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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예술은 어떻게 손 잡았을까

근대디자인사 #7. 독일공작연맹(DWB)

by 공일공스튜디오
대지 1 사본 7.png


✍ 협업은 양식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회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1907년, 뮌헨. 건축가 페터 베렌스, 헤르만 무테지우스, 헨리 반 더 벨데를 비롯한 예술가와 기업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목표는 단순했다. 기계가 만든 무질서한 상품의 홍수 속에서, 예술과 기술을 다시 화해시키는 것. 이름은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이었다.

이 협회는 “장식”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의 문제를 다루었다. 제품·건축·그래픽을 넘어, 기업과 교육·전시와 규격을 잇는 새로운 플랫폼을 설계한 것이다.




규격의 철학 ― 무테지우스 vs 벨데


공작연맹의 내부는 출발부터 긴장으로 가득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산업 시대의 디자인은 표준화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규격화된 제품이야말로 대중에게 좋은 디자인을 보급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반면 헨리 반 더 벨데는 예술가의 개성과 창의성이야말로 디자인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기계적 표준화는 디자인을 영혼 없는 껍데기로 만든다고 반박했다.


84bfb848d7b11.png 무테지우스 • 벨테 초상 - (Hermann Muthesius, 1861–1927 / Henry van de Velde, 1863–1957)


이 논쟁은 단순한 취향의 차이가 아니었다. 산업의 논리와 예술의 자유가 부딪힌 첫 공식 무대였다. 공작연맹은 이 대립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균열을 조직의 동력으로 삼았다.




기업과 예술가의 동맹 ― 제품이 곧 문화가 되다


공작연맹의 가장 혁신적인 실험은 기업과 예술가의 직접 협업이었다. 가구, 식기, 포스터, 건축까지 상품이자 예술인 결과물이 등장했다. 전시회를 통해 좋은 디자인의 기준을 사회에 공개했고, 기업은 예술적 권위를 얻는 동시에 예술가는 산업적 기반을 확보했다.


00f44e2fead8b.png 페터 베렌스가 디자인한 AEG 전기제품 - Poster for AEG Light Bulbs / Electric Kettle


여기서 디자인은 더 이상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업의 얼굴이자 사회적 언어가 되었다. 오늘날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기업 이미지 전략의 시초였다.




전시와 교육 ― 총체적 경험의 설계


1914년 쾰른 박람회에서 공작연맹은 독일관을 선보였다. 베렌스와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건축은 대칭과 단순성으로 합리적 미를 드러냈다. 전시 구성은 제품, 포스터, 안내 체계까지 일관된 규칙으로 연결되었다. 관람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체계와 경험의 설계로 연출되었다.


90b7e89ad4409.png 1914 쾰른 박람회 독일관 - German Pavilion, Werkbund Exhibition Cologne


공작연맹은 또한 교육을 중요시했다. 예술학교와 공업학교를 연결하고, 후일 바우하우스로 이어질 예술-기술 통합 커리큘럼의 기초를 닦았다.




바우하우스로 이어진 철학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공작연맹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우하우스에서 제도화되었다.

공예와 산업,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 교과과정으로 편입되었고, 장식보다 기능, 과시보다 합리성이라는 모토가 정착했다. 윌리엄 모리스가 강조한 삶의 철학은 기계 시대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4fecc6a32998d.png 바우하우스, 바실리 체어 - Bauhaus Dessau, Wassily Chair


즉, 공작연맹은 바우하우스와 모더니즘 디자인이 싹트는 토양이었다. 기술과 예술의 협업이야말로 근대 디자인의 새로운 철학임을 입증한 것이다.




협업은 곧 시스템의 디자인이었다


독일공작연맹은 스타일을 정한 단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산업과 예술이 만나는 방식 자체를 재설계한 협회였다. 기업과 예술가의 계약, 전시와 교육의 시스템, 제품과 그래픽의 일관성이 그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을 사회적 계약으로 세운 사건이었다.


오늘의 질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은 어떻게 예술과 협력하고 있는가?”

“디자인은 협업을 사회적 가치로 번역하고 있는가?”


1907년의 공작연맹이 던진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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