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중심으로
시 한 편 읽어 볼까요. 박노해의 <참 착한 사람>입니다.
너무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 마라
그는 길들여진 자일 가능성이 크다
아닌 건 아니다 라고 말할 줄 모르고
언제나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
긍정마인드로 누구나 칭찬하면서
고래도 상어도 춤추게 하는 사람
그는 비즈니스맨이나 정치가일 수는 있어도
영혼이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세상에 옳음도 틀림도 없고
다만 다름이 있을 뿐이라며
진리의 등뼈도 양심의 모서리도
매끄럽게 닳아버린 사람
그의 열린 듯한 자기 중심주의는
엄연한 기득권 세력을 강화시킨다
이대로 가면 세계가 더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면
우리 모두 착하게 잘 적응해내자
아니라면, 불화하고 탈주하고 저항하자
(……)
한 때 노동자에서 혁명전사로, 이제는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하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평화운동을 실천하는 운동가로 살고 있는 박노해의 시가 가슴을 울리나요? 그저 ‘착하게 살라’는 말을 뒤집는 그의 시적 논리에 동의하나요? 시는 이처럼 익숙한 관점을 뒤집고,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을 보게 하지요.
이번에 우리가 다룰 주제는 ‘저항하라’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 위치에 역사상 가장 위험한 사상가(thinker)인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있습니다.
저항의 의미
저항(抵抗)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힘이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맞서서 버팀”입니다. 물리학적으로는 “물체의 운동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뜻도 있지요. 그렇다면 저항은 크게 두 개의 힘의 충돌, 갈등, 긴장 관계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resistance로 표기됩니다. 독일 나치정권과 맞섰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떠오르지요.
‘저항’은 인문학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인문학적 삶을 살았던 사람치고 저항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지적 오만에 저항하여 무지를 가르치다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하구요. 예수는 폐쇄적인 종교 시스템에 저항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합니다. 근대에 와서는 스피노자를 꼽을 수 있겠네요. 유대적 전통의 종교관에 저항하고 보편적 신을 탐구하다가 끝내 추방되어 평생을 렌즈를 깎는 신산의 삶을 살았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체 게바라, 마틴 루터 킹, 간디, 김구, 그리고 최근 다시 이슈로 떠오르는 장준하 선생까지 저항의 역사가 인문학의 역사인 것처럼 착각이 되기도 합니다.
저항의 방식도 여러 가지지요. 전쟁의 시기에는 폭력적 저항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간디의 방식도 있습니다.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중 어느 하나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저항의 강도와 형식을 결정하는 시대적 맥락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항의 역사는 장구합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외적에 침입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병의 저항이 거세었지요.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의 역사가 있었고, 독립이 되고 나서는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는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에 맞선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독재에 맞서 싸운 4.19혁명의 역사를 이어받아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군사독재 맞서 끊임없이 싸운 5.18 광주항쟁의 역사, 6.10항쟁의 역사, 그리고 세월호 이후 박근혜 탄핵까지 이어졌던 촛불항쟁 ……. 어찌 보면 우리나라만큼 불의한 세력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한 역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자신의 몸의 불태운 전태일 열사의 저항, 민주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가 인간다운 권리를 위해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그 저항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분노하라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 중에서,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이라는 93세 레지스탕스의 노전사가 쓴 『분노하라』라는 책이 눈에 띕니다. 독일의 나치와 투쟁했던 레지스탕스 출신의 전사가 이제 죽을 나이가 다 되어 다시 ‘분노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프랑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늙은 전사는 무엇에 ‘분노하라’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낸 것일까요?
“나의 비결, 그것은 물론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분노의 이유는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곳에 행복은 사라집니다. 저항과 분노의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그럼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요? 이 노전사는 비폭력적 저항을 이야기합니다.
“미래는 비폭력의 시대, 다양한 문화가 서로 화해하는 시대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폭력이라는 길을 통해 인류는 다음 단계로 건너가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사르트르와 생각이 같다. 폭탄을 던지는 테러리스트를 용서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1947년에 이렇게 썼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거하는 행위 자체가 자칫 폭력을 영속화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나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이라고.”
나치에 대항하여 총을 들었던 그가 비폭력을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넬슨 만델라나 마틴 루터 킹이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현대에는 이념 대립이나 정복 만능의 전체주의의 시대는 지났다고 하는 그의 시대 진단이 있습니다. 따라서 폭력보다는 협상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그는 믿지요. 하지만 그도 비타협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그 지점은 인권이지요.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하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는 스테판 에셀의 말에 단호함이 느껴집니다.
해석과 변화
인류에게는 수많은 저항가가 있지만, 그중 저항의 아이콘을 꼽으라면 단연 마르크스가 1위일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마르크스를 저항의 아이콘으로 꼽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철학을 관념에서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일 겁니다. 마르크스가 1845년 봄에 자신의 노트에 메모 형식으로 남겨놓은 <포이어바흐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은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글이 될 것입니다.
1.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혹은 관조[직관]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감성적 인간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파악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 — 물론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행위 자체를 알지 못한다 — 추상적으로 발전한다. 포이어바흐는 감성적 객체들 — 사유 객체적과 실제로 구별되는 객체들 —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 그러므로 그는 ‘혁명적’, ‘실천적, 비판적’ 활동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주체와 대상을 이분적으로 나누고, 주체를 중심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근대철학의 전통을 비판합니다. 근대철학이 ‘주체철학’이라는 별명을 갖는 것은, 확고한 주체의 기반 아래 모든 것을 해석해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주체 역시 대상과 마찬가지로 실천을 통해서 변화하는 유동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라는 진술이 그래서 의미를 갖는 거지요. 마르크스의 사상을 계승한 프랑스 철학자 발리바르는 아예 이렇게 말합니다. “주체는 실천이다.(…) 주체는 항상 이미 시작된, 그리고 무한히 계속되는 실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럴게 변화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단단하게 응고되고 고집스럽게 바뀌지 않는 사물[물질, 세계, 생각] 대신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름 중에 있는(in flux) 관계들의 구조화된 네트워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역사 유물론
실천은 변화를 낳고, 변화의 개념 안에는 시간(time)이 항상 개입하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변함없는 세상을 사유하는 추상적 관념론이나 세상의 모습을 물질의 구성요소로 되돌리는 환원적 유물론 대신에 끊임없이 관계가 변화하는 역사적 관점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변화는 운동의 목적(telos)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이 되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흑인은 흑인이다. 그가 일정한 관계에 들어가면 노예가 된다.”는 진술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흑인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을 노동자로 만드는 이 관계의 변화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주인-노예, 자본가-노동자의 관계가 맺어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위대한 사상의 조건 중 하나는 문제를 그 근원까지 파고 들어간다는 점인데요. 마르크스 또한 이 관계의 근원을 파헤치고 들어가 그 정체를 파악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자비한 전쟁과 폭력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牧歌的) 관계를 파괴했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을 타고난 상전들에게 얽매어 놓고 있던 온갖 봉건적 속박을 가차 없이 토막 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노골적인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 계산'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광신, 기사적(騎士的) 열광,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황홀경을 이기적인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교환 가치로 해체했으며, 특허장으로 보장되거나 투쟁을 통해 얻어진 수많은 자유 대신에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즉 상거래의 자유를 내세웠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정치적 환상에 의해 가려져 있던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도 잔인한 착취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 철학자 푸코는 이 자본주의 형성기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광기와 처벌』이라는 방대한 서적에 낱낱이 고발하고 있지요. 봉건제 사회에서 토지를 빼앗기고 부랑자로 떠도는 농민들, 자본주의적 삶에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저항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힘든 공장생활에 불만을 느끼고 탈출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광인으로 낙인찍히고 감금되고 감시받고 처벌을 당해서 결국은 노동자로 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그 고통과 피흘림의 역사를 다양한 사례로 이야기했지요. 마르크스는 이 인류의 역사를 간략하게 진술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소외
역사 변화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계급투쟁의 양상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경제학적인, 현재의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노동자는 더 많은 부를 생산할수록, 그의 생산이 힘과 범위에서 더 커질수록, 더욱더 가난해진다. 노동자는 더 많은 상품들을 생산할수록 더욱더 값싼 상품으로 된다.(…)
이 사실은 다음의 것을 표현할 따름이다.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즉 노동의 생산물이 하나의 낯선 존재로, 생산자로부터 독립적인 힘으로 노동과 대립한다는 것, 노동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체화된, 사물화된 노동으로서, 노동의 대상화다. 노동의 현실화는 노동의 대상화다. 노동의 현실화가 이런 경제적 조건 아래서는 노동자의 현실성 상실로서, 대상화는 대상에 대한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서, 전유는 소외로서, 외화로서 나타난다.
정치경제학은 노동자(노동)와 생산 사이에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 소외는 4중의 불가피한 소외와 관련됩니다. 1)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 2) 생산활동으로부터 소외, 3)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 4) 사회성으로부터 소외. 좀 더 이야기해보죠.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한 생산물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이 낳았으나 자식을 갖지 못하는 대리모처럼.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산 자본가의 지시와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모던 타임스』를 상상하시지요.) 이는 생산활동을 통해 더 나은 자아를 생성해가는 인간 본연의 활동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고용된 개인으로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들과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자본주의적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천재적 통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서 찾았습니다.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생산의 잉여 결과물은 사적으로 소유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입니다.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을 철폐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 경제학이 지향하는 바이며, 그것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행한 정치경제학 비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을 더욱 정교하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학문 영역을 경제학으로 옮겨갔던 거지요.
프롤레타리아
그렇다면 그러한 소외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을까요?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일종의 대답을 내놓습니다.
“[그 가능성은] 뿌리 깊은 굴레에 얽매여 있는 한 계급, 결코 시민사회의 계급이 아닌 시민사회의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인 한 신분, 자신의 보편적 고통 때문에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부당함이 아니라 부당한 그 자체가 그들에게 자행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 한 영역, 더 이상 역사적 자격을 주장할 수 없고 단지 한 인간의 자격만을 주장할 수 있는 한 영역, 독일 국가 제도의 귀결들과 일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한 영역, 마지막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을 해방시키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는 한 영역,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완전한 상실이고 따라서 인간의 완전한 되찾음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한 영역의 형성에 있다. 하나의 특수한 신분으로서의 사회의 이와 같은 해체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다.
(…)
이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요, 그 심장은 프롤레타리아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양 없이 철학은 실현할 수 없으며, 철학의 실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지양할 수 없다.”
오늘날의 노동자를 상정하는 걸까요? 이 진술은 약간은 종교적, 선언적 뉘앙스를 갖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예상하는 인간의 조건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상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자본가 계급에서 노동자 계급으로의 전화가 아니라, 계급에서 비계급으로의 전화, 즉 또 다른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가 사라지게 만드는 것, 그래서 인간 위에 군림하는 특정한 인간의 없게 만드는 것. 확고한 계급의 형성이 아니라, 계급 자체의 폐지.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예수의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과, 부처의 ‘무아(無我)’가 떠오릅니다. 마르크스의 낭만주의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
그때 『공산당 선언』의 맨 마지막 구절도 이해가 됩니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마르크스의 선언이 장엄하게 끝났으니, 나도 박노해의 시로 마감합니다. 제목은 <아니다>입니다.
억압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고독하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