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희의 그림 읽기(44)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마우리츠하위스는 헤이그 중심부의 작은 호수인 호프베이버르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마우리츠의 집’이라는 뜻이고, 요한 마우리츠(Johan Maurits, 1604~1679)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설탕과 노예무역을 하고자 점령한 브라질 동북부 식민지의 주지사였다. 17세기에 브라질의 일부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1633년에서 1644년에 걸쳐 그는 브라질에서 번 돈으로 헤이그에 이 집을 지은 것이다.
마우리츠하위스는 네덜란드에 고전주의를 최초로 도입하여 지은 대표적 건축물 중 하나이다. 팔라디오 양식(Palladianism)의 대칭적인 정면, 높은 기둥, 그리고 팀파늄은 그리스와 로마 건축에 기원을 둔다.
마우리츠하위스는 작지만, 당당히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17세기 회화 컬렉션을 소장한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특히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톨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황금방울새>를 소장하고 있으니 그 명화들을 감상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우선 마우리츠하위스가 지어진 식민지 역사와 관련 있는 그림을 살펴보려 한다.
얀 데 바엔, 나사우-세이지 백작(Nassaau-Siege) 요한 마우리츠, c. 1668~1670
마우리츠는 열대 나무로 만들어진 패널, 브라질 풍경을 묘사하는 벽화, 브라질에서 가져온 많은 양의 물건들로 인테리어를 했다. 그러나 1704년 대규모 화재로 인해 내부가 불타버렸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1822년 새롭게 단장하여 지금까지 왕립 갤러리로 사용하고 있다.
아드리안 한네만, 흑인 하인과 함께 있는 메리 1세 스튜어트의 사후 초상화(Maria I Stuart, 1631~1660), c. 1664: 흑인노예가 등장하는 그림을 티치아노도 그렸다. 이는 하얀 피부를 극적으로 대비하고, 고귀한 주인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처음에 개신교 네덜란드인들은 노예제도를 가톨릭 신자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적들이 저지른 ‘비기독교적 행위’로 간주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브라질의 동부에, 서인도회사가 서부에 도착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네덜란드인들도 식민지에서 노예 거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즈음에 목사와 행정 관리 등 비인도적인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네덜란드인들이 많았지만, 돈 앞에 장사 없듯이 점차 그들의 반대는 힘을 잃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 일부를 통치하던 기간(1630~1654)은 네덜란드 노예 역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요한 마우리츠는 이런 역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브라질에 도착한 후 그는 포르투갈인에게 대출을 해주며 버려진 설탕 공장을 인수하여 플랜테이션 경제를 되살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공장을 운영하는데 노동력이 부족했으니 노예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1637년 초, 마우리츠 주지사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포르투갈 교역소 엘미나 성(현재의 가나)을 점령하라고 함대를 파병했다. 3년 후, 마우리츠는 또 다른 함대를 보내 루안다(앙골라) 시를 함락하였다. 그곳은 당시 가장 중요한 노예 공급처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서인도회사의 명령에 따라 마우리츠는 네덜란드를
노예무역에 끌어들였다.
프란스 포스트, 브라질 농장의 숙소가 있는 풍경, C. 1655~60, 마우리츠하위스
요한 마우리츠는 설탕 생산을 계속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가톨릭 신자들과 유대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다른 많은 식민지 지역과 달리 포르투갈 인은 서인도회사가 브라질 북동부를 점령한 후에도 대부분 거기에 남아있었다. 그들을 쫓아내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일이었다.
프란츠 포스트(Frans Post, 1612~1680), 브라질 풍경, 1656, 프란스 할스 미술관, 하를렘
1637년 화가 프란츠 포스트는 마우리츠의 요구에 따라 브라질 페르남부르크 주로 왔다. 페르남부르크 주는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인들의 최초 정착지이다. 또한 남아메리카 최초의 유대교 회당인 시나고그가 설립된 지역이기도 하다.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는 재산권을 인정해주지 않아 유대인들이 신대륙으로 떠나게 만들었다.
브라질 동북부 연안 페르남부크 주의 주도 헤시피(Recife)와 올린다(Olinda)
헤시피 해안
헤시피에서 대서양 해안을 따라가는 도로에는 식민지 풍의 저택과 별장이 즐비하고, 그 도로의 이름은 ‘보아 비아젬(Voa Viagem, 즐거운 여행)’인데 말 그대로 매우 아름다운 풍광이라 여행이 즐겁다. 헤시피는 남위 8도 03분, 서경 34도 52분에 위치하는 열대 몬순 기후 지역이라서 일 년 내내 기온과 습도가 높다.
헤시피는 2014년 월드컵 개최 도시로, 서울시 면적의 33% 정도이고 인구는 160만 명이 거주한다. 1837년 올린다에서 헤시피로 페르남부쿠 주의 주도를 옮겨왔다. 헤시피는 브라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나 살인율이 제일 높은 도시로 악명 높다. 노예해방 이후 빈민층으로 전락한 이들이 범죄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고, 신분상승의 통로가 남자는 축구, 여자는 모델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범죄로 희생되는 사람은 6만 5천 명 정도로, 이는 베트남전에서 10년 동안 희생된 미군의 수와 맞먹는다.
<브라질 풍경> 부분
올린다와 헤시피는 히오데자네이로만큼 카니발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런 도시들은 주로 노예에 의해 사탕수수, 커피 등 대농장이 운영되는 곳이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려온 노예들을 채찍으로만 다스리기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추수철이 시작되기 전 한여름인 2월 며칠 간을 해방구로 인정해 주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카니발로 발전된 것이다.
헤시피는 1537년부터 포르투갈의 부두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올린다에서 생산된 설탕을 실어 나르는 부두에 불과했으나 사탕수수를 경작하기 알맞은 땅과 기후이고 유럽에서 이동하기 좋아서 상업 중심지로 크게 발달하였다.
헤시페 히우브랑코 광장 역사지구에서 새로운 건물은 다른 건물과 다른 설계여야만 시가 허가를 내주었다. 파란 하늘 아래 빛이 튕겨져 나오는 컬러풀한 색감이 눈이 부시다.
올린다(Olinda)의 세(Se) 성당 담에 앉아 약 6km 떨어진 헤시피를 바라보니 스카이라인이 뿌옇게 보인다.
스페인은 네덜란드와의 전쟁 시, 당시 유럽에서 인기 있던 브라질 산 설탕의 유통을 담당하던 네덜란드 상선들이 브라질에 가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헤시피, 사우바도르(Salvador) 나타우(Natal) 등 몇몇 설탕 생산 도시를 침략하였다.
포르투갈은 자국 영토를 네덜란드가 침략하자 전쟁이 벌어졌다. 올린다의 세(Se) 성당의 창과 벽은 요새처럼 포탄에 견디도록 두툼한 벽으로 만들어졌다. 이 지역을 정복했다는 증거로 포르투갈이 지배하면서 세운 성당을 네덜란드가 지배하면 다시 부수고 짓는 일이 반복되었다. 까르모 광장을 중심으로 세 성당과 함께 20여 개의 수도원과 교회가 언덕 위의 세 성당을 바라보도록 지어졌고,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프란스 포스트, 브라질 이타마라카 섬의 풍경, 1637:실루엣으로 묘사되었지만 농장주와 흰 반바지만 입은 노예들의 삶이 드러난다.
자카리아스 바그너, 헤시피의 노예시장, ca. 1637~1641
마우리츠 주지사는 포스트에게 풍경, 사람, 자연환경에 대한 그림을 기록으로 만들도록 의뢰했다. 그러나 식민지에 대한 포스트의 시선은 다소 목가적이다. 그런 포스트가 보여주지 않은 것은 설탕 농장에서 힘들고 위험한 노동에 시달리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예들의 실상이었다.
이 그림에서 까맣게 보이는 덩어리가 알몸의 노예들이다. 노예를 사러 온 이들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다. 왼쪽에 여러 명을 골라 놓고, 두 팔을 번쩍 들게 하여 노예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모습이다. 마우리츠는 개인적으로 노예들을 거래했다. 서인도 회사의 관점에서 노예거래는 불법이 아니었지만, 사적인 노예 거래는 불법이었다. 무소불위의 마우리츠는 아프리카인들을 밀수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 큰 이득을 취했다. 심지어 그는 콩고 왕이 보낸 200명의 ‘선물’도 거래했다.
자카리아스 와그너(Zacharias Wagener), 흑인 여자(몰헤르 네그라):와그너는 주지사의 참모였다.
여인은 열대 과일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은 아이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모자와 의상 그리고 배경이 자신들이 보고 싶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백인에게 노예란 결혼 후 자식을 낳아 재산증식을 해주는 포기할 수 없는 화수분이었다.
요한 마우리츠(Johan Maurits)의 모노그램(J. M를 합쳐 한 글자로 도안함)이 새겨진 아이보리 의자
노예가 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주인의 표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노예에 낙인을 찍을 권리는 네덜란드 본국 정부의 승인에 따라 마우리츠에게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다.
다양한 기호와 문자로 된 달궈진 쇠 조각으로 노예에게 낙인을 찍는 관행은 포로가 된 사람뿐만 아니라 소유자를 식별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의 재산 상태를 증명하는 것 외에도 소유자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낙인이 찍힌 도망자를 잡으면, 그 주인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주인은 도망친 노예를 잡아온 노예사냥꾼에게 보상을 하고, 노예에게는 마음껏 처벌을 할 수 있었다. 낙인은 노예뿐만 아니라 브라질 식민지 지배층에게 그의 힘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프란스 포스트, 개미핥기가 있는 풍경, 1660년경, 패널에 유채, 58 x 80.5 x 1.5cm, 상파울루 미술관
포스트는 네덜란드 하를렘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브라질의 풍경을 계속 그렸다. 수집가들에게 무척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의 목가적인 그림은 노예의 현실을 외면했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림을 구입하는 네덜란드인들은 신대륙에 대한 자신들의 신화적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는 그림을 원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노동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고 ‘존재와 폭로’가 이루어지는 고도의 공예품이다. 그래서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이란 존재폭로가 곁들여진 장인정신이다”라고 말했다.