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수베로카소 부부의 초상과 베네치아 풍경은 어떻게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14)

by 최금희


존 싱어 사전트, 마담 라몬 수베르카소(Ramon Subercaseaux) 아말리아 에라수리츠 우르메네타(Amalia Errazurz y Urmeneta), 1880년 초, 캔버스에 유채, 165.1x109.9cm, 휴스턴 사로핌(Sarofim) 재단



1880년 파리 살롱에서 존 싱어 사전트의 전시에 매료된 칠레 출신 라몬과 아말리아 수베르카소는 젊은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이 만남은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를 넘어, 오랜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


그는 부부의 세련된 아파트에서, 연주를 잠시 멈춘 듯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그렸다. 흑백의 우아한 드레스에 담긴 아말리아의 매혹적인 모습은 사전트의 탁월한 기교와 더불어 젊은 부부의 부와 세련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1879년, 아말리아는 불과 18세에 화가이자 정치가, 외교관이었던 라몬과 결혼했다. 같은 해 남편이 독일과 이탈리아 주재 칠레 공사로 임명되면서 부부는 유럽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1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화가, 수도사, 외교관, 작가, 대주교로 성장해 칠레 사회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여했다.


<마담 라몬 수베르카소> 부분



아말리아의 눈빛은 총명하게 빛났고, 야무진 입매는 흔들림 없는 의지가 느껴졌다. 중동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과 교황청 대사 부인의 경험은 훗날 출판되어 칠레의 가톨릭 문학 작가이자, 나라 최초의 여행 작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된다. 1912년에는 아멜라 에드워즈 살라스와 함께 칠레 여성 연맹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으며 여성 지성의 목소리를 이끌었다.


사전트가 그린 첫 초상화는 그를 세련된 파리지앵의 초상화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지만, 전시장에서는 미묘한 긴장도 감돌았다. 역시 사전트가 초상화를 그려준 극작가 에두아르 파이예롱을 비롯한 일부 관람객들은 그녀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사전트는 그해 살롱에서 2등 메달을 수상했고, 이후에는 심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마담 라몬 수베르카소> 부분



1880년대 초, 사전트는 파리의 스튜디오 작업과 여행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공적인 경력을 확립하기 위해 점점 더 야심적인 작품을 구상했고, 무엇보다 수십만 명의 관객이 몰려드는 파리 살롱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실제로 살롱은 작가 이름을 알파벳 순으로 배열해 수천 점의 작품을 바닥에서 천장까지 빼곡히 걸어두는 장대한 전시장이었다.


1881년, 한 프랑스 평론가는 사전트의 초상화에 대해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매혹시키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드문 재능을 지녔다”고 평했다. 이러한 평가와 함께 그의 대담한 작품들은 국제 사회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사전트는 점차 더 많은 의뢰를 받으며 명성을 넓혀갔다.


<마담 라몬 수베르카소> 부분



파란색 카펫 위에 놓인, 친정어머니가 오래전 ‘자개장’이라 불렀던 나전칠기 문갑이 초상화의 배경으로 은은히 드러난다. 이는 동서양의 교차점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호였다. 일본의 나전칠기 기법인 마키에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어 17세기 후반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열풍 속에서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동양 장식품의 매혹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1854년 남편 라몬 수베르카소는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나 비냐 델 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발파라이소에는 칠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살던 라 세바스티아나(La Sebastiana)라는 생가가 있다. 네루다는 인도네시아, 태국의 영사로 지내 동양 문화의 익숙해 침실 붙박이장 문에는 중국 미인도가 여러 장 있었다. 비냐 델 마르에서는 발파라이소의 불빛이 바다 건너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가깝게 빛난다.


칠레 발파라이소에 있는 파블로 네루다의 생가는 '바다의 선장'라는 그의 별명처럼 태평양으로 내달릴 준비를 마친 여객선처럼 보인다.


그림1.jpg 네루다의 침실 붙박이 장에 중국 미인도로 장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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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층에 위치한 침실에서는 눈을 뜨면 태평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반원형 창가의 유리병을 통해 초록과 파랑의 변주가 춤추고 있다.


존 싱어 사전트, 곤돌라를 탄 라몬 수베르카소(Ramon Subercaseaux), 1880, 캔버스 유채, 판넬에 부착, 37.1x 54.9cm, 딕슨 갤러리 앤 카드, 테네시주 멤피스



1880년, 사전트는 라몬 수베르카스(1854~1937)의 아내 아말리아의 초상화를 의뢰받으며 그와 인연을 맺었다. 아말리아는 훗날 사전트를 “진정한 친구”이자 “매우 유쾌한 사람”으로 회상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오래 이어졌고, 1880년대 초 베네치아에서는 잠시 스튜디오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사전트는 운하의 곤돌라 안에서 작업하는 친구의 모습을 솔직하고 실험적인 스케치로 남겼다. 흥미롭게도, 라몬 역시 사전트의 수채화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사전트는 곤돌라 안의 흐릿하고 여과된 빛과 운하의 반짝이는 물을 대조했다.


존 싱어 사전트, 라몬 수베르카소, 1880년 경, 캔버스에 유채,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1854년 명문가에서 태어난 라몬은 칠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산티아고 미술 아카데미 원장이었던 독일 화가 에른스트 키르히바흐(Ernesto Kirchbach)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며 예술적 감각을 키웠다. 법학을 포기하고 같은 해 로마로 건너가 호세 가르시아 라모스(Jose Garcia Ramos)의 수업을 받으며 유럽 미술의 정수를 접했다.


사전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가장 명성이 높았던 초상화가로, 라몬의 초상에서도 섬세한 붓터치와 인물을 약간 길게 늘이고 내면을 포착하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얼굴보다 한 번 더 밝게 칠해 빛을 받는 그의 이마는 명민함과 섬세함을, 깊은 눈동자는 차분하고 진중한 인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외교관으로 적임자라는 인상을 준다.


배경과 같은 붉은 하이라이트로 얼굴 전체를 마무리하며 26살의 젊은이가 가진 예술에 대한 열정을 영리하게 담았다. 사전트는 의뢰 받은 초상화 <라몬 수베르카소>는 고전적인 화풍에 인상주의적인 붓터치로,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곤돌라를 탄 라몬 수베르카소>처럼 자유롭고 굵고 빠른 붓터치를 보여준다.


라몬은 외교 활동과 병행해 글쓰기를 시작했고, 외무부 장관으로 정치적 경력을 완성했다.


존 싱어 사전트, 베네치아 리바 데글리 스카아보니 카페(Café on the Riva degli Schiavoni), 베네치아, 약 1880~82, 종이에 수채화, 25.3x 34.3cm, 개인 소장



사전트는 어머니의 격려로 어린 시절부터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수채화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휴대성이 뛰어나 평생 수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린 시절 베네치아를 방문했던 그는 파리 시절부터 이 도시의 신비로움에 매혹되었고, 20세기까지도 베네치아를 새로운 방식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그의 작품 <회색 날씨의 베네치아>는 그러한 탐구의 한 예다. 활기찬 카페 풍경 속에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트 교회가 왼편에, 도제의 궁전이 오른편에 자리하며 베네치아의 주요 해안가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 작품은 1881년 살롱에서 공개된 단 두 점의 수채화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전트의 섬세한 붓터치와 빛의 변주가 베네치아의 매혹을 고스란히 담아낸 장면이다.


존 싱어 사전트, 회색 날씨의 베네치아, 1882, 캔버스에 유채, 52.5x 70.5cm, 개인 소장



사전트는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다시 찾고 싶어 했지만, 화가로서 충분한 성취감을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 그에게 1880년과 1882년의 베네치아만큼 강렬한 매혹을 불러일으킨 도시는 없었다. 긴 체류 기간 동안 그는 관광지의 화려한 명소 대신, 도시의 고유한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1880년 9월부터 약 6개월, 그리고 1882년 늦여름부터 몇 달 동안 이어진 두 차례의 베네치아 체류는 그의 예술적 탐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사전트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기념물을 피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리바 델리 스키아보니(Riva degli Schiavoni)를 따라 그랜드 캐널(Grand Cannal) 입구로 펼쳐진 해안가의 광활한 파노라마를 그려냈다. 오른편 멀리 산 마르코 종탑이 솟아 있고, 왼편 지평선에는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Santa Maria della Salute) 교회가 안개 속에서 은은히 모습을 드러내며 베네치아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완성한다.


<회색 날씨의 베네치아> 부분



사전트의 베네치아 시절 작품은 풍경 묘사를 넘어, 색채와 분위기, 구도의 실험을 통해 회화가 지닌 감각적 가능성을 탐구한 흔적을 보여준다. 단색 팔레트와 대기 효과, 대각선 구도는 그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흡수했음을 말해주며, 휘슬러와 베네치아에서 만남이 남긴 흔적은 사전트가 초상화가를 넘어 실험적 화가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결국 이 작품은 사전트가 단순히 인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탐구자였음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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