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건넨 와인을 마시고 기억을 잃다.
막상 좋은 기회가 생기니 마냥 좋을 줄만 알았던 기분이 뭔가 죄지은 것 마냥 찝찝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친구와 시드니 시내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일차로 소주와 한식을 먹고 2차로 춤을 추러 Star bar에 갔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을 경찰관이라고 소개하는 그리스 출신의 남자를 만났다.
오늘이 쉬는 날이라 남들처럼 즐기러 나왔단다.
아.. 경찰관도 남자구나.
그가 우리에게 바닷가 뷰가 보이는 좋은 곳을 안다며 거기 가서 와인을 마시자고 했다.
한껏 흥이 나있던 우리는 쿨하게 오케이~!!! 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고요하고 잔잔한 밤바다를 안주 삼아 그의 차 트렁크에 있던 와인 두병을 나눠 마시기 시작했고,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아오 머리 아파... 여기가 어디야?!?"
기억도 잃고, 숙취에 쩐 내가 눈을 떠보니 낯선 방의 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서둘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상황이 영화였다면,
방금 샤워를 마친 섹시한 남자가 골반에 타월을 두르고 젖은 머리를 손으로 말리며
"일어났어? ^^" 하고 미소지으며 다가오겠지.
나의 현실은 다행히도(?) 같이 놀았던 언니가 상상 속의 인물과 같은 대사 "일어났어?"+"이년아?"를 읊으며 등장함과 동시에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
언니가 술에 떡이 된 내 뒤치다꺼리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나 보다.
'미안하고 고마워.... 언니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네..'
술병이 제대로 났다. 일단 뭘 좀 먹어야만 했다. 해장을 하기 위해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해물만두 국수를 시켜 국물까지 다 빨아먹었는데도 여전히 갈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카페에 가서 녹차라테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정말이지 살이 왜 찌는건지 알 수가 없다. ^^;
불금이 다가왔다. 나가 놀고 싶어 근질근질한 몸을 풀어주기 위해, 같이 놀 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다들 안된다고 했다. 시무룩해져 있는데 때 마침 경찰관 피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벽 1시에....
술을 먹자는 것이다. 내 마음을 읽어준 것 같아 또 흔쾌히 오케이하고 나가려는데, 아직 아이들의 부모가 안 자고 주방에 나와있었다.
주방을 통해서만 현관문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그 시간에 나가는 것이 눈치가 보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부모가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나갔다.
한국에서나 호주에서나 부모님 몰래 밤에 나가는 건 왜 이렇게 무섭냐...
피터가 나를 태우고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까 봐 겁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꾸 사방을 둘러본다.
'사복을 입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가 경찰관인지 어떻게 알아본다는 거지?'
그의 태도가 조금 수상했다.
그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또 트렁크에서 화이트 와인 두병을 꺼냈다.
참고로, 호주에서는 야외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불법이다.
갑자기 그가 무서워진다. 만약 그가 경찰이 아니라, 연쇄살인범이라면??
머릿속에선 온갖 시나리오가 다 펼쳐진다.
아뿔싸! 저번에 같이 술 마셨을 때 내가 완전 기억을 다 잃은 것도 이상하다.
내 주량에 웬만해선 그렇게 갑자기 기절하진 않는데....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다.
그런데 이놈은 자꾸 내게 술을 권한다. (한국 회사 상사인 줄...)
그러더니 내게 혹시 마약 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헉............
경찰이라는 사람이 뭐 이래???????
내 장기들이 속에서 소리친다.
'나가!! 이 차에서 당장!! 위험한 사람이야!!!!!'
새벽 2시가 넘은 이 늦은 시각. 나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공원에 이 수상한 남자와 단둘이서 차 안에 갇혀 와인을 마시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다. 이번엔 나를 도와줄 언니도 없다.
나는 왜 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는 것인가....
정말 무서웠지만 최대한 침착하며 차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문이 잠겨있다.
............
머리가 새하얘진다.
하지만 내가 지금 겁에 질린 것을 그에게 들켜선 절대 안 된다.
스릴러 영화에서 보니까 충동적인 행동들이 살인범들을 더 자극하는 것 같으니,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은 척하며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겠다..
그가 문을 열어줬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히 우리 집과 그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뛰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바깥공기가 이렇게 신선한 것인지 새삼 느꼈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기다려. 집에 태워다 줄게"
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는 그의 문자를 씹었다.
그러자 전화가 온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서 거짓말을 했다.
"나 이미 집에 도착했어! 잘 가!"
공포심+전력질주로 인해 비 오듯 흐른 땀으로 샤워를 했다. 당장이라고 끊어질 것 같은 숨을 고르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나에게는 인생을 새롭게 살 수 있도록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만 같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정체를 모르고... 그 날 그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다.
가령 그가 진짜 경찰관이었다고 한들, 평소에는 정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근무가 끝나고 나면 가면을 벗고 불법행위들을 저지르며 그가 체포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 된다는 것은 정말 비열하고 파렴치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불안해하는 그를 보니,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더 조심해야겠다.
귀가 닳도록 듣는 말 "조심해"는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직접 그 위험을 느낄 때 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