 없다.(133)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시간 자체를 인질로 구속한다. 시간 자체를 노동에 매어놓는다. 그러면 성과 압력이 가속 압력을 낳는다. 노동 자체가 반드시 파괴적인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은 "팍팍하지만 건강한 피로"를 유발할 수 있다. 반면에 성과 압력은, 설령 우리가 실제로는 많이 노동하지 않더라도, 영혼을 태워 없앨 수 있는 심리적 압력을 낳는다. 소진은 노동과 관련된 질병이 아니라 성과와 관련된 질병이다.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원리로서의 성과다. (133~134)
신성함과 세속적임을 가르는 경계 혹은 문턱이 제거되면, 오로지 뻔한 것과 일상적인 것만 남는다. 즉, 한낱 노동시간만 남는다. 노동시간은 놀이도 없고 축제도 없는 세속화된 시간이다. 그리고 성과와 효율을 강제하는 명령이 그 시간을 착취한다.(135)
오늘날 반드시 필요한 것은 감속이 아니라 시간 혁명,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혁명이다. 가속 가능한 시간은 나-시간 Ich-Zeit이다. 이것은 내가 나를 위해 내는 시간이다. 하지만 다른 시간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동료 인간에게 주는 동료 인간(타인)의 시간이 있다. 타인의 시간은 선물이며 가속되지 않는다. 타인의 시간은 성과와 효율성을 거부한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간 정치는 타인의 시간을, 선물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제 다른 시간 정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를 고립시키고 개별화하는 나-시간과 달리 타인의 시간은 공동체를 조성한다. 바꿔 말해 공동의 시간을 창출한다. 공동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