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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 패턴

by 김수빈

나와 오랫도록 관계를 유지하는 지인들을 보면 나의 봉사와 헌신에 감사함을 느끼고 이를 표현하거나, 혹은 나와 같이 내게 봉사와 헌신을 실천하는 이들이었다.

내가 타인에게 헌신을 하는 것이 꼭 '내게 나와 같은 수준으로 헌신해'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하는 행동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너에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타인이 이를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나 애정을 느끼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나의 헌신을 나중에는 당연히 여기고 심지어는 내게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공격모드로 돌변하여 분노하였다.

(말하다보니 싸이코같다.)


그럼 여기서 타인이 내게 쓸데없는 기대를 하고

받은 것을 당연시 여겼으니 타인의 잘못이라 할 수 있는가?

뭔가 타인을 탓하는 글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타인을 저격하는 글이 아니라 나의 행동에 대한 이해다.


결국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생각한다.

내가 헌신하는 나의 엄마에게 가진 기대처럼.

엄마에게 안쓰러움과 속상함, 미안함, 부채감 등을 가지면서도 기대하는 것처럼.


엄마의 대인관계적 패턴에 나 역시 자연스레 끌려갔고, 나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엄마와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결국 타인의 기대에는 나의 책임도 있었다.

이것을 뭐 교통사고 현장처럼 몇대몇의 잘못이라 말하거나,

니 잘못이니 내 잘못이니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서로의 전이와 역전이, 투사적동일시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일어나고 있는 과정일 뿐.


그렇게 대상과 관계를 맺어왔고,

초기 대상관계를 계속해서 반복하게끔 만드는

나도 모르는 나의 투사적 동일시.


타인에게 어떠한 반응을 끌어내게끔

무의식적으로 하는 나의 행동,

그리고 이는 타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반복된 관계 패턴 안에서 나는 애정하는 이들에게 강한 분노와 적개심을 느끼고 그들을 떠나 보내기도 했다.


내가 타인에게 헌신함으로서, 그들이 내게 기대하게끔 만드는 행동 패턴을 반복함으로서.


내가 타인에게 이러한 나를 투사하고서,

타인이 내게 투사되어 동일시를 보이면

나는 또 분노를 느끼고 공격을 해댔다.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모든 상담사는 투사적 동일시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다.

어린 시절 맺어온 초기 관계 패턴은 계속해서 투사적동일시에 의해 반복되어 간다.

그래서 상담에서 상담사는 무의, 중립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들 한다.

중립의 위치에서 깨끗한 거울이 되어 내담자를 비춰주고 싶지만

상담사 역시 수십년을 살아온 역사가 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상담사의 중립성을 강조하는 정신분석과 달리 이후 파생된 이론들에서는 상담사의 역전이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알아차리고 치료에 활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전에는 투사적동일시를 머리로 이해했다면

상담에서 이를 직접 경험하면서 나의 모든 대인관계에서의 패턴들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를 어찌해야 하느냐.

상담에서 상담사가 투사적동일시를 알아차리고 이에 휩쓸려가지 않는, 패턴에 끌려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그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나의 이러한 대인관계적 패턴을 이해하고 이러한 패턴이 역기능적으로 흘러가는 경우 이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타인에게 어떠한 기대심을 심어주는지 나의 행동을 돌아보고 이해해야 하며,

그러한 기대가 당연시되어 돌아오는 경우 내가 경험하는 분노에는 나의 책임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패턴을 만드는 것은 나의 의도이기도 했음을 나는 이해하고 그 악순환들을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투사적동일시가 일어났던 그 날, 곧바로 나는 수퍼바이저를 찾아가 이를 다루었다.

나를 자극하는 내담자의 보호자의 행동에는 명백한 나의 책임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다루어 나가면 좋을지 방향을 잡았다.


상담의 이론에 따라 상담의 목표와 접근법이 달라지겠지만 상담에서 상담사들이 하는 일들은 그리 다르지 않다.

내담자의 관계적 패턴을 확인하고 이를 내담자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상담 관계 안에서 투사적 동일시를 다루어 나간다.


상담사가 말로서 당신이 이러한 전이를 보이는 군요 라고 해석해주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내담자 스스로가 이를 깨닫고 자신의 입으로 내뱉을 때까지 상담사는 문제를 대신 풀어주지 않는다.

대신해주는 것이 얼마나 빠른 길인지는 알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빠른 해결이 아닌, 내담자가 앞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자신의 문제를 그때그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낼 수 있도록..

내담자가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여 언제든 꺼내어 쓸 수 있도록.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보호자가 미웠다.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호자와 나의 관계 패턴에 얽혀있는 전이과정들을 알아차리고 나니

보호자가 나쁜 사람도, 그리고 내가 나쁜 사람도 아님을 알게 된다.

그저 우리의 관계 패턴이 이를 계속해서 끌어들이고 있는 것.


그리고 날 자극하는 그러한 보호자를 만난 덕분에 나는 나의 관계 패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는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민감해지고,

내가 어떤 대처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역기능적으로 나타날땐 어떠한지..


이렇게 깨닫고나니 보호자에게 감사함마저 든다.

나의 밑바닥을 드러내도록 하는,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줄 알기에.


그렇게 나의 역전이를 나는 다루어 나가고 있다.

내담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상담사로서 개인의 문제가 상담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이렇게 경험하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결국 세상은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 각자가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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