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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켓 Mar 20. 2017

걷기왕 (Queen of Walking, 2016)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조급해하는 당신에게

*스포 有




'공부는 하기 싫고, 예체능은 쉬워 보이고' 아마 예체능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특히나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찾아가는 시기에 있는 학생이라면 더욱 와 닿을 것이다.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나 역시 예능을 전공 한 사람으로서 <걷기왕>을 보며 많은 부분에 공감할 수 있었고, 이 영화가 비단 청소년만을 위로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꿈과 열정을 강요당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꿈이 없으면 한심하고, 열정이 없으면 어디서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세뇌당하는 느낌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만복(심은경)은 어렸을 때부터 선천적 멀미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체질 덕분에 무엇도 타지 못하고 어디든 걸어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만복. 그런 만복에게 꿈을 찾아주고 싶은 담임 선생님은 경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차여차 운동부에 들어갔지만 경보의 '경'자도 모르는 만복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 바로 운동부 선배 수지다. 육상 유망주였던 그녀는 부상으로 인해 운동을 포기해야 했지만, 달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무섭기만 하고, 결국 죽을 듯이 재활해서 경보 선수로 전향하게 된다. 이렇게 모든 것을 걸고 운동하는 수지는 만복이 반가울 리가 없다.

처음으로 경기에 출전하게 된 만복은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바로 경기장이 있는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것. 멀미를 하고 패치를 듬뿍 붙여가며 경기장에 겨우 도착했지만, 컨디션 저하로 인해 시합을 망치고 만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열정과 근성이 부족해서라며 나무라고, 학교에서는 지수가 만복이는 처음부터 할 마음도 없던 아이라며 운동부에서 쫓아내자고 말한다. 자신이 처음으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마음에 들떠있던 만복은 그런 얘기들을 들으며 경보를 그만두기로 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난다. 그 모습을 보며 만복이가 단지 질타를 받아서 운 것이 아니라, 경보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에 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말한다. 열정이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 또는,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노력을 부추기기만 할 뿐 아무도 도움을 주거나 책임을 나누지는 않는다. 위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복이 무언가를 해내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칭찬하는 사람은 없다. 조금 실수하고 한번 넘어진 것에 대해 질책하는 모습만 있을 뿐이다. 단기간 내에 성과나 결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안되는구나'라며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의 모습과도 같다.

만복의 단짝인 지현(윤지원)은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자신은 공무원이 되어 칼퇴 후 집에서 맥주 한 캔 마시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벌써부터 적당히 하면 안 된다며 조금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담임의 말에 지현은 힘들어 죽겠는데 왜 참아야 하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만복이처럼 대회에 나가는 것만 열정이고 꿈이냐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꿈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뜻하는 '꿈'이라는 것은 누구의 기준에 맞추어져 있는 걸까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우주정복도, 입에 풀칠하며 먹고 살 정도만 버는 평범한 인생도 누군가에게는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고민과 방황을 하던 만복은 결국 다시 운동부로 돌아가고, 운 좋게도 지난번 예선 탈락했던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된다. 부상을 견뎌내면서까지 연습에 매진하는 만복. 과거 버스에서의 멀미 때문에 고생했던 만복은 이번에는 경기장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그런 만복의 옆에 지수가 함께했다.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는 차들. 도착 지점은 같지만 만복과 지수에게는 천천히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목표가 있다면 빨리 가지 않더라도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느꼈다.

경기장에 도착 한 만복은 예정대로 시합을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빨리 걸은 탓에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선수들 또한 불안감에 속도를 높이다 결국 충돌하고 만다. 바닥에 쓰러져 상처 난 자신의 발을 보는 만복의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고, 만복은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문득 왜 이렇게 빨리 달렸던 걸까 되돌아본다. 심판이 계속 뛸 건지 말 건지 묻자 만복은 "아뇨, 그만할래요."라고 말한다.

주어진 휴식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개인의 시간이 부족한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선택한 일임에도 현실과 타협하다 보면 누군가는 상처 나고, 지쳐 쓰러지고 나서야 하늘을 볼 여유가 생긴다.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레이스에서 나만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에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걷기왕>을 보고 난 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내가 무언가를 할 때는 '기왕이면 1등인 게 좋지'였지 '반드시 1등을 하자'가 아니었고, 만복이 역시 걷기를 좋아해서 경보 시합까지 나가게 된 것이었지 1등을 하려고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복이가 처음 좌절했을 때, 담임 선생님이 다른 친구에게 진로를 추천하는 모습을 보는 장면에서 리코더로 연주하는 타이타닉의 OST가 흘러나온다. 음 이탈도 심하고 불안정한 호흡이지만 그 배경음악은 후렴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우리가 무언가 하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을 꾸준히 한 걸음씩 밟아가고 있다면, 잘 하고 있는 것이니 속도에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만 나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담 1. 개인적으로는 눈물이 날 뻔했을 정도로 뭉클했던 영화여서 평점이 왜 낮은지 잘 모르겠다.

여담 2. 정돈이 역으로 나온 안승균 배우 너무 귀엽다. 헤어 스타일 때문인지 에즈라 밀러가 자꾸 생각난다.
필모는 많지 않지만 올해 초 방영되었던 솔로몬의 위증과 작년에 했던 공연인 렛미인에서 얼굴을 많이 알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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