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로 꿈을 꾸는 누군가의 이야기
영화 <Past Lives>
남자친구 초록이는 내 꿈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에 의하면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고 깬 후에도 디테일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꿈이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학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꿈의 정체란 논리 없고 개연성도 없는, 뇌 구석구석에 저장된 정보와 감정들이 랜덤으로 뒤섞여 나타나 해석 불가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초록이는 내 꿈 이야기에서 현실과 관련된 요소를 찾고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탐정놀이를 좋아한다. 그가 내 꿈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니까 나는 꿈에 뭐가 나왔는지에 대해 그와 자주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내가 혼자 꿈에 대해 생각하고 지나가버렸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점들이 흥미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꿈에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초록이는 '한국에서 만났어? 독일에서 만났어?' 또 '그럼 한국어로 대화했겠네?'같은 것들을 물어본다. 그래서 내 꿈의 공간적 배경은 대부분 한국이고 나는 꿈에서 주로 한국어를 쓴다는 사실을 초록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깨닫게 되었다.
친구들과 만날 때, 그리고 학교에서는 독일어를 쓰고 회사에선 영어를 쓴다. 일상에서 한국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적음에도 불구하고 내 꿈속 공용어는 여전히 한국어다. 잠자는 상태에서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말이 내겐 우리말 밖엔 없다. 그러니 나는 우리말을 향한 비밀스러운 목마름을 늘 갖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주말에 한국 출신 캐나다인인 셀린 송 감독의 영화 <Past Lives>를 보러 갔다가 딱 이런 맥락을 담은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열두 살 때 캐나다로 이주한 여주인공 나영(영어 이름은 노라)이 뉴욕에서 이민자 출신 작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실제 열두 살 때 캐나다로 이민했다고 알려진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를 듬뿍 담았다. 나영은 (영어로) 글을 쓰며 커리어를 쌓고, 미국인과 결혼했으며, 한국에서는 늘 1,2등을 차지하는 모범생이었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한국어가 어눌하다. (영화 속에선 한국어와 영어가 반반 정도 쓰인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영의 어린 시절 첫사랑 해성이 나영의 현재의 삶에 찾아든다. 둘은 긴 세월을 지나 뉴욕에서 재회하게 되는데 이 둘 사이의 어떤 애틋함은 미국인 남편 아서에게 감지될 정도다. 나영과 마찬가지로 작가인 아서의 말에 따르면 해성과 나영의 '인연'은 남편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럽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훌륭한 서사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문학 작품이었다면 남편인 자신은 둘의 러브스토리를 훼방하는 '못된 미국인'정도로 그려질 것 같다고.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한국에서 온 첫사랑이 나영에게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아서는 이런 말을 한다.
"자기 잠꼬대는 늘 한국어로 하더라. 그건 당신의 세계 중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어떤 부분이지만 당신에겐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곳이겠지."
나는 왜 이 별 거 아닌 장면에서 펑펑 울었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끝난 후, 초록이는 '왜'라는 한국어 단어를 하나 더 알게 되었고 나는 초록이로부터 향수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담담한 몸짓으로 살금살금 다가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침투하는 힘을 가진 영화였다. 나는 영화 속 나영이처럼 부모의 손에 끌려 이민한 것이 아니라 제 발로 남의 땅에 온 입장이고 나영이보다 한국말을 훨씬 잘하긴 하지만, 또 한국에서 날 보러 독일까지 오겠다고 할 어린 시절 첫사랑 같은 것도 없지만, 어디서 무얼 하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늘 내 주변을 달처럼 맴도는 '한국적인 것'과의 묘한 관계는 꼭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2024년 개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