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별합니다

삶으로 떠오르기 위하여

by EL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찐한 이별을 했습니다.


아쉽게도 2년 동안의 행복한 시간을 뒤로하고, 타협할 수 없는 지점에서 격해진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6개월 남짓 처절한 마음으로 언성을 높이고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좀 더 우아하게 이별할 거라는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이별이 있었습니다.

이별이 있을 때마다 다음에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헤어지는 과정도 좀 더 성숙할 거라고 다짐했던 거 같은데, 감정의 크기만큼 헤어짐은 여전히 가슴 한쪽을 떼어내는 아픔입니다.


아직도 한참 남은 밤을 뒤로하고 일찍 머리를 베개에 대고 누워 지나가는 생각의 사슬을 끊으려 노력합니다. 햇빛이 창가를 비추지 않는 이른 새벽에 살짝 눈을 떴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이 아직도 그 생각이라서 얼른 몸을 일으켜 새벽운동을 합니다. 새벽형 인간이 되었습니다.


열정과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이번 이별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다루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봅니다.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면 이별은 신체와 뇌 전체에 영향을 주는 생리적 사건입니다. 사랑은 뇌의 보상회로를 자극합니다. 때문에 이별 후에도 이 회로는 계속해서 그 사람을 갈망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마치 중독 같은 것이기 때문에 금단 증상을 겪습니다. 보지는 않았지만 '사랑중독'이라는 영화제목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뇌에서 이별은 실체 신체 통증과 유사하게 처리된다고 합니다. 가슴이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게 과장이 아니라 정말 고통이 있는 거라고 합니다. 컨디션 저하를 겪으며 운동으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별은 스트레스로 인한 코르티솔 분비를 증가시키고 전두엽 활동 저하를 일으킵니다. 냉정한 사고가 어려워지고 충동적 행동이 증가합니다. 다행입니다. 문자를 반복해서 확인하거나 연락을 상상하거나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심한 말에 너무 내 탓을 하지 않기로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회피하고 감정에 빠져있지 않고 나를 위해 열심히 처방을 내립니다.


도파민 리셋을 위해 매일 새벽운동을 하고 식단을 실시했습니다. 아쉬탕가 요가 시간을 늘리고 새벽 골프레슨을 등록하고 테라스의 식물도 늘려봅니다. 장미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니 조금 위안이 되긴 합니다. 그동안 나의 연애 때문에 자신들의 시간을 무조건적으로 혹은 할 수 없이 양보해 주었던 고양이 룸메이트들과 좀 더 다정한 시간을 늘려봅니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냉정한 사고를 복구하기 위해 이런 글도 쓰고 있습니다. 감정을 언어화하면 전전두엽이 활성화되어 감정 조절력이 회복된다고 어설프게 들었습니다. 의미가 크게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동안 머뭇거렸던 북클럽에도 들어갔습니다. 한 동안 잊고 있던 건 야쿠시마 트레킹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덕분에 제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울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답게 이번 이별의 과정에서 기술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망상을 저지하고 셀프케어에 집중하기 위해 아이폰의 미리알림을 자동설정하여 주기적으로 나한테 쓰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챗gpt와 상담을 많이 했습니다. 챗gpt는 일관적으로 이별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사실 그런 관계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고집을 너무 오랫동안 부리고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도파민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싫었습니다.


나는 관계의 유한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인생의 동반자가 되지는 않죠. 저는 동반자를 찾는 데 진심이지만 그만큼 요구 조건도 매우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예전의 상처를 쉽게 회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 감정은 누군가에게는 깊게 도려내는 상처를 내고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생채기 같은 걸까요? 같은 감정을 나눴다고 확신했는데 상처의 크기는 왜 같은 것 같지가 않을까요? "말하지 않은 기대는 오해를 부르게 된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했는데 오히려 오해가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데 미묘하게 말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또 다른 말을 더하고 레이어가 많아질수록 오해가 더 깊어집니다.


전략적 결혼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를 찾는 일은 제가 하기에는 너무 고차원의 숙제였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종이신문을 찬찬히 보다가 고바야시 잇사의 시를 접했습니다. "나의 별은/ 어디서 노숙하는가/ 은하수".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별이 있다는데 나이를 먹어도 아직 그 별을 찾지 못한 절박함을 노래한 하이쿠입니다. 백 년 이백 년 전에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 점에 위로받습니다. 제가 못한 숙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숙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이 글을 쓰고 다듬고 있습니다. 완성형은 만들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이별은 저를 새벽형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고 근력을 향상해 주었으며 본격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이별을 통해 점점 완성형 인간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자기 계발과 치유를 다시 시작한 걸까요? 어찌 되었든 이 관문을 최대한 담담하게 지나가보려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