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희의 그림 읽기(24)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을 꽂은 베르트 모리조], 1872, 캔버스에 유채, 55x38cm, 개인소장
모리조의 딸 줄리의 일기에 따르면, 인상주의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는 어머니가 주최하는 어느 목요일 저녁 모임에 마네의 [제비꽃을 꽂은 베르트 모리조]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모리조는 그날 마네로부터 자신의 동생 외젠과 결혼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18세기 유명한 로코코 화가인 프리고나르(Jean Honore Fragonnard)를 종조부로 둔 베르트와 에드마 자매는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존경받는 사교모임 주최자였다. 자매는 풍경화로 유명한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에게 개인교습으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1864년 23살인 모리조는 살롱에 두 점의 풍경화로 입선하였고, 예술적 감성이 뛰어나 28살에 이미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다. 1867년 모리조는 언니 에드마와 루브르에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작품을 모사하던 중 화가 팡탱라투르의 소개로 티치아노의 작품을 모작하고 있던 마네를 만났다. 드가와 마네도 루브르에서 만났다. 루브르는 성별 구분 없이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제비꽃을 꽂은 베르트 모리조] 부분
에드마에게 쓴 모리조의 편지에서 그녀는 마네의 그림을 “야생 과일, 혹은 심지어 약간 덜 익은 것”에 비유하고 “그건 날 전혀 불쾌하게 하지 않는다”라는 통찰을 했다. 그런 마네가 모델을 부탁하자 모리조는 흔쾌히 응하였다. 그의 작품 [발코니]를 시작으로 10여 점의 작품에 모델을 서게 된다. 모리조의 움푹한 두 눈은 지나치도록 강렬하였으며, 불안정하고 매혹적인 낯빛을 가지고 있었다. 마네와 모리조 사이엔 에로틱한 감정이 불타올랐다.
마네와 드가 그리고 모리조 가족은 세 집을 오가며 음악회를 열고 한 주에 몇 번씩 만나는 관계가 되었다. 마네는 이미 결혼을 했다. 모리조를 향한 마네의 감정도 마네를 향한 모리조의 감정도 현실에 부딪쳐 마네 동생과의 결혼이라는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드가는 언제나 그렇듯 이 자리에 있었고 외젠의 초상화를 그려 이날을 기념했다.
에드가 드가, [외젠 마네], 1874, 캔버스에 유채: 모리조와 외젠의 결혼 선물로 그려주었다.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한 뒤 외동딸 줄리(Julie Manet)를 키우면서 그림을 그렸다. 모리조는 8회의 인상주의 전시에 줄리를 낳던 해를 제외하고 가장 충실하게 참가한 화가이다. 그녀는 개인의 시각적 체험을 그림에 담으려 애썼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제자인 폴 발레리는 “그녀는 그림을 위해 살았고, 인생을 그림에 담았다”라고 평했다.
출간된 줄리의 일기에서 모리조의 화실에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가 걸려 있는 사진을 보니, 이 작품에 대한 모리조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리조는 마네 사후 경매에서 이 작품을 구입하였다. 줄리는 태어날 때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모리조가 죽은 뒤 줄리는 후견인들인 르누아르에게 그림을 배웠고 말라르메로부터 일기 쓰기를 권유받았다.
줄리의 일기를 보면 당시 화가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생생한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다. 줄리는 결혼 전에도 상속받은 유산으로 경매나 전시회에서 드가와 르누아르와 함께 그림을 구입했다. 드가의 제자이며 철강업을 하는 아버지를 둔 화가 에르네스트와 결혼하며 부모님이 물려준 집에서 결혼생활을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줄리가 어머니와 큰아버지 마네를 그리워하며 소중히 간직한 작품이었다.
영화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에서는 화가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과 마네와 모리조의 만남 그리고 모델을 서는 모리조가 묘사된다. 보불 전쟁 이후 33살이 되는 모리조가 외젠 마네와 결혼하기로 하며 스크롤이 올라간다.
19세기 후반을 관통했던 화가들을 평전에는 ‘보불 전쟁’과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자주 등장한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삼촌의 후광으로 제2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삼촌처럼 제2 제정의 황제에 올랐다. 물론 그도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은 시절을 제공했지만, 말년에 비스마르크를 앞세워 독일을 통일하려는 프로이센과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된다.
1870년 7월,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나폴레옹 3세는 항복했다. 그러자 프랑스 민중들은 파리에서 황제 폐위와 제3 공화국 설립을 선포하고 국민방위군을 결성하여 파리에서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무장한 프로이센 군에게 겨우 수개월간 저항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보불 전쟁(1870~71) 동안 마네와 드가, 두 화가는 주방위군에 징집되어 파리가 포위된 동안 파리에 남았다. 그들은 오랜 굶주림, 추위, 그리고 박탈감을 견뎌냈고, 그래서 그들은 나라를 떠난 많은 예술가들과 비교되었다. 그 와중에 화가 바지유(Jean Frederic Bazille)는 29살의 나이에 전사하여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반면 모네는 영국으로, 세잔은 에스타크로 피난 가서 징집을 피하였다. 그리고 피사로는 유대인이므로 아들들과 함께 혜택은 보면서 의무는 다하지 않았다는 보수주의자 드가의 비난을 받았다.
보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1789년 대혁명에서 이미 정부를 전복한 경험이 있는 파리의 노동자 계급 민중들은 프로이센과의 강화 조약에 반대하며 시청을 점거하고 선거에 의해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사회주의적 자치정부)을 수립하였다. 파리 코뮌은 약 2개월 정도 존속하면서 혁신적 개혁을 주도하였으나, 사회주의의 확산을 우려한 프랑스 정부군과 주변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 그 과정에서 2만여 명이 넘는 코뮌 군이 학살되어 한 때 파리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도시였다.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 부분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는 파리 코뮌 진압의 여파로 센강 아래로 흐르던 피비린내를 씻어내려는 마네의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모리조의 이미지는 보불 전쟁 이전의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파리로 재건하려는 특별한 의지와 열망을 표현한다. 전쟁 전, 나폴레옹 3세의 황비 외제니가 즉위식에서 제비꽃 꽃다발을 든 이후 파리에는 제비꽃이 유행한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어 더욱 화사한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를 가진 모리조는 우아함의 상징이었다. 빠른 붓질로 뭉개진 제비꽃만 보라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화가들은 검은색에 물을 섞어가며 농담을 조절하여 그리는 수묵화가 오랜 시간 주류를 이루었기에 검은색의 사용에 무척 익숙하다. 그러나 서양 미술에서 검은색을 제대로 사용한 화가라면 벨라스케스를 뽑을 수 있고, 근대에 들어서는 마네가 특히 그렇다. 마네는 어느 화가보다도 검은색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화가이다. 전통적으로 검은색은 고귀한 색으로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의상의 색과 사회적 신분은 동서양 모두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1653년 독일 브라운 슈바이크 규정을 보면 복장과 색채 사용에 관한 규정이 얼마나 까다롭고 상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자들이 혼수를 장만해 보관하던 상자의 색까지도 규제하였다. ‘신부의 함’이라 불리는 이 상자를, 제1신분은 빨강, 제2신분은 녹색과 빨강, 제3신분은 빛나거나 어두운 녹색, 제4 신분은 색을 약간만 사용하여 장식하도록 규제가 엄격했다. 빨강은 귀족의 색이었고, 녹색은 시민의 색이었다. 하지만 녹색에도 차이가 있었다. 밝은 녹색이나 짙은 녹색같이 값싼 녹색은 가난한 시민의 몫이었고 순수한 녹색은 부유한 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영국은 오랜 전통의 양원제도를 아직도 운영한다. 하원은 국민이 선출하는 의회이다. 하원 의원들이 앉는 의자는 녹색이고, 귀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상원의 의자는 빨간색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경찰의 감시하에 엄격히 지켜졌던 복장 규정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복장 규정을 도덕적 관념에 부합하는 취향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에두아르 마네, 부채를 든 모리조, 1872, 캔버스에 유채, 60x45cm, 오르세 미술관
모리조는 화면 중앙에서 벗어나 다리를 꼬고 앉아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구두 신은 가는 발목을 보이고 있다. 피아노 다리를 보이는 것조차 터부시 했던 시절인데 발목을 일부러 드러낸 모리조의 자세는 파격적이다. 강렬한 눈빛을 부채로 가려 더욱 신비롭다. 핏빛처럼 붉은 빨간색과 검은색의 콘트라스트는 마네의 모리조를 향한 강렬한 욕망이 투사되었다. 이 초상화는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인물을 돋보이기 위한 배경이 동등한 자격으로 칠해져 무척 현대적인 미감을 갖는다.
에두아르 마네,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 1873, 캔버스에 유채, 34x26cm, 파리 마르 몽탕 모네 미술관: 빨강과 검정의 하모니에 기대어 누운 듯한 모리조의 각진 턱과 윤곽이 두드러지며 우아하다.
모리조는 마네의 영원한 뮤즈이자 지적 동반자였고, 마네 사후 회고전을 개최하는 등 누구보다 화가로서 마네를 존경한 동료였다. 우리는 사각형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화가의 캔버스를 통해 다시 창조된 세계를 접한다. 마네의 예술적 표현을 통해 창조된 작품으로 관람자는 인간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관람자는 예술에 깊이 접근하면 할수록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따라서 살 냄새나는 마네의 그림 읽기는 곧 인간 읽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